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의 대화 능력 [김연철 칼럼]

한겨레 2024. 4. 21.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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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는 승자가 모두 갖는 전쟁과 다르다. (…) 왜 공무원의 사기가 떨어졌을까? (…) 지난 정부의 일로 아직도 조사하고 징계하고, 무능으로 한직에 머물던 인물이 갑자기 완장을 차고 설치고, (…) 공무원 밀집 지역에서 야당이 압승한 이유다. (…) 위기의 먹구름이 몰려오는데 대통령의 대화 능력을 기대하기 어려울 듯하다. 그것이 대한민국이 직면한 비극의 핵심이다.
지상파 방송 3사가 공동주최한 대선 후보 토론회가 열린 지난 2022년 2월3일 서울 한국방송 스튜디오에서 당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왼쪽 사진)와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가 토론을 준비하고 있다. 공동취재사진

김연철 | 전 통일부 장관·인제대 교수

전쟁은 총칼로 하지만 정치는 말로 한다. 총선이 끝나자, 정치가 살아나기를 기대하는 목소리가 높다. 경제위기의 먹구름이 몰려오고, 해결해야 할 과제가 산적해 있는 위기 국면이 아닌가? 대통령이 야당 대표를 만나기로 했다. 늦었지만 잘했다. 첫 만남이라 기대가 높다. 과연 대통령은 그동안 볼 수 없었던 대화의 능력을 보여줄 수 있을까?

대화는 마주 보고 말한다는 뜻이다. 나라 안의 정치와 나라 밖의 외교도 대화로 이루어진다. 정치를 잘하는 대통령은 당연히 외교도 잘한다. 역대 정부에서 김대중 대통령이 영수 회담을 가장 많이 했다는 사실은 우연이 아니다. 반대로 나라 안에서 보이는 불통은 나라 밖의 외교에서도 그대로 반복된다. 정치와 외교는 동전의 양면이기 때문이다.

대화 능력의 절반은 듣는 능력이다. 북아일랜드 평화 협상을 성공으로 이끌었던 조지 미첼은 협상의 비결을 묻는 말에, 석달 동안 다양한 정파의 주장을 듣기만 했다고 말했다. 지위가 높을수록 말하기가 아니라 듣는 능력을 길러야 한다. 대통령이 듣지 않고 자기 말만 하면, 국민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 수 없고, 물가가 왜 높은지, 보통 사람들의 세상살이가 왜 고달픈지를 이해하기 어렵다. 정치인이 현장에 가는 이유는 듣기 위해서다. 갈등 해결의 첫걸음 역시 당사자의 불만과 하소연을 듣는 일이다. 듣지 않는 사람은 정치를 하면 안 된다.

대화는 상대를 인정할 때 시작할 수 있다. 당연히 상대를 무시하고 혐오하고 절멸의 대상으로 여기면 마주 앉을 수 없다. 대화의 목적은 다양하다. 말 몇마디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대화는 한번이 아니라 여러번 해야 해서, 산 하나가 아니라 산맥을 넘는 일과 같다. 차이를 인정하면서 공통점을 찾는 과정이 대화다. 듣고 말하기는 바로 주고받기를 위한 것이다. 약속을 하나씩 실천하면서 신뢰를 쌓고, 이해를 조정하는 것이 정치다. 그래서 정치는 승자가 모두 갖는 전쟁과 다르다.

지도자의 대화 능력은 조직을 살리거나 죽이기도 한다. 특히 제도가 아니라 사람이 좌지우지하는 한국의 조직문화에서는 더욱 그렇다. 현재 정부가 돌아가지 않는 증거가 넘쳐난다. 잼버리의 국제적 망신, 한국의 외교적 위상과 어울리지 않는 부산엑스포 29표, 채 상병 사망의 진실 은폐, 모든 사건의 공통점이 있다. 정부의 기능이 마비된 결과다. 어디 이뿐이겠는가? 거의 모든 갈등 현안에서 정부가 보이지 않고, 공무원들이 움직이지 않는다.

왜 공무원의 사기가 떨어졌을까? 조직의 목표와 정반대되는 인물이 낙하산으로 내려오고, 도대체 뭔 일인지 빈자리는 채워지지 않아 인사 적체가 심각하고, 지난 정부의 일로 아직도 조사하고 징계하고, 그래서 유능한 인재들은 정부를 떠나고, 무능으로 한직에 머물던 인물이 갑자기 완장을 차고 설치고, 남아 있는 사람들은 해외 교육의 기회만 노리는 공직사회에서 일할 맛이 나겠는가? 공무원 밀집 지역에서 야당이 압승한 이유다.

그런데도 대통령은 소통을 활성화해서 조직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독재 정부 시절의 공직기강으로 군기나 잡으려 한다. 당연히 적극 행정은 사라지고 책임지지 않으려 하고 유연성을 발휘하지 않으려 한다. 공무원들이 딱딱해지고 불친절해졌다는 민원이 높아진 이유다. 지도자의 불통과 공무원의 불친절 사이에는 상관관계가 높다.

‘말하면 행동해야 하고, 행동하면 성과가 있어야 한다.’ 공자의 말이다. 실천할 생각이 없으면 말하지 말고, 결과를 예상하고 행동해야 한다는 뜻이다. 정치와 외교의 핵심이다. 너무 자주 거짓말을 하거나, 빈말을 남발하는 지도자를 국민은 신뢰하지 않는다. 총선 과정에서 수많은 민생 공약을 살포했지만, 아무런 호응을 얻지 못한 이유를 살펴보기 바란다. 외교 무대에서도 마찬가지다. 대화 능력이 없으면 외교 무대에서 존중받지 못하고, 당연히 역할도 줄어든다.

협치라는 말이 등장했다. 정부와 시민사회, 노사정 그리고 법률로 정해진 거의 모든 협치의 제도를 무력화한 정부가 할 말은 아니다. 협치는 정부와 여당이 마땅히 실천해야 할 의무이지, 야당의 언어는 아니다. 대통령이 먼저 각계각층의 의견을 듣고, 널리 인재를 구하고, 국민의 의혹을 풀고, 무수한 위기의 해법을 마련한 다음에, 야당의 협조를 구하는 것이 순서다. 안타깝게도 위기의 먹구름이 몰려오는데 대통령의 대화 능력을 기대하기 어려울 듯하다. 그것이 대한민국이 직면한 비극의 핵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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