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혁명, 시민 힘으로 이승만 독재 무너뜨린 ‘제2의 해방’ [왜냐면]

한겨레 2024. 4. 22. 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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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4·19혁명을 촉발시킨 고등학생들의 시위 장면. 한겨레 자료사진

‘이승만과 4·19혁명’ 연속 기고 ②

장숙경 | 현대한국사 연구자

올해는 4월혁명 64주년이 되는 해다. 4월혁명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최초로 주권재민과 자유에 대한 한국인의 강한 의지가 확연히 드러난 사건이었다. 참혹한 전쟁이 끝난 지 불과 7년, 경제적 최빈국에서 빵이 아닌 자유와 민주를 요구하는 항쟁이 일어났고, 그것이 독재정권의 몰락으로까지 이어졌다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다. 이를 신호탄으로 한국의 민주화운동은 반세기가 훌쩍 넘도록 지속하고 있고, 작금의 상황을 볼 때 그 정신과 의미는 더 강한 힘과 의지를 가지게 한다.

4월혁명의 첫 시작은 2·28 대구학생시위였다. 당시 시위 주도 학생들은 “학원의 자유를 보장하라. 정치적 의도는 없다”고 했지만, 3·15 정·부통령선거를 부정선거로 치르기로 작정한 자유당과 정부의 지나친 공세, 부당하고 비민주적인 압력에 대한 최초의 저항이었다. 이어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3·1절 기념행사에서 ‘공정한 투표로써 민주주의를 지켜야 한다’는 삐라(전단)가 뿌려졌고, 선거일을 하루 앞둔 3월14일엔 서울의 10여개 고등학교 학생들이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는 삐라를 뿌리며 시위하였다.

마침내 3월15일, 이승만을 종신 대통령으로, 이기붕을 부통령으로 만들어 권력을 독점하겠다는 의도를 가진, 대대적이고 노골적인 부정선거가 전국에서 시행되었다. 몇몇 도시에서 선거 무효 선언과 시위가 있었고, 경남 마산에서는 오전 10시 반에 선거 포기선언이 나온 이후 경찰의 실탄에 12명이 사망하고 72명이 부상당하는 유혈사태가 발생했다. 마산에서의 발포에 대한 기자의 질문에 “총은 쏘(쓰)라고 준 것”이라고 한 이기붕의 발언은 공분을 자아냈지만, 정부는 재빠르게 “공산당 지하조직에 의한 폭동”으로 사태를 무마시켰고, 부상자와 사망자의 가족들조차 빨갱이로 몰릴 것이 두려워 병원에도 가지 못하고 숨어서 지내야 했다. 그러나 4월11일, 3·15 시위에서 실종된 김주열의 처참한 유해가 거짓말처럼 마산 바다 위에 떠오르자 마산은 또 한번 폭발하였다.김주열 또래의 학생들과 모든 세대의 시민들이 뛰쳐나와 “살인선거 물리치자” “학살경관 처단하라” “이기붕 죽여라” 등 분노에 찬 구호를 외쳐댔다. 이후 부산·청주·대전 등에서도 연달아 시위가 일어났다.

남쪽에서 시작한 항쟁은 서울에 와서 비로소 혁명으로 완성되었다. 4월19일 아침 조간신문 1면에는 바로 전날시위에 나선 고려대생들이 정치 깡패들에게 처참하게 습격당한 모습이 실렸다. 이에 분노한 대학생들과 중·고교생들이 교문 밖으로 몰려나왔고, 기다렸다는 듯이 시민들의 호응이 이어졌다. 삽시간에 대규모의 학생들과 합세하는 시민들로 서울 도심이 가득 찼다. 학생들은 경찰의 저지에도 불구하고 트럭과 지프차를 타고 카빈총으로 무장한 헌병의 바리케이드를 뚫고 경무대 인근까지 근접했고, 이에 위협을 느낀 경찰은 오후 1시30분께 시위대를 향한일제 사격을 시작으로 무차별 난사를 하였다. ‘피의 화요일’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숨어있던 시위대원들이 개처럼 끌려 나와 구타를 당했고, 오후 2시께 종로구 옥인동과 통의동 일대 병원들은 총상을 입은 중상자로 가득 찼다. 다급해진 시위대가 경찰차에 부상자를 태우면 경찰들은 몸을 가누지도 못하는 학생들을 땅바닥에 내던졌다. 경무대 입구는 피바다가 되었고, 백색 가운을 입은 채 시위에 나섰던 의대생들이 부상자를 돌보고, 목숨이 위태로운 학생들을 병원으로 실어 보냈다. 시위대를 향해 소방펌프에서 물이 퍼부어지자 흥분한 시위대는 소방차를 탈취하고 피 묻은 태극기와 웃저고리를 벗어 흔들면서 만세를 불렀다. 시위대 후미에 있던 학생들이 서울시경 무기고(현 정부종합청사 자리)를 탈취하려 하자 이들에게도 실탄이 발사되었다.

삼엄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시위에 호응하는 군중은 더 많이 모여들었다. 종로·을지로·태평로 일대는 완전히 시위의 물결에 파묻혔고, 경찰도 방관 상태가 되었다. 오후 3시께, 이승만을 비호하는 정치 깡패들이 사용하던 반공회관과 어용 신문사인 서울신문사가 불타올랐다. 시위대 일부는 서대문 이기붕의 집과 자유당 거물 한희석의 집을 습격했다. 시내 도처에서 무차별 소탕 사격으로 사상자가 속출했다. 같은 날 부산, 광주, 대구, 인천, 청주에서도 시위가 발생하였다. 정부는 19일 오후 서울, 부산, 대구, 광주, 대전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각급 학교에 휴교령을 내렸다. 이날 하루 사망자는 186명, 부상자는 6026명으로 집계되었다.

학생들과 시민들의 피가 거리를 적시고, 이들의 아우성이 천지를 뒤흔드는 상황에서도 이승만은 이를 불만을 품은 일부 불순분자들의 난동과 정치 깡패들의 과민 대응으로 치부했다. 또한 모든 책임을 자유당과 이기붕에게 전가하고, 자신은 여전히 국민의 지도자로 남겠다는 강한 의지를 보여주었다.

계엄령으로 인해 주춤하던 시위는 4월25일 교수들의 시위로 다시 점화되었다. 교수단의 시위는 온건적이었지만, 시민들의 반응은 더욱 열렬했다. 교수들이 해산한 뒤에도 시민과 학생들은 통금 사이렌을 무시하고 시위를 계속했고, 일부는 철야농성을 하였다. 26일 새벽 통금이 해제되자 학생과 시민들은 다시 광화문으로 모여들었다. “이승만 타도하자” “경무대로 가자”는 구호가 거리를 가득 채웠고, 이승만의 하야가 발표되기도 전인 오전 9시45분께, 탑골공원에서는 철옹성과도 같았던 이승만의 동상 목에 굵은 철삿줄이 걸려 끌어내려 졌다.

부패한 독재정권을 타도했다는 점에서 4월혁명은 성공이었다. 불가침의 영역인 줄로만 알았던 정치권력이 시민의 힘으로무너질 수 있다는 것을 목격한 제2의 해방이었다. 그러나 4월혁명 이후 전개된 상황은, 역사는 언제든 되풀이될 수 있다는 위기의식과, 민주주의는 시민 모두가 책임감·사명감·의식을 가지고 부단히 깨어있어야만유지할 수 있는 귀한 가치라는 것에 대한 지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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