[책&생각] 헤겔의 ‘역사’는 정의 실현의 무한한 발걸음

고명섭 기자 2024. 4. 26. 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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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헤겔 전문가 핀카드
후쿠야마 맞서 역사철학 재해석
“자유의 보편적 실현이 정의
정의의 길은 끝이 나지 않는 과정”
베를린대학에서 강의하고 있는 철학자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 위키미디어 코먼스

역사는 의미가 있는가
정의의 역사적 형태들에 관한 헤겔의 논의
테리 핀카드 지음, 서정혁 옮김 l 그린비 l 2만7000원

테리 핀카드(미국 조지타운대학 교수)는 독일 철학자 헤겔(1770~1831)의 삶과 사상을 그린 방대한 전기(‘헤겔’)로 국내에 알려진 학자다. 미국 철학계에서 헤겔 철학의 부흥을 이끈 주역 가운데 한 사람으로 꼽힌다. ‘역사는 의미가 있는가’(2017)는 헤겔의 역사철학을 새로운 눈으로 판독하는 핀카드의 최근 저작이다. 이 책에서 핀카드는 ‘자유의 실현’이라는 헤겔의 역사관을 ‘정의의 실현’이라는 관점으로 재해석한다.

핀카드는 헤겔 철학에 대한 게으른 해석이 빚어내는 오해를 바로잡는 데서 논의를 시작한다. 헤겔이 정립-반정립-종합의 운동이라는 도식으로 역사를 해석했다는 것이 흔한 오해 가운데 하나다. 이를테면 고대 페르시아라는 정립에 대한 반정립이 그리스였고, 그 정립과 반정립의 종합이 로마제국이었다는 것이 대표적이다. 핀카드는 헤겔이 그런 식으로 역사를 서술한 적이 없다고 잘라 말한다. 또 다른 오해는 역사가 결정론적 필연성에 따라 끝없이 진보하며 그 진보가 헤겔 당대에 완성에 이르렀다는 해석이다. 핀카드는 이런 해석도 단호히 부정한다. 미리 결정된 도식을 따르는 그런 역사는 없다.

헤겔의 철학이 관념론으로 불리는 것은 세계사의 흐름을 정신(Geist)의 눈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정신이 세계사를 관통하며 주재하고 있다. 그런데 헤겔이 말하는 그 정신은 인간의 삶과 동떨어진 초월적 정신이 아니다. 정신은 ‘인간의 집합적 마음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지 다른 것이 아니다. 핀카드는 이 점을 되풀이하여 강조한다. 전체 인류의 마음이야말로 헤겔이 말하는 ‘정신’이다. 이 집합적 정신은 아무렇게나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경로에 의존하여 나아간다. 그러므로 세계사에 필연성이 있다면, 그 필연성은 인류의 정신이 길에 의존해 길을 내가는 것을 부르는 이름일 뿐이다. 역사는 인간과 무관한 절대정신의 무조건적 자기실현의 과정이 아니다.

동시에 핀카드는 인간이라는 존재가 ‘이성’과 ‘동물’의 통일체, 곧 ‘이성적 동물’임을 특별히 강조한다. 이때의 이성은 ‘자기의식’(self-consciousness)을 지니고서 자기 자신을 성찰할 수 있는 능력을 뜻한다. 인간은 동물로서 ‘자연의 요구’에 따라 살아야 하는 자연적 생명체이자, 법과 윤리 같은 규범적인 것을 인식하고 그 규범에 따라 사는 규범적 생명체이기도 하다. 헤겔은 이런 이중적 특수성을 지닌 인간을 두고 “서로 모순되는 두 세계에서 살아야 하는 양서류와 같은 동물”이라고 말한 바 있다. 인간은 자연적 생명체이자 규범적 생명체로서 내적 모순을 지닌 채 긴장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이 긴장 속에서 인류가 집합적으로 만들어가는 것이 역사다.

헤겔은 그 역사의 최종 목적이 자유의 실현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여기서 핀카드는 ‘목적’(end)을 ‘유한한 목적’과 ‘무한한 목적’으로 나누어 볼 것을 제안한다. 유한한 목적이란 한번 달성되면 끝이 나는 목적이다. 음식을 먹고 배가 부르면 그것으로 일단 상황은 끝난다. 우리 삶은 이런 수많은 유한한 목적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무한한 목적은 한번의 행동으로 달성될 수 없다. “무한한 목적에는 본질적으로 한계가 없다. 이 무한한 목적이 효과를 내려면 부단한 지속적 활동이 요구된다.”

헤겔이 역사의 목적으로 제시한 ‘자유의 실현’이 바로 그런 ‘무한한 목적’ 가운데 하나다. 자유의 실현은 끝이 나지 않는 과정이다. 이런 말을 할 때 핀카드가 염두에 두는 것이 프랜시스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말’ 담론이다. 자유민주주의가 소련 공산주의에 승리를 거둠으로써 역사가 종말 곧 목적에 이르렀다는 후쿠야마의 주장은 자유를 ‘유한한 목적’으로 이해한 데 따른 것이다. 자유의 실현은 끝이 없고, 그러므로 역사의 진행도 끝이 없다.

헤겔은 이 자유가 1789년 프랑스혁명이라는 대전환과 함께 역사의 목적으로 등장했다고 말한다. 그러면 자유는 어떻게 역사의 목적이 됐는가? 핀카드의 헤겔 해석을 따르면, 자유는 ‘정신’이 처음부터 설정한 목표가 아니라 역사의 경로를 거쳐 뒤늦게 확립된 목표다. 헤겔의 역사철학은 그 자유의 출발점으로 고대 그리스를 지목한다. 아테네 시민들이야말로 ‘자유의 개념’을 발명해낸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 자유가 단순한 개념의 차원을 넘어 ‘이념’ 곧 보편적 이상의 차원으로 올라선 것은 프랑스혁명이라는 거대한 변화 이후의 일이다. 헤겔은 자유의 이념을 불러온 프랑스혁명을 이렇게 찬양했다. “그것은 영광스러운 새벽이었다. 모든 사유하는 존재들이 이 신기원을 축하하는 데 동참했다.”

그러면 왜 자유는 프랑스혁명에 이르러서야 ‘이념’으로 등장할 수 있었을까? 근대 이전 사람들에게는 ‘자유에 대한 반성적 인식’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핀카드는 말한다. ‘자유에 대한 반성적 인식’은 ‘정의의 관념’에서 나온다. 소수의 자유는 정의롭지 못하며 참된 자유가 아니라는 것이 정의의 관념이다. 고대 그리스에서 자유로운 시민은 성인 남성뿐이었다. 더구나 그 남성 시민들이 자유로운 정치적‧사회적 삶을 사는 데는 생산활동을 전담하는 노예의 존재가 필수적이었다. 시민의 자유는 노예의 부자유에 토대를 두고 있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이 모순을 자각하지 못했다. 근대에 들어와서야 ‘자유가 소수의 자유가 아닌 만인의 자유일 때에만 진정으로 자유의 이념에 부합한다’는 반성적 인식이 분명해졌다. 이런 반성적 인식을 끌어낸 것이 바로 정의의 요구였다.

그 정의의 요구에는 종결이 없다. 핀카드는 노예를 가혹하게 부리며 스스로 ‘자유의 땅’이라고 부른 헤겔 시대 북아메리카의 자기모순을 거론한다. 모순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헤겔 사후 유럽 제국주의가 비서구를 식민지로 만들어 예속시킨 것도 자유의 이념에 대한 배반이었다. 이런 모순에 맞서 정의의 요구가 터져 나오는 것은 필연이다. 정의의 실현은 자유의 보편적 구현이라는 최종 목적을 향한 무한한 과정이다. 더구나 자유가 만인이 시민으로서 기본권을 누리며 자기 자신으로 참답게 존재함까지 포함한다면, 이런 자유를 향한 정의의 발걸음은 끝이 날 수 없다. 헤겔의 역사철학이 이야기하는 것이 바로 이런 무한한 목적으로서 정의의 실현이라고 이 책은 말한다.

고명섭 선임기자 michae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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