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 횡격막의 요추 측’ [이종건의 함께 먹고 삽시다]

한겨레 2024. 4. 24. 1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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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횡격막의 요추 측', 번역기에 그렇게 적혀 있다.

'소 횡격막의 요추 측(부위)'을 그렇게 만났다.

그렇게 '소 횡격막의 요추 측'은 야키니쿠가 되어 텐트촌 식탁에 올랐다.

아, '소 횡격막의 요추 측'은 내장에 붙은 토시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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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횡격막의 요추 측’은 야키니쿠가 되어 텐트촌 식탁에 올랐다. 김가루와 참깨를 버무린 오니기리를 곁들이고 담백한 양배추와 간장에 조린 단호박을 반찬 삼는다. 필자 제공

이종건 | 옥바라지선교센터 활동가

‘소 횡격막의 요추 측’, 번역기에 그렇게 적혀 있다. 시부야의 오래된 ‘요요기 공원’, 모르는 눈에는 수령이 몇백년쯤 되어 보이는 커다란 나무들이 즐비하다. 한적한 9월의 도쿄, 사람보다 까마귀가 많은 고즈넉한 공원을 거닐다 보면 작은 텐트촌이 나온다. 이 일대에서 오랜 세월 살아온 홈리스들이 일군 풍경. 어엿한 집은 아닐지 몰라도, 쓰레기 하나 없이 잘 관리되고 있는 삶의 터전이다.

아름드리나무 아래 홈리스와 활동가들이 모여 소박한 식사를 준비한다. 곧 떠날 이에게 인사를 건네며, 어설픈 일본어와 반가운 한국어, 번역기가 오가는 우당탕탕 식사 자리다. ‘소 횡격막의 요추 측(부위)’을 그렇게 만났다. 초대한 이가 누군가 주셨다며 비닐에 담아 소중히 가져온, 잘 구워진 고기. 생긴 건 살코기인데, 씹을수록 내장 맛이 녹진히 묻어나니 신기하기도, 익숙하기도 했다.

무려 천년이라는 시간 동안 고기를 먹지 않았던 일본, 개방과 함께 육식을 시작했지만 하루아침에 익숙해지는 것이 아니었다. 그나마 먹는 고기라고는 냄새가 나지 않는 살코기였고, 내장과 그에 붙은 고기는 그대로 버려지기 일쑤였다. 이를 가져다 가난한 재일조선인들이 왜간장에 가볍게 양념해 구워 먹기 시작했고, 그것이 야키니쿠의 원형이란다. 지금도 곱창을 ‘호루몬’이라 부르는데, 이는 ‘버려진 것’을 뜻하는 오사카 방언에서 비롯됐다. 버려진 것들이 버려진 이들의 음식이 되더니, 이제는 어엿한 문화가 됐다.

버려진 것들은 맛있다. 뼈에 바짝 달라붙은 고기쪼가리, 못생겨서 잡히는 족족 다 버렸다던 우악스러운 물고기와 살짝 멍이 들어 말캉거리는 과일. 무엇하나 쉬이 버리지 못하고 살기 위해 요리하던 억척스러움은 정체성이요, 무엇하나 맛없게 먹질 않고 끝내 맛있게 먹는 방법을 찾아 살아낸 살뜰함은 버려진 것들의 지혜였다. 억척과 지혜가 만나 식탁을 내고, 살을 찌웠다. 우리네 식탁은 결국 버려진 것들의 몸부림에 빚을 지고 있다.

제법 잘났다하는 요리라면 어김없이 가난한 이의 식탁에 오르던 것들의 변주다. 도쿄든 서울이든, 그게 어디든 도시의 가장 맛있는 요소는 가난한 이들로부터 시작했다. 가난한 이들의 마을로부터, 호주머니 가벼운 이들이 안식처 삼던 후줄근한 거리로부터, 버려진 식재료들로부터. 그렇게 ‘소 횡격막의 요추 측’은 야키니쿠가 되어 텐트촌 식탁에 올랐다. 이웃들이 하나둘 음식을 가져와 자리가 풍성해진다. 김가루와 참깨를 버무린 오니기리를 곁들이고 담백한 양배추와 간장에 조린 단호박을 반찬 삼는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도쿄 올림픽, 우리의 88올림픽이 그러했듯 가난한 이들은 쫓겨나고, 갈 곳 없는 홈리스들의 안식처 역할을 하던 공원들도 철거되거나, 펜스가 쳐졌다. 활동가들과 홈리스들이 함께 준비하는 공동식사, 생존을 위한 연대이자 스스로 식사를 준비하던 자존감의 자리로 기능했던 공원도 펜스가 쳐진 채로 그렇게 방치되어 있다. 활동가들은 그곳에 꽃을 심었다. ‘게릴라 가드닝’이라 불린단다.

일본 시부야 요요기 공원의 ‘게릴라 가드닝’. 필자 제공

철거된 자리에는 쇼핑몰이 들어섰다. 그곳이 가난한 이들의 자리였다는 기억은 몇 송이 꽃일지언정, 여전히 생생히 증언되고 있다. 젠트리피케이션이 빼앗아 가는 건 단지 집이나 상가 건물이 아니다. 어찌할 수 없는 다양한 사정이 한데 묶여 일군 섬세한 생태계가 포클레인 삽질 몇 번에 끊어지고 나면 남는 건 순백의 폐허다. 아, ‘소 횡격막의 요추 측’은 내장에 붙은 토시살이었다. 어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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