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영화 어때] 독립영화 ‘정순’이 화제작 ‘범죄도시’보다 빛나는 이유

신정선 기자 2024. 4. 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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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조선일보 문화부 신정선 기자입니다. ‘그 영화 어때’ 59번째 레터는 지난 17일 개봉한 영화 ‘정순’입니다. 포스터나 홍보 문구를 보고서는 그다지 끌리지 않았는데(특히 포스터는 이 영화의 장점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한다고 저는 생각) 보고 나선 레터로라도 소개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삶을 송두리째 뒤흔든 모멸 앞에서 자아를 지켜내는 힘. 그 품위와 꼿꼿함에 박수를 쳐주고 싶었습니다. ‘정순’을 보면서 ‘범죄도시4′가 떠올랐습니다. 둘은 내용상 공통점이 전혀 없습니다. 그런데 왜냐고요. 그럼 ‘범죄도시4′부터 잠깐 말씀드리면서 지나가볼까요.

왼쪽이 영화 '정순'의 주인공인 정순씨, 오른쪽이 문제의 직장 동료 영수씨입니다. 정순씨의 저 미소를 앗아간 장본인이죠.

지난주 ‘그 영화 어때’ 레터에서 ‘범죄도시4′ 시사회 다녀온다고 독자분들께 미리 보고드렸죠. 저희 신문에 나간 리뷰 기사를 보신 분들은 이미 아시겠지만, 저는, 네, 재미없었습니다. 정말 단 한 번도 웃지 못했어요. 보통 ‘범죄도시’ 정도의 대형 영화는 오후 2시에 언론 시사회를 하고, 오후 7시쯤 VIP시사회를 합니다. VIP시사회에는 연예인들이 많이 오고(사진기자들 북적), 배우 지인들, 제작사 관계자 등이 참석합니다. 즉, 그 영화를 호의적으로 봐줄 준비가 된 사람들이 자리를 메우게 되죠. 저는 오후 마감 때문에 저녁에 VIP시사회를 봤습니다. 출연배우들이 상영 시작 전 영화관에 들어와서 “재밌게 봐주세요”라고 인사할 때부터 열광의 도가니였습니다. 환호와 박수가 쏟아지는 가운데 시작된 영화. 독자 여러분들의 판단을 위해 말씀드리자면, 모든 대사에 매번 빵빵 터지며 웃는 분도 있었습니다. 저쪽 어딘가에선 허리가 꺾일 듯한 모션인가 싶을 정도로 깔깔거리시는 분도 계셨고요. 어느 배우는 그냥 등장만 했는데도 휘파람이 나오는 등(지인이신듯) 열기가 엄청났습니다. 그 한가운데 앉은 저는 ‘난 누구, 여긴 어디’ 심정으로 어둠 속에서 조용히 메모를 하고 있었습니다. (저도 웃고 싶었습니다.)

‘범죄도시4′ 천만을 예상하는 분들은 ‘3편도 (천만) 갔는데, 4편도 이 정도면’이라는 의견이시더군요.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마동석이 나쁜 놈 두들겨 패는 장면은 볼 때마다 속이 시원하니까요.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시사회장에서 웃는 분들이 많았던 거 보면 이 영화가 재밌다고 생각하는 관객이 많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영화담당 기자인 저로서는 아쉬움이 많이 남습니다. 시리즈 총합 3000만명 이상 동원한 영화라면 뭔가 좀 달랐어야 하지 않을까요. 이 정도 대작이면 최근 영화시장에선 형님입니다. 그런 영화에서 ‘이번엔 뭔가 새로운 걸 보여주고 말리라'라는 각오를 만나고 싶었다면 저의 지나친 기대일까요. 스파이더맨도 그랬죠. “With great power, comes great responsibility!”

영화 '정순'에서 딸 유진이 딱 한 번 눈물을 보인 장면. 내내 의연하고 현명했던 그녀를 울린 한마디는 무엇이었을까요.

영화 ‘정순’으로 돌아와보겠습니다. 최민식 배우가 주연한 디즈니 시리즈 ‘카지노’ 보셨나요. 필리핀으로 도피해갔던 다단계 사장님 기억하시는지요. 그 역으로 나왔던 김금순씨가 ‘정순'의 주인공 정순입니다. 정순씨는 딸이 낼모레 결혼날을 잡아놓은 장년 여성입니다. 50대쯤 돼보이네요. ‘노느니 일한다' 싶어서 식품 공장에 나가요. 거기에 신입이 들어오는데 정순씨 나이뻘인 영수라는 남자입니다. 직원들끼리 등산을 갔다가 둘이 친해져요. 그러다 사달이 납니다. 정순씨가 속옷만 입고 노래부르는 동영상을 영수씨가 찍었는데, 이게 공장 직원들 사이에서 삽시간에 퍼지게 되죠. 어떻게요? 영수씨가 보여줬으니까요.

모여서 킬킬거리며 동영상을 보던 직원들은 정순씨와 눈이 마주치면 화급히 시선을 돌립니다. 처음엔 무슨 일인줄 몰랐던 정순씨는 사실을 알게 되고 절망에 빠집니다. 그녀는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그 이후는 여러분께서 영화를 보시고 판단해주시길. 흔한 성범죄 고발 영화였다면 제가 이렇게 따로 소개해드리지 않았을 거에요. 아직 서른이 안 된 정지혜 감독님의 데뷔작이라는데 이런 소재를 소화한 시선이 참 새롭게 느껴졌습니다.

네, 그 새로움. “하늘 아래 새로운 게 없다는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봉준호 감독님의 언젠가의 인터뷰 워딩이 생각나네요. 저도 그 말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물론 ‘범죄도시’와 ‘정순’은 완전히 다른 영화입니다. 타겟 관객층도 다르고, 주제도 다르고 장르도 다르고 등등 똑같은 점이 없죠. 하지만 세상을 보는 시각, 혹은 주제를 다루는 감각은 얼마든지 다르게, 자신만의 색깔을 넣어서 보여줄 수 있는게 아닐지요.

얼마 전에 사서 머리맡에 둔 창비시선 500번째 기념 시선집 ‘이건 다만 사랑의 습관’에 이런 말이 있었어요. “세계의 가능성을 개진하는 것이야말로 시가 가장 잘하는 일이다.” 이 구절에 밑줄을 쫙 긋고 이렇게 바꿔봤습니다. “세계의 가능성을 개진하는 것이야말로 영화가 가장 잘하는 일이다.” 저는 시를 좋아하고, 모든 예술의 형태 중에서 가장 우월하다고 믿지만, (아, 아니다. 음악인가? ㅎㅎ) 저 문구만은 영화에게 양보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네요. (담당기자라 편애의 마음이 쏠렸는지도) 하던 대로 하던 것만 하면서 자족하는 영화 말고, 고생이 되더라도 남들이 안 하는 거 하면서 부단히 이 세상을, 영화의 세계를 넓혀나가는 영화를 응원합니다. 그런 영화를 위해 저도 계속 기사를 쓰고 레터를 보내겠습니다. 그런 점에서 더욱, 오늘도 읽어주셔서 감사드리고요~ 다음 레터로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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