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봄엔 동네 꽃집을 구독하세요

칼럼니스트 최은경 2024. 4. 22. 0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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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한번 해봤어] 저렴한 가격에 기분 좋은 말은 덤
20일부터 시작되는 군포 철쪽축제 현장. 19일 오후 촬영. ⓒ최은경

길가에 널린 게 꽃이다. 진달래를 시작으로 벚꽃이 진 지금 우리 동네에는 철쭉이 기지개를 켜고 있다. 올해 철쭉축제는 볼 만하겠다. 이번 봄 벚꽃 없이 축제 기간을 보낸 곳도 있다는데 다행히 철쭉 없는 축제는 아닐 것 같다. 

특별한 일이 없는 주말이면 남편과 나는 점심을 대강 챙겨 먹고 오후에는 산책을 나선다. 사실 나는 아침 산책을 가고 싶은데 남편은 주말 늦잠을 포기할 수 없다. 그래서 자연스레 오후 산책이 되어 버렸다.

나가면 주로 뒷산(수리산입니다)을 걷고 내려오면서 근처 카페에서 커피를 마신다. 동네 카페 몇 군데를 정해 놓고 돈다. 요즘 자 가는 카페는 중년의 남자분이 하는 가게인데 라테 맛이 좋다. 누군가 우리 동네에 놀러 오면 데려가고 싶은 집이다.

지난 주말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사서 평지를 걸었다. 남편은 군대 시절 헌병을 했다는데 그래서인지 산에 오르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그때 오래 서 있어서 무릎이 아프다나. 수리산은 산이랄 것도 없는 평지인데... 여하튼 그래서 이날은 남편이 즐겨찾는 둘레길을 걷기로 했다. 내가 사는 곳은 산은 집 뒤에, 둘레길은 집 앞에 있다.

4.1km의 둘레길. 벚꽃 날리는 길을 걷자니 참 좋은데 그날따라 어찌나 한여름 같은 봄날이던지. 모자를 챙겨 오지 않은 것을 후회하면서 조금이라도 빨리 벗어나고 싶은 마음에 걸음을 재촉하면서도 번번이 자연에 시선을 빼앗기고야 만다.

큰 나무는 큰 나무대로 푸르고, 이제 막 잎은 틔운 잎들도 연두연두하고, 개나리도 튤립도 아닌 이름 모를 노란 꽃은 짙을 대로 짙어졌다. 소나무 사이로 자란 벚나무는 꽃잎을 떨구기 바쁘고 가지에서 떨어진 꽃잎들은 눈꽃처럼 희고 곱다. 초속 5cm인지 확인할 길 없이 떨어지는 벚꽃을 카메라에 담노라면 영화 속 한 장면 같다. 그 영화 속에 내가 있는 것 같은 기분마저 드는 시간.

둘레길 끝에서 내가 말했다. "시험공부 중인 큰애 아샷추(아이스티에 에스프레소 샷 추가의 줄임말) 사기 전에 꽃집에서 꽃부터 사자." 남편 입장에서는 갑작스러운 일이었겠지만 나는 아니다. 며칠 전부터 집에서 꽃을 보고 싶었다. 겨울에도 한번은 집에 꽃을 두고 싶어서 온라인으로 주문했는데 갑자기 추워진 날씨에 꽃이 얼어왔다. 다시 보내주겠다고 했는데 감감무소식.

기분이 좋지 않았다. 꽃 상태도 그랬지만 꽃이 예민한 상품인 만큼 과하게 포장이 되어 왔기 때문이다. 꽃을 굳이 이렇게 온라인으로 구입할 필요가 있을까 싶어서 다음에 또 꽃을 구입할 때는 동네 꽃집에서 사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아이들 졸업식마다 들렀던 꽃집이 있는데 갈 때마다 사장님이 기분 좋게 해 주신 것도 생각났고. 따져보니 꽃집을 하신 지 4년 정도 되었는데 가게도 늘고, 초록이들도 늘고, 손님도 느는 것이 눈으로 보였다.

온라인 꽃 구독보다 나은 동네 꽃집에서 꽃 사기. ⓒ최은경

가게에 가니 원래 꽃 사는 날이 아닌데 마침 그날 새벽시장에서 꽃을 사 오셨다는 사장님. 집에서 꽂을 거라고 하니 "만원 어치 줄까요?" 하시기에 "만 오천 원어치 주세요" 했다. "집에서 꽂을 거면 그래도 좀 오래 볼 수 있는 녀석들로 알아서 다발로 만들어 주겠다"라고 하셨다. 원래는 비싼 아이인데 오늘 싸게 들여왔다고 미니장미를 풍성하게 넣으시고 나리꽃 비슷하게 생긴 알스트로메리아도 한 줄기, 버터플라이 라넌큘러스도 주셨다.

계산을 하려는데 남편이 지갑을 열어 갑자기 선물을 받은 상황. 본의 아니게 사장님에게 "좋은 남편"이라는 소릴 들은 남편. "제가 손이 조금 빨랐네요"라는 남편의 유머에 모두 한판 크게 웃었다. 나는 사실 신문지 같은데 둘둘 말아 들고 가는 꽃도 나름대로 멋있어 보였는데 센스 있는 사장님이 레터링포장종이로 둘둘 말아 세상 심플한 꽃다발을 건네주셨다. 

받자마자 "이거다" 싶었다. 온라인 꽃 구독보다 동네 꽃집 구독이 훨씬 더 좋겠다 싶을 만큼. 가끔 지역 카페에서 꽃시장 가서 꽃을 싸게 샀다는 글들을 보곤 했는데 거기까지 가는 시간과 비용을 따지면 꼭 그렇게 싼 것 같지도 않다. 오랜만에 다양하고 풍성한 꽃을 보니 아이들도 기분이 좋은가 보다. 둘째 아이는 맘에 드는 꽃을 빼서 제 방에 두겠단다. 집 밖도 집 안도 온통 꽃 세상. 이 꽃이 지면 남편과의 산책 길에 느닷없이 또 꽃을 사러 가야지. "좋은 남편"이라는 말, 그 기분 좋은 말 함께 듣고 또 웃어야지. 작고 소박한 이 꽃집이 부디 오래오래 유지되었으면. 

*칼럼니스트 최은경은 편집기자로 일하며 두 딸을 키우는 직장맘입니다.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성교육 대화집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일과 사는이야기를 담은 에세이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을 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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