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과 행위, 자력과 타력이 합해야 구원된다

한겨레 2024. 4. 22. 15:35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픽사베이

*문장 한 줄 옮겨 베끼다가 이거 명문이구나 싶어 메모라도 해둬야지 생각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메모지에 메모하고 오줌까지 눴는데 막상 잠에서 깨어나 보니 메모는커녕 메모지도 없다. 꿈에서 꿈으로 깨어나 꿈속에서 메모도 하고 오줌도 누고 그랬던 모양이다. 재미있다. 네 현실이 한바탕 꿈인 것을 생각으로만이 아니라 삶으로도 확인해보라는 신호인가? 그러니 머물 곳도 갈 곳도 실은 없는 거다. 모든 곳이 여기요 모든 때가 지금이기에! 하지만 꿈이든 현실이든 거기에서 겪는 일들 속에는 뭔지 몰라도 소중한 뭐가 있을 것이다. 생명으로 피어나는 사랑? 그런 거라고 임시로 생각해두자.

너는 그게 보이지 않아서 그걸 못 보았다. 그게 네 탓이냐?

나는 그게 보여서 그걸 보았다. 그게 내 공이냐?

점심 먹고 오랜만에 디아코니아 모원 뒷산을 천천히 걷는다. 발에 밟히는 것들마다 눈에 들어오는 것들마다 그냥 고마울 따름이다. 종일 침묵.

*아직도 원고 마감에 쫓기는 건가? 동시에 두 곳에서 청탁을 받았는데 한 곳을 까맣게 잊고 있다가 다른 한 곳에 원고를 보내고 나서야 그 사실을 알고 앞의 원고를 경어체로 말투만 바꾸어 그대로 보낸다. 이랬다가 무슨 봉변을 당할지 염려되지 않는 건 아니지만 짧은 시간에 다른 글을 쓴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니 차라리 봉변당하고 마는 게 낫지 싶어 그냥 보내기로 한다. 이쯤에서 꿈을 깨었기에 원고를 보냈는지 보내지 않았는지 그건 잘 모르겠다. …누가 묻는다, 어쩔래? 계속 시간에 쫓기며 살래? 아니면 잘못을 저지르고 봉변을 당할래? 망설임 없이 답한다, 무엇을 잘못해서 봉변을 당하더라도 시간에 쫓기며 살지는 않겠다. 흠, 시간에 쫒기지 않으면 잘못할 일도 별반 없긴 할 게다. ㅎㅎㅎ

새벽 짧은 꿈. 말레이시아 무슨 섬나라 같은데 두 족장이 물속에서 단판 승부를 결정짓는다. 독수리 형상을 한 족장이 자기 목에 칼을 그어 붉은 피로 물을 적시자 거의 동시에 멧돼지 형상을 한 다른 족장이 두 팔 번쩍 들어 항복한다. 둘이 이를 드러내고 크게 웃으며 부둥켜안는다. …모든 생명체의 몸에 흐르는 피가 예외 없이 붉다는 소름 돋도록 확고부동한 진실을 사람들이 온몸으로 깨칠 때, 그래서 남의 피 아닌 자기 피를 먼저 뿌릴 수 있을 때, 그때 누구도 허물지 못할 평화가 마침내 이 땅을 덮으리라는 얘기?

*몇 안 되는 사람들이 예배를 드린다. 저마다 하늘이 주신 선물을 어떻게 받아서 어떻게 썼는지 하느님께 말씀드린다. 박장로가 말한다. 하느님, 저에게 주신 성품을 제대로 살리지 못했습니다. 용서해주십시오. 무엇을 어떻게 했기에 그런 말을 하는 거냐? 본디 저에게 주신 성품은 잘난 척하지 않고 못난 척도 하지 않고 그냥 저 생긴 대로 사는 성품이었는데 그러지를 못하고 여기서는 잘난 척 저기서는 못난 척 그러면서 살았습니다. 네가 왜 그랬다고 생각하느냐? 본디 저에게 주신 성품은 저를 다른 누구에 견주지 않고 그냥 저 생긴 대로 사는 성품이었는데 그러지를 못하고 저를 이 사람에 견주고 저 사람에 견주고 그러다 보니 그랬던 것 같습니다. 지난날은 그랬다 치고 앞으로도 그러겠느냐? 아닙니다. 앞으로는 저를 누구하고도 견주지 않고 천둥벌거숭이 아이처럼 그렇게 살겠습니다. 잘 생각했다. 부디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 다음 사람? …이어서 몇이 감동적인 고백을 한 것 같은데 아쉽게도 기억에서 사라졌다. 꿈이지만 괜찮은 방식으로 예배를 드린 것 같다.

픽사베이

*무슨 자격시험장이란다. 썰렁한 강당에 사람들이 앉아있다. 모르는 얼굴들이다. 성경 말씀 한 줄 읽고 그 뜻을 자기한테 결부시켜 요약하는 게 자격시험의 전부다. 누가 큰소리로 “너희는 근심하지 마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는 예수의 말씀을 외친다. 순간, “그랬으면 됐지, 자격은 무슨 자격이냐?” 더 크게 외치다가 꿈에서 나온다. 나오면서 생각한다. 가만, 예수가 이겼다는 ‘세상’이 무엇을 말하는가? 세상의 집권자? 빌라도? 바리사이파? 헤롯왕? 서기관? 제사장? 무엇이 그가 이겼다는 세상인가? 이겼다는 말은 싸웠다는 말인데 그가 누구를 상대로 싸웠단 말인가? 노자(老子)가 저만큼에서 빙그레 웃는 것 같다. “그래서 내 일찍이 말하기를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게 가장 잘 이기는 거라고 하지 않더냐?” 아무리 생각해도 이 사악한 세상을, 그런 게 있다 치고, 이기는 길은 예수처럼 간디처럼 마틴 루서 킹처럼 비협력 비폭력으로 살다가 죽어서 다시 사는 길밖에 없지 싶다.

*앞뒤 콘텍스트는 모르겠고 같은 찬송을 목청껏 부르다가 꿈에서 나온다. “믿으면 하겠네. 구주 예수만 믿어 하신 일을 본받고 주께 가기만 하면 영원 삶을 얻네. 십자가에 달려서 예수 구원하셨네. 나를 구원하실 이 예수밖에 없네.” 어려서 아무것도 모르고 선생님 따라 목청껏 부르던 노래였기에 제가 지금 뭐하고 있는지 모르는 꿈에서 여전히 목청껏 불렀던 걸까? “오직 믿음으로”라는 구호 아래 삶은 뒷전에 밀쳐두고 ‘사도신경’을 외는 것으로 만족하는(?) 일그러진 기독교 행태에 외면하고 산 지 오래되었다. 그런데 이 꿈은 뭔가?’ 자리에 앉아 생각한다. 누가 속삭인다, 길게 생각할 것 없다. 믿음만으로도 안 되지만 행위만으로도 안 된다는 것, 자명한 사실 아닌가? 이 노랫말을 잘 보아라. 믿음 곧 행위여야 한다는 그래서 이른바 자력과 타력이 손을 잡아야 ‘구원’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이보다 간결하게 노래할 수 있겠느냐? 다른 누가 대꾸한다. 옳은 말씀. 아무가 예수를 믿는다는 건 그 행실을 본받아 또 하나의 닮은꼴 예수로 자기 현실을 사는 것이다. 이론이 있을 수 없는 진실이다. …음, 맞아. 예수 십자가에 달려서, 그 몸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어서, 그래서 죽은 영혼을 구원하셨지. 아멘. 고마운 꿈이다. 단, 노래 끝에 나오는 “예수밖에 없네.”는 지금 예수를 따르겠다는 사람들끼리 하는 말이다. 이 말을 예수가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한테까지 적용하는 건 무지의 억지다.

글 이현주 목사

***이 시리즈는 전남 순천 사랑어린학교 촌장 김민해 목사가 발간하는 ‘월간 풍경소리’와 함께 합니다.

Copyright © 한겨레.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크롤링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