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N:터뷰]정지혜 감독은 왜 중년 여성 피해자 '정순'을 그렸나
아줌마, 이모 혹은 엄마. '중년 여성'을 이야기할 때 나오는 단어이자, 이름이 잊힌 중년 여성의 대명사이기도 하다. 자신을 잃은 중년 여성이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가 되어 자신의 마음도, 삶도 잊히고 싶다는 생각에 빠져든다. 그러나 이 중년 여성은 피해자로 남아 있길 스스로 거부했고, 벗어나며 생존자로 거듭났다. 그리고 자신의 이름마저 되찾았다. 그렇게 중년 여성은 '정순'으로 자기 인생의 새로운 시작 앞에 발을 디딘다.
영화 '정순'은 무너진 일상에서도 결코 나다움을 잃지 않고, 곧은 걸음으로 나아가려 하는 정순(김금순)의 빛나는 내일을 응원하는 드라마다. 사회에서, 미디어에서 늘 고정관념과 틀 안에 갇혀 있던 중년 여성 그리고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에 대한 선입견을 탈피한 '정순'을 만든 건 신예 정지혜 감독이다.
첫 장편 '정순'을 통해 섬세하고 사려 깊은 연출과 이야기를 보여준 정 감독은 해외에서도 그 실력을 인정받았다. 제23회 전주국제영화제 대상, 제17회 로마국제영화제 심사위원대상 및 여우주연상 수상은 물론 스페인어권에서 가장 오랜 역사와 권위를 자랑하는 제70회 산세바스티안국제영화제 '신인 감독 경쟁' 섹션 개막작에 선정되는 등 전 세계 유수 영화제에 초청받았다. 이처럼 전 세계 평단과 관객을 사로잡은 '정순'은 과연 어떻게 시작해 우리 앞에 섰을까.
자기 이름의 틀에서 벗어나 주체성을 찾아가는 '정순'
▷ 중년 여성이자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가 주체로 거듭나는 '정순'의 시작점이 궁금하다.
학교 선배님이 같이 시나리오를 써줄 수 있겠냐고 해서 작업했는데, 소재가 디지털 성범죄와 데이트 폭력이었다. 자료 조사를 하는데, 젊은 세대 다시 말해 우리 세대 문제라고 생각했는데 가해자와 피해자 중 중년도 높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는 걸 봤다. 사회적 편견이 강했다는 생각과 함께 이런 이야기가 많이 나와야 하지 않을까 싶어서 '정순'을 만들게 됐다.
▷ 영화는 주인공 정순이 중년 여성 그리고 피해자에 대한 편견과 틀에서 벗어나 주체로 거듭나는 이야기라 생각했다. 그래서 영화의 제목도 '정순'이라고 지은 걸까?
영화의 제목을 짓기 전에 주인공을 지었다. 중년 세대 여성에게 '순하게 살아라' '착하게 살아라'는 의미로 많이 지어진 이름이 정순이다. 가정이나 사회에서 여성에게 요구됐던 것들을 되게 성실하게 이행하면서 살아온 인물이 자기 이름의 틀에서 벗어나는, 그러면서 새로운 자기 주체성을 찾아가는 이야기를 쓰고 싶다는 생각에 '정순'이란 이름을 지었다.
그 정순이라는 이름조차도 공장이나 집에서는 '엄마' '이모'로 불리면서 그 이름조차도 잃어간 현실에 관해서도 주목하고 싶었다. 그러면서 주인공이 '정순'이라는 이름이라도 먼저 찾아야겠다는 생각에 영화 제목도 정순으로 짓게 됐다.
▷ 정순은 초반에 다른 사람이 바라보는 '중년 여성'에 대한 선입견을 반영한 인물이기도 하고, 또 젊은 친구에게 "누구한테 잘 보이려고 화장을 진하게 하냐"고 말하는 등 그 세대 여성으로서 일반적인 관점을 가진 인물로 나온다. 정순을 만들어 갈 때 어떤 점을 유념했나?
일차적으로 신을 설계할 때도 정순의 다양한 요소들을 최대한 버리지 말고 드러날 수 있게끔 배치해야겠다는 생각이 컸다. 마냥 선하고 그런 사람은 없다고 생각한다. 사회나 어떤 개인적인 것들로 요구되던 것들을 성실히 따라온 인물이기도 하지만, 거기서 느꼈던 불편함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회피할 수도 있고, 거부할 수도 있을 거다. 그런 식으로 자기의 정체성을 만들어왔던 사람이라고 생각해서 그런 게 영화 안에서 살며시 잘 드러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 정순 역 배우 김금순의 연기는 정말 멋지다는 말밖에 안 나올 정도로 열연을 펼쳤다. 어떻게 캐스팅하게 됐는지, 왜 정순 역에 김금순 배우가 적역이라고 생각했는지 궁금하다.
시나리오를 쓸 때까지만 해도 지금보다 더 연령대가 높은 나이대로 생각하며 썼다. 그런데 PD님이 내가 나이를 따로 말씀드리지 않았는데, 시나리오를 본 후 바로 김금순 배우를 떠올렸다고 했다. '돌아오는 길엔'(감독 강동완)에서 감탄하며 봤던 기억이 있어서 김금순 배우의 다른 필모그래피도 보기 시작했다. 스펙트럼이 엄청 넓은 배우다. 영화는 정순이 처음부터 끝까지 엄청 다양한 변주를 겪으면서 이끌어 가야 하기에 김금순 배우가 해줄 수 않을까 생각해서 시나리오를 드렸다. 다행히 너무 좋게 봐주셔서 함께 하게 됐다.
'정순'에 이입해 따라가며 만나는 위로와 응원
▷ 정순이 집에 있는 거울, 유리 등 자기 모습이 비칠 수 있는 모든 것을 가려놓는 장면은 현실의 피해자들이 오히려 고개 숙이고 얼굴을 감추고 살아야 하는 모습까지 겹치며 더 아프게 다가온 것 같다. 해당 장면은 어떻게 구상했고, 또 어떻게 촬영해 나갔나?
피해 사실을 알게 된 이후 정순을 그릴 때는 최대한 정순에 이입해서 '내가 정순의 상황이라면 어떻게 할까?'라는 것들을 많이 고민해서 넣었다. 정순이 휴대전화를 통해 사적 영상이 어떤 형태로 유포됐는지 확인하는 장면이 있다 보니 자기혐오에 빠지는 시간이 정순에게 찾아올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그런 것들을 영화로 어떻게 표현할까 했을 때 거울이라든가 비치는 물건, 유진과 찍었던 사진들을 가려놓는 것으로 표현해야겠다고 생각했다.
▷ 오랜만에 부엌에 선 정순과 유진의 대화 신도 인상적이었다. 정순의 사건 처리를 도왔던 유진이 엄마에게 가만히 있으라고, 내가 다 알아서 한다고 하자 정순이 왜 네가 하란 대로 하냐고, 왜 가만히 있냐며 오열하는 장면이다. 모녀 갈등, 세대 차이, 주체와 객체 등 여러 의미에서 정순이 '정순'으로서 서는 데 분기점이 되는 듯했다.
촬영 감독님과 그 신을 준비하면서 계획을 세웠던 것은 최대한 배우들의 동선을 끊지 말자는 것이었다. 그래서 핸드헬드로 유진과 정순 각각 한 컷씩 촬영을 진행하기로 했다. 사실 시나리오 리딩 날이나 리허설 때부터 금순 배우와 선아 배우가 정순과 유진의 장면을 굉장히 잘 만들어줘서 믿음이 있었다. 현장에서는 최대한 두 배우가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서 카메라도 최대한 방해되지 않는 움직임으로 잘 담아내기만 하자고 생각했다.
그 신은 정순이 사건 이후 처음으로 자기의 감정 등을 드러내는 신이기도 하다. 또 서로를 이해하는 마음은 같지만, 표현이 달라 부딪히는 게 크게 폭발하는 장면이었다. 대사 첫 줄부터 끝줄까지 두 사람의 감정이 서서히 쌓이고, 폭발하는 감정을 어떻게 표현할지 이야기를 많이 나눴다. 주저앉으면서 "엄마"하고 우는 건 김금순 배우의 아이디어였다. 딸과 마찰을 겪고 있는 순간 정순에게도 엄마가 필요하지 않겠냐는 아이디어를 줬다.
▷ 정순의 감정을 따라가는 데 조금 더 몰입할 수 있었던 데에는 사건이 본격적으로 발생하면서부터 정순의 불안한 감정에 따라 함께 흔들리는 카메라에 있었던 거 같다. 카메라는 마치 정순의 내면이 불안과 배신 등 여러 감정으로 요동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정순이 영수가 공장 퇴근길에 자신을 피하는 걸 보면서부터 카메라가 흔들리기 시작한다. 촬영 감독님과 이야기한 게, 처음에는 최대한 정순이 어떤 삶을 살아왔고 어떤 일상을 보내고 있는지는 담담하게 지켜보는 입장에서 카메라가 위치하자고 논의했다. 정순이 그 사실을 인지한 이후부터는 카메라가 정순과 가깝게 다가가서 핸드헬드로 잡았다. 관객이 정순을 따라서 그 과정을 체험할 수 있게끔 카메라가 움직였으면 좋겠다는 마음이었다.
▷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게 영화에 나오는 "세상에서 잊혀 지나가느냐. 모두 지나가. 모두 지나가. 좋은 사람으로 남길 바라오"라는 가사의 노래다. 처음에는 세월의 무상함을 노래하는 것처럼 들렸는데,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정순이 앞으로 나아가겠다는 선언이자 응원처럼 들리기도 했다.
나와 고등학교 동창이기도 하고, 단편 영화 때부터 계속 작업을 이어 온 황현태 음악감독이 만들어준 노래다. 1980년대 트로트 풍이 가미된 발라드곡이면 좋겠고, 시나리오를 보고 나서 정순이 부를 수 있는 노래의 가사로 만들어 달라고 했다. 음악감독이 정순에게 응원이 되고 위로가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만들었다며 보내 줬다.
난 가사가 사랑에 대입해도 되고, 사건에 대입할 수도 있고, 세월에 대입할 수도 있는 등 듣는 사람이 되게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다는 것도 좋았다. 그런 부분이 정순이 영화에서 노래를 부를 때마다 다른 감정으로 부를 수 있겠다는 생각에 진행하게 됐다. 내가 음악에 관해 잘 몰라 그렇게 두루뭉술하게 이야기해도 잘 해석해서 만들어줘서 고마웠다.
<하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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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BS노컷뉴스 최영주 기자 zoo719@c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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