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따뜻해” 착각한 사과들, 반짝 추위 피해 이사 가도 울상

한겨레 2024. 4. 22. 1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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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종영의 엉망진창 행성 조사반―⑮ ‘사과와 과일들의 대규모 이주’ 사건 2
강원도 양구군 해안면 과수원에 붉게 물든 사과가 주렁주렁 매달렸다. 박종식 한겨레 기자
엉망진창 행성 조사반에 제보가 들어왔어요. 올봄 사과값이 너무 오른 이유를 밝혀달라는 거였어요. 심지어 사과를 입도선매하여 시장 가격에 개입하는 불순한 세력도 있다며 조사해달라고 했죠. 성이 난 제보자가 말했어요. “심지어 사과를 개한테 간식으로 준다고 합니다. 이렇게 과일값이 비싼데!”(☞14회에서 이어짐)

엉망진창 행성 조사반은 사과를 재배한 지 100년이 됐다는 충남 예산의 사과 농장으로 갔어요. 1923년 일본인에 의해 경제작물로 사과가 도입된 것이 ‘예산 사과’의 기원이죠. 사과 하면 예산, 예산 하면 사과! 옛날에는 대구 사과, 충주 사과와 함께 한국 사과의 삼위일체를 이뤘죠. 기후변화로 빛이 바랬지만.

한밤중인데도 농민 한 분이 온도계를 들고 과수원을 지키고 있었어요.

“아니, 이 밤중에 왜 온도계를 들고 계시나요?”

“아들 녀석 감기 걸렸을 적에 내가 온도계를 들고 밤을 새울 줄 알았겠나요? 다 사과 때문이죠.”

“하얀 사과꽃이 소복하니 예쁘네요.”

“사과꽃만 피면 우리는 겁나서 하루 종일 일기예보와 사과꽃만 쳐다보고 있어요. 보자 하니, 기후변화 물어보려고 온 모양인데, ‘사과 재배지 북상’ 같은 거 몰라요. 사과 농민한테 최대 관심사는 그저 불청객처럼 찾아오는 봄을 어떻게 헤쳐 나갈지 그것뿐이라오.”

사과는 온대지방에서 자라는 과일나무입니다. 추운 겨울을 나기 위해 휴면 상태로 지내다가 꽃눈이 발아해 개화에 이르게 됩니다. 문제는 이른 봄입니다. 3월에 너무 따뜻해지면, 사과나무가 착각해 꽃을 일찍 피워요.

그런데, 그럴수록 꽃샘추위는 엄혹하기 마련이죠. 이미 봄이 온 줄 알고 일찍 핀 꽃은 사나흘 반짝 추위에 얼어 죽고 말아요. 암술과 수술이 수정이 돼야 ‘사과’라는 열매가 열리는데, 수정이 될 기회를 빼앗기는 거죠. 사과 농부가 말했습니다.

“원래 사과꽃이 다섯 개가 피는데요. 옛날에는 신경 쓰지 않아도 다섯 개 모두 수정이 되었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아요. 수정되어도 암술과 수술이 만나지 않는 상태에서 수정이 되기도 합니다만, 그렇게 나온 열매는 5월말~6월초가 되면 열매가 바닥에 떨어져 버려요.”

꽃피는 시기가 빨라지고 있었어요. 한국의 배, 왕벚나무, 개나리, 복숭아, 진달래, 등을 포함한 7종을 분석한 결과, 평균 1도 상승할 때마다 개화 시기는 4.1일 빨라진다는 연구 결과가 있어요.

기후에 맞춰 이사가라고요?

사과는 과일나무 중에서 기후변화에 가장 민감합니다. 이른 봄에 취약하고, 고온다습한 여름에도 젬병이죠.

여름이 덥고 습할수록 병충해가 창궐합니다. 대표적인 게 탄저병에요. 작은 반점이 사과에 나타나면 주변 나무까지도 이 병이 번졌을 가능성이 커서, 과수원에는 비상이 걸려요. 탄저병은 기후위기 시대 사과 생산량을 떨어뜨리는 최대의 골칫거리입니다. 옛날에는 태풍 한 번 세게 오고 보름 정도의 장마가 끝나면 뜨거운 여름과 청명한 가을이 이어졌는데, 요즈음에는 여름 내내 비가 찔끔찔끔 계속 내리면서 신종 ‘가을장마’가 계속되잖아요.

마지막으로 사과 열매가 잘 열리려면 가을에 일교차가 커야 합니다. 이때 안토시아닌 색소의 영향으로 사과가 빨간색으로 익고 열매도 달콤해져요. 그런데, 9월에 열대야가 일어나면 어떻게 될까요? 사과나무가 저녁에도 활동해야 하는 줄 알고 잠을 안 자서 착색이 안 되고 열매도 실하지 않죠.

빨리 찾아오는 봄, 고온다습한 여름, 초가을 무더위까지 사과는 세 개의 장애물을 뛰어넘어야 해요. 국립기상과학원이 2018년 펴낸 ‘한반도 100년 기후변화 보고서’를 보면, 1912~1941년에 봄은 3월18일에 시작했는데, 1998~2017년에는 3월5일로 보름 가까이 빨라져요. 반면, 가을은 9월17일에서 9월26일로 늦춰졌고요. 그러니, 사과 열매가 제대로 열릴 리 없죠.

예산, 대구, 충주로 유명하던 사과의 산지는 강원도로 북상했어요. 강원도 양구의 시래기 사과는 2021년과 2022년 대한민국 대표 과일 선발대회에서 최우수상을 받았습니다.

언론에서는 강원도 사과 재배 면적이 두 배 이상 늘었다면서 사과의 북상을 연일 다루고 있어요. 경북 의성에서 25년째 사과 농사를 짓던 사람은 강원도에 터를 잡았지요. 고랭지 배추를 하던 농민은 사과 과수원을 차렸고, 강원 임계면에서 사과를 재배하는 농민의 3분의 2는 남쪽에서 왔고…

맞아요. 2023년 9월 농촌진흥청에 따르면, 강원도 사과 재배 면적은 30년 전(483ha)보다 247.6% 증가한 1679ha로 3.5배 늘었습니다. 고원·산간 지대를 중심으로 경남과 전북의 재배 면적도 2배 이상 늘어났죠. 하지만, 여전히 강원도 사과 재배 면적은 경북(2만151ha)의 10분의 1 수준이라는 점에서 절대적으로 크진 않아요.

사과도 이 사실을 모를 리 없죠. 농부 옆에 있던 예산 사과가 말했습니다.

“우리 사과에게 현재는 전쟁에 준하는 시기입니다. 오락가락한 날씨에 역병이 들끓으니 북쪽으로 피난을 가려고 합니다. 기후에 맞춰 이사 가면 되는 거 아니냐고요? 천만의 말씀! 새로 심은 사과나무는 제대로 된 열매를 맺을 때까지는 4년 이상을 기다려야 해요. 아무 데나 가서 집 짓고 사는 인간과 다르단 말입니다.”

소수의 품종으로 이익 극대화하는 길

사정은 외국도 마찬가지입니다. 과학자들은 기후변화에 강한 사과 품종을 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어요. 뉴질랜드에 본사를 둔 벤처프루트(VentureFruit)는 더운 기후에서도 건강한 열매를 맺는 최초의 브랜드 사과 ‘투티’(Tutti)를 선보였지요. 투티는 스페인의 40도 넘는 낮, 따뜻한 밤을 견디기 위해 개발됐다고 해요. 예산 사과가 말했어요.

“영국의 왕립원예협회(RHS)의 정원에 있는 사과나무를 찾아가 보시오. 상품을 만들기 위해 획일화되지 않은 고대의 천연 유전자를 가진 사과나무가 거기에 있소.”

왕립원예협회 정원은 영국 남서부 엑시터에서 50㎞ 떨어진 로즈무어(Rosemoor)에 있었어요. 마침 사과나무는 하얀 꽃을 피우고 있었죠.

“그러잖아도 브리스틀대학교 과학자들이 내 유전자를 가져갔소. 기후변화에 강한 품종을 개발하기 위해 영국 전역에서 사과나무 유전자를 채취한다나?”

서울 가락동농수산물시장에서 사과 등 과일 경매가 진행되고 있다. 연합뉴스

사과나무가 기후변화에 약해진 이유는 재배종이 상업적 품종으로 집중되면서 유전자 다양성이 떨어진 이유도 있습니다. 1900년 이후 영국의 소규모 과수원 80%가 사라졌다고 해요. 그만큼 소수 품종도 사라졌을 가능성이 크죠. 왓슨 요원이 한숨을 쉬었습니다.

“이러다간 우리 사과를 못 먹는 거 아닙니까?”

홈스 반장이 사과나무를 바라봤습니다.

“다른 나라에서도 냉해는 사과의 최고 문제야. 1974년에서 2014년까지 스위스 데이터를 이용해 분석한 연구를 보니, 봄철 냉해가 노출 시간당 최대 2.05%의 수익 감소를 일으킨다는 추정이 있더군. 적지 않은 금액이야. 기후변화로 작은 과수원들은 점차 경쟁력을 잃게 될 테고, 정부는 국제 무역을 통해 문제를 풀려고 하겠지. 결국 소수의 품종으로 이익을 극대화하는 전략을 취하는 기업만 살아남을 수도 있어. 마치 바나나 산업처럼 말이야. 기후변화가 가둔 악순환에 빠져버리는 거지.”

며칠 뒤, 예산에서 안타까운 소식이 들렸습니다. 기후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사과 재배 농가를 대상으로 블랙사파이어(길쭉한 모양의 씨 없는 포도)와 체리 등 아열대 과수로 재배종을 전환하겠다고 예산군이 선언한 거죠. 우리는 사과한테 사과해야 하지 않을까요?

*본문의 과학적 사실은 실제 논문과 보고서를 인용했습니다.

남종영의 엉망진창 행성 조사반

남종영 환경저널리스트·기후변화와동물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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