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사랑과 용서 실천한 호남 기독교인들

김형주 기자(livebythesun@mk.co.kr) 2024. 4. 25. 1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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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교총 기독교 문화유산 답사
6.25때 천명 넘게 학살됐지만
교인들, 좌익 가해자들 용서해
아들 죽인 가해자 양자 삼기도
고아 3000명 보살핀 日윤학자
사랑으로 한·일 감정의 골 메워
손양원 목사가 자신의 두 아들을 죽인 공산주의자 안재선을 포옹하는 모습을 형상화한 조형물 ‘화해와 용서’. 실제로 손 목사는 안재선을 용서하고 양아들로 삼는다. 김형주 기자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하는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그리스도가 십자가형을 받은 뒤 하나님에게 외친 말·누가복음 23:34)

140여년 전 한반도에 개신교가 전파된 뒤 기독교인들은 사랑과 용서를 설파한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실현하려 노력해왔다. 식민 지배와 이념 대립으로 점철된 한국 근현대사에서 기독교인들은 원수를 용서하고 포용하는 행동을 보여줬다.

지난 22~24일 힌국교회총연합(공동대표회장 이철)은 영광, 신안, 목포, 여수, 순천 등 호남 지역의 기독교 문화유산을 돌아보는 답사를 진행했다.

6.25전쟁 중 공산주의자들에게 학살된 염산교회 교인 77명 중 32명을 안장한 합장묘. 김형주 기자
첫 방문 지역인 영광은 6·25전쟁 당시 남침한 인민군과 좌익 부역자들이 기독교인 수백명을 학살한 곳이다. 대형 염전이 산재한 염산면 염산교회에서 교인 77명이, 전라도 지역 선교의 아버지 유진 벨(1868~1925)이 세운 야월교회에서 65명이 죽임을 당했다.
전라남도 영광에 위치한 야월교회 기독교인순교기념관. 김형주 기자
염산교회는 기념관을 조성해 당시 인민군이 사용한 죽창과 대검, 학살 장면을 그린 기록화, 피해자 명단 등을 전시하고 있다. 야월교회 역시 순교기념관을 운영하며 교인들의 희생을 기리고 있다. 참사가 일어난 시기에 아홉 살이었던 최종한 야월교회 장로(83)는 기자단에게 “당시 우리 가족은 예수님을 믿지 않아서 살아남았지만 교인들은 어린 아이까지 새끼줄에 묶인 채 끌려가 죽임을 당했다”며 “현재는 가해자·피해자의 후손들이 함께 교회를 다니며 축복받은 삶을 살고 있다”고 증언했다.
학살된 후 암매장된 전라남도 신안 임자진리교회 교인들의 시신 발굴 장면. 문준경전도사순교기념관
좌익과 인민군이 6·25 전쟁 중 살해한 기독교인이 1157명(진실화해위 자료 기준)에 달했지만 많은 기독교인들은 인민군이 물러난 뒤 가해자들에 보복하지 않는 관대한 모습을 보여줬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르기 위해서였다.
손양원 목사의 장례 때 상복을 입은 양아들 안재선. 손양원목사순교기념관 전시물 촬영
대표적 인물이 여수 애양원교회에서 한센병 환자들을 돌보던 손양원 목사(1902~1950)였다. 손 목사는 1948년 여순사건으로 공산주의자 학생들에게 두 아들을 잃었으나 이후 국군에 붙잡힌 가해자 안재선을 구명해 양자로 삼는다. 안재석을 친자식처럼 대한 손 목사는 1950년 여수를 점령한 인민군에게 죽임을 당하고 안재선은 상주가 돼 의붓 동생들과 함께 손 목사의 소천을 배웅한다.
손양원 목사 유적공원에 설치된 손양원 목사상. 힌국교회총연합
여수시 신풍리에 위치한 손양원 목사 유적공원에는 애양원 역사관과 애양원 교회, 한센병 기념관 등과 함께 손 목사의 일대기와 유품 등을 소개하는 손양원 목사 순교기념관이 있다. 송영오 예양원교회 장로는 취재진에게 “갈등과 분열이 극심한 오늘날의 사회에 손양원 목사의 이야기가 귀감이 됐으면 좋겠다”고 강조했다.
목포 시민들의 성금으로 공생원 안에 세워진 사랑의 가족 기념비. 윤치호·윤학자 부부와 7명의 어린이의 모습이 새겨져 있다. 비문은 한국어·일본어·영어 3개 언어로 적었다. 김형주 기자
목포에서 고아들을 위해 헌신한 기독교인 윤학자(다우치 치즈코·1912~1968)는 36년의 식민 지배 동안 깊어진 한·일 간 감정의 골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메운 사례다. 일제 강점기 음악 교사였던 일본인 윤학자는 보육원인 공생원을 만들어 고아들을 돌보는 윤치호 전도사와 결혼한 뒤 1968년에 작고할 때까지 3000여명의 고아들을 보살폈다.

윤학자는 한·일 간 우애를 상징하는 인물이었다. 그의 헌신이 일본 NHK에 방영됐을 때 일본인들의 후원이 이어졌고, 윤학자 가족의 이야기는 최초의 한일 합작 영화 ‘사랑의 묵시록’으로 제작됐다.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외국 여성 최초로 대한민국 문화훈장을 받았고, 제1회 목포 시민의 상과 일본 천황의 훈장을 받았다. 1968년 타계했을 때는 목포 시민장으로 장례가 치러졌다. 지난 10월 윤석열 대통령은 공생원에서 열린 공생복지재단 설립 95주년 기념식에 참석해 “(한·일 과거사 합의를 이끌어낸) ‘김대중·오부치 선언’은 바로 이 공생원에서 출발한 것”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윤치호·윤학자 부부가 고아들을 보살핀 목포의 보육원 공생원 건물 전경. 김형주 기자
목포시 죽교동에 있는 공생원에는 목포시문화유산 제19호인 윤치호·윤학자 기념관, 경향신문이 윤학자를 기리기 위해 1970년 세운 어머니의 탑, 목포 시민들의 성금으로 2003년 만든 사랑의 가족 기념비 등이 존재한다. 오부치 게이조 전 일본 총리가 기증한 매화나무, 오사카 시민들의 모금으로 지은 오사카 사랑의 집, 일본항공(JAL)이 기증안 JAL 하우스 등도 있어 국경을 초월한 연대를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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