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장애인이자 여성이다 [젠더 프리즘]

박현정 기자 2024. 4. 21. 1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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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티이미지뱅크

박현정 | 젠더팀장

“피임은 잘하고, 19금 이야기는 어른 되면 해줄게.”

휠체어를 타고 구르는 삶에 대한 글을 쓰는 김지우 작가는 18살 때 휠체어를 탄 언니로부터 이 말을 듣고 “머리가 번쩍 밝아지는 듯한” 경험을 했다. 김 작가는 휠체어를 탄 10~60대 여성 6명을 인터뷰해 최근 펴낸 책 ‘우리의 활보는 사치가 아니야’에서 이 말의 가치를 이렇게 소개했다. “언니의 말 속에서 몸은 감추거나 숨겨야 할, 혹은 폭력과 억압을 피해 얌전히 두어야 할 대상이 아니었다. 다른 몸과 만나고, 다른 몸을 쓰다듬거나 충분히 쓰다듬어져야 하는 존재였다.” 언니는 훗날 이렇게 말했다. “너의 몸을 잘 지키는 법, 그리고 즐기는 법을 이야기하고 싶었어. 장애가 있는 여성으로서는 그 고민을 할 수밖에 없어.”

장애가 있는 여성들의 몸을 둘러싼 고민은, 비장애인 여성이 마주하는 고민보다 훨씬 복잡하다. 장애여성은 장애인에게 불리한 사회 구조에 더해 성차별 구조가 가중되면서 복잡한 형태의 ‘다중 차별’을 겪는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2018년 장애인 실태조사(2017년) 원자료를 분석한 ‘여성 장애인의 실태와 정책과제’를 보면, 혼자 사는 장애여성 비율은 25.4%로 장애남성(15.5%)보다 많다. 최근 한달 동안 매일 외출한 장애여성은 59.9%로 장애남성(77.7%)에 견줘 적었다. 가족 내 차별·폭력, 성희롱·성추행·성폭력 피해 경험은 장애남성보다 많았고, 만성질환을 앓고 있는 비율 등 건강 지표는 더 나빴다.

이런 자료에선 장애여성이 ‘내 몸을 지키고, 즐기는 데’ 어떤 어려움을 겪는지 파악하기 어려웠다. 한국장애인개발원의 ‘장애인삶 패널조사’를 보면, 2020년 기준 성 관련 상담자가 없다고 답한 장애인은 76.7%에 이르렀다. 장애여성(80.4%)은 장애남성(73.7%)보다 성에 대해 물어볼 사람이 없었다. 2018년 한해 동안 원하지 않는 성관계 경험이 있는 장애여성 92.6%(장애남성 86.7%)는 당시 아무런 조처도 하지 않았다고 했다. 병원 방문 뒤 사후 피임약 복용을 했다는 경우는 1.2%에 그쳤다.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은 2022년 장애여성 30명 등에 대한 심층면접 조사를 바탕으로 ‘중증장애여성의 성·재생산 영역에서 차별 경험과 인권증진 방안 연구’ 보고서를 펴냈다. 당시 조사에서 한 장애여성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생리를 하지만 여성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스스로를 성적 욕구가 없는 존재로 여긴다는 뜻이다. 장애여성들은 초경을 경험할 당시 축하보단 돌봄이 더 어려워질 것을 걱정하는 말을 듣는 경우가 많았다. 월경 때 건강 관리, 자위, 연애 등 성에 대한 다양한 정보를 알길 원했지만 장애 특성에 맞는 유용한 정보를 접하는 건 어렵다고 했다.

초저출산을 걱정하지만, 장애인의 임신·출산은 환영받지 못한다. 연애나 결혼을 원하는 장애여성도 출산에 대해선 주저했다. 경제적인 이유뿐 아니라 장애가 대물림될까 두려움이 크다. 가족이나 지인들 역시 출산에 부정적이다. 몸도 불편한데, 어떻게 아이까지 낳아 키우느냐는 취지다. 이런 편견과 고정관념은 임신한 장애여성이 산부인과 진료를 받으러 갔을 때 ‘임신 중지’를 하러 온 것 아니냐는 질문으로 이어진다.

우리 사회에서 장애인은 여전히 성적 욕구가 없는 존재로 여겨진다. 그렇기에 성생활, 임신·출산을 통제하려는 압력이 강하다. 휠체어 탄 언니가 말한 ‘몸을 지키는 법, 즐기는 법’을 제대로 알려주지도 않는다. 이런 현실은 장애여성들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침해하고 성폭력 피해 위험을 높일 수 있다.

장애인이 모두 똑같지 않다는 건 다 아는 이야기다. 그러나 현실에서 다양한 삶은 장애인이란 단어 하나로 뭉뚱그려진다. 젠더(사회문화적 성) 관점이 빠진 장애인 정책은 휠체어 탄 언니들의 고민을 담아내지 못한다. 그리고 이런 정책이 장애여성이 닿을 수 있는 세상을 좁히는 건 아닌지 질문이 필요한 시점이다.

sara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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