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일논단] 드라마가 주는 환상, 일상을 잊거나 이겨내거나
드라마 '눈물의 여왕'의 시청률이 역대 최고기록으로 치닫고 있다.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고 있는 이 드라마는 초반에는 재벌가를 배경으로 한 로맨틱 코미디인가 싶었지만 후반에는 눈물의 순애보가 펼쳐져 시청자들을 울고 웃게 만들고 있다. 재벌가의 암투와 배신, 시한부선고를 받은 아내에 대한 사랑 등 통속적인 드라마의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지만 아름다운 배우들의 뛰어난 연기와 볼거리, 감칠맛 나는 대사 덕분에 이 드라마는 다매체, 다채널 시대에 얻기 어려운 놀라운 시청률을 보여주고 있다.
드라마는 종종 비현실적이거나 이상화된 캐릭터와 상황을 통해 시청자에게 꿈과 희망을 제공한다. 신데렐라 스토리처럼 평범하거나 열악한 환경에서 주인공은 놀라운 변화와 성공을 이룬다. 이러한 스토리텔링은 시청자에게 공감과 감정 이입을 유도해, 일시적으로나마 자신의 고단한 일상을 잊거나 현실을 초월할 수 있게 해준다. 드라마의 긍정적 효과다. 현실에서는 불가능할 것처럼 보이는 결과를 가능하게 함으로써, 시청자는 자신의 상황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믿음을 갖게 된다. 드라마 속 인물들이 겪는 시련과 극복 과정은, 시청자로 하여금 자신의 장애물도 극복하고 새로운 도전을 시도하게 하는 동기 부여가 될 수 있다.
그러나 드라마가 주는 환상에는 부정적 효과도 있다. 사극이나 대하드라마가 만들어지지 않는 이유가 협찬과 PPL이 들어오지 않아서라는 말은 단지 우스갯말이 아니다. 재벌이 등장해야 수입차나 명품브랜드가 자연스럽게 노출되기 때문이다. 재벌가의 생활양식이나 그들이 장착하고 있는 몇 천만 원 짜리 명품 의류, 장신구들이 드라마에 노출되면서 시청자들은 자연스럽게 자본주의적 욕망을 꿈꾸게 된다. 재벌가 CEO답게 홍해인이 걸친 옷들은 명품 브랜드의 런웨이라고 할 만큼 화려하다. 알렉산더 맥퀸과 샤넬의 슈트가 등장한다. 다이아몬드와 백금 소재 귀걸이, 뱀 모티프의 목걸이와 팔찌는 불가리 세르펜디 제품이다. 이들 액서세리 가격은 단품이 3250만 원에 육박한다고 한다. 해인이 킬힐을 신고 에스컬레이터에서 삐끗하자 현우가 놀라서 사다 준 운동화조차 로저비비에의 169만 원짜리 운동화다.
이런 귀금속과 장신구, 멋진 슈트 등의 가격은 월급쟁이로서는 엄두가 나지 않는 가격이다. 그러나 살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우리에게는 신용카드와 월부, 할부 같은 놀라운 제도가 있으니. 재벌의 상속녀가 될 수는 없지만 그가 장착했던 옷이나 신발은 살 수 있다. 다만 소비는 평등하되 상환능력은 평등하지 않다. 또한 일상생활에서 닥쳐오는 끝없는 도전과 문제들은 대부분 드라마처럼 간단하게 해결되지 않는다. 다행히 재벌가에 벌어지는 암투와 시한부 인생과 같은 드라마틱한 상황들은 우리 일상에서는 흔하게 일어나지 않는다.
'눈물의 여왕'의 고공행진을 보면서 공교롭게도 이 드라마의 여주인공이 등장했던 정반대의 드라마가 떠올랐다. '나의 해방일지'라는 드라마다. 두 개의 드라마에서 여주인공은 잘 웃지 않는다. 그러나 그 무표정은 결이 다르다. '눈물의 여왕'의 여주인공 홍해인은 도도함에서 나오는 무표정이라면 '나의 해방일지'의 여주인공 염미정은 너무나 평범하고 존재감 없는 일상에 지친 실존의 무표정이다. '서울을 감싸고 있는 계란 흰자같은' 경기도에서 서울로 출퇴근하는 고단한 직장인, 막차가 끊기면 비싼 택시를 타야 하기 때문에 맘 편히 회식도 참여할 수 없는 처지에, 정규직 전환을 위해 상사의 온갖 갑질을 견뎌야 하는 비정규직 등 이 드라마는 현대인의 내면의 풍경과 도처에 있는 사회적 불평등, 드라마틱한 사건이 되지 못하는 일상의 반복, 누추한 밑바닥의 감정과 생각들을 가감 없이 드러내고 사회적 관계의 피로, 사회적 우울증을 예리하게 보여준다.
우리의 삶에서 우리를 힘들게 하고 숨 막히게 하는 것들은 빌런이나 불치의 병이 아니다. 실체조차 보이지 않고 애매한 어떠한 것들. 실존, 삶의 흔적 그 자체다. 이 드라마는 해방을 언급하지만 어쩌면 삶은 조용한 투쟁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강변한다. 자신의 불행과 우울을 정면으로 마주보고 이겨나가야 하는 것이다. 드라마가 제공하는 환상적인 이야기들은 많은 매력과 가치를 지니고 있지만, 이를 현명하게 소비하고 현실과의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드라마는 우리를 꿈꾸게 하지만 그 대리만족과 위로로 일상을 이겨내야 한다. 마정미 한남대학교 정치언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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