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어리진 한…그 말할 수 없었던 이야기 '제주 4·3'

송광호 2024. 4. 22.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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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건을 작품으로 묘사하거나 그리는 데에는 시간이 필요하다.

특히 그 사건이 끔찍할수록, 그래서 사건으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려면, 세월의 힘에 의지해야 하는 경우가 있다.

제주 4·3사건도 그런 경우다.

최근 출간된 '돌들이 말할 때까지'는 오랫동안 거리를 둬왔던 사건에 바짝 다가갔다는 점에서 이들 작품보다 좀 더 직접적으로 4·3 사건을 묘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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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 '돌들이 말할 때까지'
1948년 5월10일 실시된 단독선거를 피하기 위해 마을 근처 야산으로 피신한 주민들. [제주4.3연구소 제공. 재판매 및 DB금지]

(서울=연합뉴스) 송광호 기자 = 어떤 사건을 작품으로 묘사하거나 그리는 데에는 시간이 필요하다. 특히 그 사건이 끔찍할수록, 그래서 사건으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려면, 세월의 힘에 의지해야 하는 경우가 있다. 제주 4·3사건도 그런 경우다. 사건을 다룬 첫 소설(순이 삼촌·현기영)이 나오기까지는 30년이 필요했고, 4·3을 소재로 한 영화(지슬·오멸)가 해외 유명 영화제에서 심사위원대상(선댄스영화제)을 받기까지는 60여년이 필요했으며, 당대에 저질러진 폭력의 상흔을 지긋이 바라보기(작별하지 않는다·한강)까지는 70여년이 필요했다.

최근 출간된 '돌들이 말할 때까지'는 오랫동안 거리를 둬왔던 사건에 바짝 다가갔다는 점에서 이들 작품보다 좀 더 직접적으로 4·3 사건을 묘사한다. 책은 4·3 사건으로 억울하게 옥살이를 한 할머니 다섯 분의 이야기를 담았다. 다큐멘터리 대본집이기도 한 이 책은 피해자들의 생생한 진술을 통해 4·3의 잔인성과 폭력성을 집중적으로 조명한다. 할머니들의 구술을 제주 방언에 능숙한 조사원들이 채록했고, 이를 토대로 다큐멘터리를 연출한 김경만 감독이 글로 썼다.

돌들이 말할 때까지 영화 속 장면 [배급사 무브먼트 제공. 재판매 및 DB금지]

책에 따르면 아기를 낳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았던 박춘옥 할머니는 4·3이 터지고, 겨울로 접어들 무렵, '몸뻬'(왜바지)만 입고 냇가 바위로 피신했다. 바위 주변에 돌을 조금 파내면 굴 같은 거처를 마련할 수 있었다. 밤에는 아버지가 몰래 마을로 내려가 먹을 걸 가져왔다. 그러나 도피 생활이 오래갈 순 없었다. 저인망식 토벌 작전을 펼친 군경에 결국 잡히고 말았다. 그와 그의 가족은 서귀포까지 끌려가 무수히 맞았다. 나중에는 때리는 데 지친 군인들이 "팔이 아프다면서" 전기고문을 자행했다.

"이렇게 전깃줄 엄지손가락에 양쪽 감아서 박박 (손잡이를) 돌리면 탄탄 오그라져 죽었다가(기절했다가) 살아나고 그거 돌릴 때는 죽어버렸다가(기절했다가) 그거 안 돌리면 살아났다…."(박춘옥 할머니)

영화 '스틸컷' [배급사 제공. 재판매 및 DB금지]

박순석 할머니는 1948년 5월 10일 국회의원 총선거가 있기 하루 전 '오름'으로 올라갔다. 마을에는 선거에 반대하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그렇다고 저항할 분위기도 아니었다. 군경의 눈초리와 탄압이 매서웠기 때문이다. 일단 '소나기는 피하자'는 심산으로 산으로 향했다. 선거가 끝나면 진정될 것이라 기대하면서. 마을 유지와 학교 선생님 같은 지식인들이 다 같이 올라갔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군경에 붙잡혔고, 연병장으로 끌려가 모두 총살됐다.

양농옥 할머니는 차에 실려 끌려가는 아버지를 하염없이 따라갔다. '9연대장'이라 불린 사람은 양 할머니에게 집에 가면 아버지를 보내 준다고 했다. 양 할머니는 집에 가 담배 한 보루를 사 들고 무근성(지금의 제주 경찰청 자리)으로 갔다. 하지만 아버지는 보이지 않았다. 며칠 동안 인근을 배회하다 트럭이 오는 걸 봤고, 그곳에 아버지가 앉아 있었다. '아버지'라고 부르니, 아버지는 고개를 푹 숙였다. 할머니의 아버지는 학교 운동장으로 끌려가 총살당했다.

돌들이 말할 때까지 스틸 컷 [배급사 제공. 재판매 및 DB금지]

책에 등장하는 할머니들은 70여년 전 그들의 가족에게 닥친 비극을 담담하게 풀어놓는다. 그들은 꽤 오랜 시간 동안 보고, 들었던 것, 가슴에 응어리졌던 것을 말할 수 없었다. 빨갱이 누명을 쓰며 옥살이까지 했기에, 어디 가서 하소연할 수도 없었다. 대나무 숲에서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외쳤던 어느 우화의 인물처럼, 그들은 걷다가 발에 치이는, 아니면 늘 그 자리에 그대로 있는 돌들에 말하면서 한(恨)을 삭일 수밖에 없었다.

"지금까지는 그래도 쉬쉬하면서 자식들에게도 말 못 했지만 앞으로 이것이 우리가 역사적으로 남는다는 것이 그거만 하나 생각하면…. 나는 돈으로 문제 생각하는 것이 아니요. 그저 우리 대에 역사적으로 우리가 4·3에 대해서 우리, 이런 사람이 있었구나 하는 역사적인 뭘 남겨 줬으면 좋겠어."(박순석 할머니)

파우스트. 200쪽.

[파우스트 제공. 재판매 및 DB금지]

buff27@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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