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아의 도시스카프] 노인은 `이웃의 보물`, 함께하는 공간이 필요한 이유

2024. 4. 24. 1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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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아 라이프스케이프 크리에이터

한 해 전 96세 할머니와 같은 마당을 나눠 쓰며 1년 남짓 살았다. 이웃들은 동서남북 어디를 보아도 모두 아흔이 넘으신 어르신들이었다. 장이 서면 어르신들은 '사람 구경'을 하러 나가신다. 한 마을에서 수십 년을 같이 지내신 어르신들인데도 경로당보다는 밖에 나가 '사람 구경' 하는 것을 더 좋아하셨다. 지하철이나 터미널 같은 공공장소에서도 쉽게 볼 수 있는 풍경이다.

우리나라 전체 인구의 약 20%는 65세 이상이다. 노인정, 노인회관, 경로당, 노인복지회관, 재가 노인복지센터, 재가 노인요양센터 등 다양한 '노인 전용' 돌봄시설이 있다. 그중 경로당이 약 98%로 약 7만여 개나 된다. 그런 경로당을 어르신들은 "노인들이나 가는 곳"이라며 '노인을 비하'하고, 65세 미만 비노인들은 "노인들만 있는 곳"이라며 아예 세상 밖의 일처럼 여긴다.

경로당이 처음 생긴 1960년대 후반에는 그렇지 않았다. 당시 노인이 '노인'으로서 '노인들과만' 보내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평균수명도 지금보다 훨씬 짧았고, 가구당 서너 세대가 같이 살았으니 말이다.

'노인(老人)'이라는 단어가 우리에게는 사회적 스티그마(stigma)이다. 2021년 기준 조부모와 함께 사는 18세 이하 인구가 0.8%다. 사회적 보장을 요구하게 되는 65세 이상 고령 인구가 '노인'이라는 이름으로 '노인 전용' 공간에서 '노인들과만' 보내야 하는 시간이 약 35년이나 되는 셈이다. 고립이다. 그러니 거죽은 ICT 첨단기술 등을 덧입고 나날이 발전하고 있는데, 노인들은 도시의 이곳저곳 다른 공간을 찾아 나서는지도 모른다.

시설 무료 이용 등 경로우대는 좋을지 몰라도, '노인'이나 '경로우대'는 노땡큐인 것이다. 시설의 명칭, 즉 네이밍(naming)은 건축물의 정체성과 목적, 그리고 그 공간을 경험하는 방식에 영향을 준다.

독일 함부르크에 있는 한 시설은 노인이 사회의 불필요한 존재가 아니라 사회의 중요한 자원이라는 인식을 주고자 '이웃의 보물'로 네이밍했다. 아이부터 중년층에 이르기까지 지역민들은 노인세대와 적극적인 교류를 하며 노인의 소중한 역할을 느끼게 되었다.

해외에서는 시니어나 노인이라는 단어 대신 활동 센터(Active Centre), 생활 센터(Lifestyle Centre) 등으로 이름을 바꾸어 쓰는 추세다. 노인에게는 사회에 대한 소속감을 주고, 비노인에게는 노인을 자신과 같은 사회의 일원으로 인지하게 한다. 잠재적 사용자인 비노인에게 노인을 위한 공간을 간접적으로 경험시키며 공감을 확장시킨다.

'노인전용' 시설인 경로당은 누구의 것인가. 1년 365일, 노인 아닌 사람의 발걸음이라곤 명절이나 선거철이 아니면 보기 드문 곳. 도시 사용자로서 우리는 이 공간을 제대로 사용하고 있는 것인가.

공간은 사람의 생활방식, 상호작용, 그리고 사회적 관계를 형성하고 더 나아가 사용자의 정체성까지 정의한다. 도시 디자인은 사용자 간의 상호작용을 섬세하게 조정하고 계획해야 한다. 2000년대 초반부터 시작된 독일의 시니어센터 다세대(multi-generation) 하우스나 캐나다의 세대 간(intergenerational) 프로그램은 세대 간 밀도 있는 상호교류와 접점을 디자인했다.

유치원과 어린이집, 노인복지시설을 같이 두거나, 세대 간 공동 주거나 프로그램 운영 등의 실험을 통해 고령화로 인한 사회적 비용증가, 세대 간 갈등 등 문제를 풀어나갔다. 세대 간 접점이 있는 공간에서 노인은 쓸모없는 존재가 아닌, 사회의 소중한 공동자원이 되었다.

경로당 텔레비전 앞에 모여 앉아있는 노인, 유치원에서 아이들과 놀아주는 노인, 기업에서 젊은 직원들과 일하는 노인. 이렇게 그림을 그려보자. 같은 노인이라도 노인에 대한 인식이 다를 것이다. 공간이 갖는 힘이다.

공간에서의 사용자 간 상호작용, 즉 경험을 어떻게 디자인하느냐에 따라 사용자에 대한 정체성이 달라진다. 사용자에 대한 긍정적 정체성과 섬세하게 설계된 사용자 간 경험은 사회적 결속력을 강화하고, 도시 공동체도 더욱 건강하게 만든다.

좋은 디자인은 사용자에게 실천할 수 있도록 역할을 준다. 사용자에 대한 살가운 공감 없이는 어렵다. 공감은 단순히 사용자의 요구를 이해하고 충족시키는 것을 넘어선다. 공감은 사용자의 경험과 사회적 맥락을 깊이 이해하고 투영하는 과정이다. 시대와 사회적 맥락에 따라 공감도 진화한다. 예나 지금이나 65세 이상 고령자는 동일해도 고령자가 도시공간에서 원하는 삶의 경험(TUE)은 다르니 말이다.

서울 남자 노인의 태반은 종로3가 탑골공원과 송해거리 주변을 배회한다. 턱도 없이 싼 음식값과 이발요금, 영화도 3000 원이면 볼 수 있다. 작은 비용으로 먹고 마시며, 문화생활도 할 수 있으니 매일 공짜 전철을 타고 모여드는지도 모른다. 지금도 장날이 되면 '사람 구경'을 하러 가시는 어르신들이 눈에 선연하다.

그들은 우리 사회의 구성원인가 아니면 외부인인가. 만족스러운 삶을 살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저 한자락으로 밀려나 있는 것인가. 그들은 우리 사회에서 어떠한 역할을 할 수 있는가. '현재의 노인과 미래의 노인', 즉 '우리 모두'가 누릴 도시를 만들기 위해서는 공간에 대한 섬세한 조정과 배려, 그리고 지속적인 실험이 필요하다.

함부르크 '이웃의 보물' 선언문인 "우리는 삶을 살아갑니다"를 생각해본다.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그저 타인의 삶을 보며, 내 삶을 산다는 것이 아니다. 각자마다 역할을 하며 사는 것이다.

도시 공간을 디자인한다는 것은, 각 세대가 빚어내는 삶의 가치가 활용될 수 있는 커뮤니티를 만들어 모든 시민이 만족할만한 삶을 누리게 하는 것이다. 도시디자인은 결국 사람들 간의 상호작용에서 오는 경험과 사회적 관계를 만들어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시민이 각자의 역할을 할 수 있을 때, 우리 사회는 진정 잠재력을 발휘할 수 있다. 이것을 두고 "삶을 살아갑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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