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영화로 회복하는 하루…고요히 나의 내면과 만나는 곳

박미향 기자 2024. 4. 25. 1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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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미향의 미향취향
경기도 파주시 문발동 ‘파주 출판도시’
‘지지향’이 있는 건물 1층에는 라운지 도서관 ‘문발살롱’이 있다. 박미향 기자
미향취향은?

음식문화와 여행 콘텐츠를 생산하는 기자의 ‘지구인 취향 탐구 생활 백서’입니다. 먹고 마시고(음식문화), 다니고(여행), 머물고(공간), 노는 흥 넘치는 현장을 발 빠르게 취재해 미식과 여행의 진정한 의미와 정보를 전달할 예정입니다.

“이국적이다!”

이 말은 우리가 주로 매력에 반한 여행지에 보내는 찬사다. 이제 여행은 끼니처럼 일상이다. 수많은 여행지 중에 어느 곳을 골라야 이런 감탄을 터트릴 수 있을까. 세계적인 유명세가 보증수표일 순 없다. 기실 여행지 선택에는 자신의 내면이 깊숙이 연관되어 있다.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웨이브가 서비스하는 드라마 ‘박하경 여행기’만 봐도 이는 쉽게 증명된다. 주인공은 황폐해져 가는 내면을 복원하기 위해 해남, 군산, 속초, 대전 등을 여행지로 고른다. ‘단기 회복’에 더없이 좋은, ‘딱 하루 여행’이 가능한 지역이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가 끌리는 여행지는 자신의 ‘안’과 연결된 곳이다.

이런 관점에서 경기도 파주시 문발동에 있는 ‘파주 출판도시’는 글자의 소중함과 책의 위대함을 익히 깨친 이들의 여행지로 안성맞춤이다. 더구나 영화의 세계에도 흠뻑 빠질 수 있으니 이만한 문화 여행지도 없다. 아이들과 나들이하기에도 더없이 좋은 곳이다.

‘명필름아트센터’ 외관. 사진작가 김종오 제공

지난 14일 오전께 도착한 ‘파주 출판도시’는 봄날의 낭만이 가득했다. ‘출판’에 방점이 찍힌 거리지만, 제일 먼저 찾은 곳은 영화제작사 명필름이 운영하는 복합문화 공간 ‘명필름아트센터’(이하 아트센터)였다. 영화는 영상으로 쓰는 책과 다름없다. 더구나 지난해 12월 리뉴얼을 통해 1층 카페 공간을 정비했다고 하니, 더욱 궁금해질밖에. 한국의 대표 건축가 승효상 선생이 설계한 아트센터는 지하 1층, 지상 4층 규모로 2015년께 개관했다.

해가 지면 펍으로 변신하는 1층 카페에 들어서자, 잠시 눈을 의심했다. 식탁 간의 간격이 넓어 마치 도서관처럼 보이는데다가 독서삼매경에 빠진 이도 한둘이 아니었다. ‘카페가 아니라 도서관인가’ 하는 착각이 든다. 이곳에서는 ‘카레 우동’이나 ‘카레 밥’, 오이샌드위치 등을 파는데 주문을 서두르는 이도, 식사를 급하게 하는 이도 없다. 시간이 느리게 흐르고 있었다. 창밖에선 따스한 햇볕이 쏟아져 들어왔고, 시를 낭송하는 듯한 낮은 바람 소리도 귓가에 맴돌았다. 한낮의 여유가 ‘깜짝 선물’처럼 주어지는 공간이다.

‘명필름아트센터’ 1층 카페. 박미향 기자
‘명필름아트센터’ 1층 카페에서 파는 ‘카레우동’. 박미향 기자

3층 ‘아카이브 룸’은 아트센터 여행의 백미다. 한쪽 벽에 명필름이 제작한 영화 스틸사진이 한가득 걸려있다. 명필름은 한국 영화사에 숱한 이정표를 세운 제작사다. 1996년 영화 ‘코르셋’ 개봉을 시작으로 ‘접속’(1997) ‘해피엔드’(1999) ‘공동경비구역제이에스에이(JSA)’(2000) ‘질투는 나의 힘’(2003) ‘광식이 동생 광태’(2006)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2008) ‘건축학개론’(2012) ‘카트’(2015) ‘아이 캔 스피크’(2017) ‘노회찬6411’(2021) 등과 최근작인 ‘길위에 김대중’까지 숱한 화제작을 세상에 내놨다. 명필름 영화 제작사는 영상으로 빚은 한국 현대사이자 문화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흑백과 컬러를 오가는 사진들은 배우의 생동감 넘치는 표정이 더해져 생생하게 다가온다. 한동안 그 앞을 서성이게 된다. 여행객의 지난 청춘이 사진 위로 겹쳐지기 때문이다. ‘애정’했던 영화라도 놓친 장면이 있기 마련이다. 그런 신을 반추하는 재미가 있다. ‘구경’만 하고 아트센터 여행이 끝난다면 섭섭하다. 명색이 영화사가 지은 아트센터가 아닌가.

‘명필름아트센터’ 3층 ‘아카이브 룸’에는 명필름이 제작한 영화 스틸 사진이 전시되고 있다. 명필름아트센터 제공
‘명필름아트센터’ 3층 ‘아카이브 룸’에는 명필름이 제작한 영화 스틸 사진이 전시되고 있다. 명필름아트센터 제공
‘명필름아트센터’ 4층 ‘스크리닝 룸’. 명필름아트센터 제공

4층 ‘스크리닝 룸’에선 ‘공동경비구역제이에스에이(JSA)’를 무료로 관람할 수 있다. ‘스크리닝 룸’이 주로 지난 영화를 곱씹는 공간이라면, 지하 영화관은 도심 대형 복합영화관에 견줘 3000~4000원(주말 기준) 싼 비용으로 화제작을 관람할 수 있다. 주말만 문 연다. 한국 조경 1세대 정영선 선생의 4계절을 담은 다큐 ‘땅에 쓰는 시’와 판타지 로맨스 영화 ‘키메라’,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감독 루카 구아다니노가 메가폰을 잡은 스포츠 영화 ‘챌린저스’, 일본 영화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등이 상영 중이다. 이곳에서 ‘땅에 쓰는 시’를 관람하면 특전이 있다. 정영선 선생이 조경한 아트센터 공간을 10분간 둘러볼 수 있다. 영화에선 노간주나무가 심어진 아트센터 중정 작은 정원에 대한 이야기가 등장한다.

‘미메시스 아트 뮤지엄’ 외관. 박미향 기자

아트센터 옆에는 유독 시선을 사로잡는 건물이 있다. ‘미메시스 아트 뮤지엄’(이하 뮤지엄)이다. ‘미메시스’는 출판사 ‘열린책들’의 자회사 이름이다. 예술서적을 주로 출간한다. 대지 면적 4628㎡(1400평), 연면적 3636㎡(1100평) 규모의 뮤지엄으로, 지하 1층·지상 3층 규모다. 2009년께 완공된 뮤지엄은 포르투갈 출신 건축가 알바루 시자가 지었다. 그는 건축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프리츠커상(1992)을 포함해 유럽 현대 건축상(1988), 울프 예술상(2001), 베니스 건축 비엔날레 황금사자상(2002·2012) 등을 수상한 바 있는 세계적인 건축가다.

낮 12시를 넘겨 도착한 뮤지엄에선 ‘빛 잔치’가 한창이었다. 직선과 곡선이 서로를 탐하듯 이어지면서 빚은 건물 벽면엔 햇살이 스며들다가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이곳 1층 카페도 시간이 멈춘 듯한 풍경을 연출했다. 폭신한 소파에 앉은 여행객들은 자연풍경을 건축에 끌어들이는 ‘차경’에 빠져들었다. 카페 식탁 옆에는 책 바구니도 있었다. 안쪽에 설치된 커다란 책장도 볼거리다. 둘러보기만 해도 지식이 쌓이는 듯하다. 커다란 따옴표 모양의 책상도 예술 작품처럼 아름답다. 여기서는 10% 할인된 가격으로 책을 구매할 수 있다. 오는 5월19일까지 ‘세상의 파편’을 화두 삼은 박수형·서민정·김선영 작가의 작품이 전시된다.

‘미메시스 아트 뮤지엄’ 1층 카페. 박미향 기자
‘미메시스 아트 뮤지엄’ 1층 카페. 박미향 기자
‘미메시스 아트 뮤지엄’ 1층. 박미향 기자

아트센터와 뮤지엄이 ‘느린 시간‘의 안식을 선물한다면, ‘지혜의숲’과 ‘열화당 책박물관’ ‘활자인쇄박물관’ 등은 압도당할 정도로 커다란 책장과 엄청난 양의 양서로 감동을 선사한다. ‘지혜의숲’은 1관과 2·3관으로 나뉘는데, 전자는 국내 학자들과 각 분야 전문가들이 기증한 책으로 채워졌다. 후자는 출판사들이 기증한 도서가 빼곡하다. 세상의 모든 지식이 다 모여 있는 듯한 풍경이다. ‘열화당 책박물관’은 출판사 열화당 발행인이 40여년 모은 책과 직원들이 고른 예술 서적이 가득한 여행지다. ‘활자인쇄박물관’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인쇄기 모델 ‘알바온’ 등을 관람할 수 있는 곳이다. 인쇄 체험 프로그램도 운영한다.

‘지혜의숲’ 풍경. 박미향 기자
‘지혜의숲’ 풍경. 박미향 기자

‘파주 출판도시’에는 개성이 강한 책방도 여러 개 있다. ‘보리책방’ ‘보림책방’ 등이다. 그중에서 ‘문발리헌책방골목’은 신기한 책방이다. 서점 안에는 마치 골목처럼 좁은 길이 나 있고, 그 양쪽엔 작은 책방이 입점해 있는 모양새다. 책 향을 느끼며 잠을 청할 수 있는 독특한 게스트하우스도 있다. ‘종이의 고향’이란 뜻인 ‘지지향’은 책 냄새 가득한 방 여러 개를 갖춘 숙소다. 오롯이 독서와 휴식에만 전념할 수 있는 공간이다. 지지향이 있는 건물 1층에는 라운지 도서관 ‘문발살롱’이 있다. 24시간 이용할 수 있는 독특한 장소다. ‘책 헤는 밤’이 마냥 좋은 이들이 반색하는 공간이다.

재밌는 ‘문발리헌책방골목’ 실내. 박미향 기자

‘파주 출판도시’는 1997년부터 조성되기 시작해 ‘책과 출판’을 중심에 둔 1단계(2007년까지), 영화를 추가한 2단계(2007~2018년)를 거쳐 지금에 이르렀다.

파주/글·사진 박미향 기자 m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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