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소설인 노숙인들과 글쓰기 수업…1년 내내 드라마죠”

강성만 기자 2024. 4. 21. 17:55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짬] 노숙인에게 인문학 가르치는 성프란시스대 박경장 교수
성프란시스대학 박경장 교수가 지난 17일 한겨레와 인터뷰 뒤 사진을 찍고 있다. 강성만 선임기자

영문학자 박경장(64)씨는 2008년부터 성프란시스대학에서 노숙인들에게 글쓰기를 가르치고 있다. 대한성공회 사회복지재단인 다시서기종합지원센터가 2005년 개설한 성프란시스대학은 1년 2학기 과정으로 노숙인들을 대상으로 작문과 철학, 문학, 예술사, 한국사 수업을 한다. 지난 3월에 20기 수강생 15명이 입학했다. 설립 목표는 노숙인들이 다시 설 수 있도록 인문학 공부를 통해 자존감을 회복시키는 것이다.

그는 이 대학 교수 다섯 중 근속 서열 4위이다. “동료 교수 한 분이 그래요. 잘릴 때까지 안 나간다고요. 저 역시 같은 마음입니다. 너무 행복해요. 1년이 드라마입니다. 여기 선생님(학생)들의 인생이 한 분 한 분 다 소설 같아요. ‘우리 대학은 적어도 자살 시도는 두 번 정도 해보고 몸에 유서 한 통은 가지고 다녀 본 사람만 들어올 수 있다.’ 수료생 한 분이 한 말입니다. 그런 분들이 1년 동안 최대의 환대를 받는 곳이죠.”

최근 4년의 집필 끝에 ‘비티에스(BTS), 인문학 향연’(삼인)이란 책을 낸 박 교수를 지난 17일 경기 성남시 미금역 근처 공원에서 만났다.

그는 아일랜드 작가 제임스 조이스의 영국 제국주의 비판을 주제로 서강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2010년엔 진도 출신인 동향 작가 박상률 평론으로 문단에 이름을 냈고 지금은 유럽인문아카데미에서 체코 출신 작가 밀란 쿤데라 문학 세계를 주제로 강의도 한다.

그는 초등학교 입학을 위해 떠나온 진도군 금호도 시절부터 음악과 밀접한 삶을 살아왔다. 집안 행사가 있을 때면 아버지 형제들은 으레 육자배기 한 자락을 돌아가며 뽑았다. 30대 중반부터 다녔던 강남향린교회 국악반주단에선 그와 아내가 각각 대금과 가야금을 맡아 연주했다. 성프란시스대학에서도 풍물패 소모임 두드림을 만들어 10년 이상 이끌었다. 대학생 시절인 80년대 초에는 민중신학자 고 김찬국 교수가 설교했던 목양교회 장례예배에서 늘 조가를 부르곤 했단다. “김 교수님이 제 목소리가 슬프다며 교인 장례 때 조가를 담당하게 했죠.”

‘비티에스, 인문학 향연’ 표지.

4년 전 나라 밖의 ‘케이(K)-방역’ 찬사에 자극 받아 ‘한류의 뿌리’를 검토하면서 비티에스에 입덕하게 되었다는 그는 이번 책에서 방탄 음악을 자신만의 해석으로 칼 융, 에리히 프롬, 제임스 조이스 등 여러 작가·사상가의 사유와 연결시킨다.

“우리 자신을 각각 소우주로 선포한” 방탄의 페르소나 앨범을 두고 그는 동학의 인내천 사상을 비롯해 우리 민족의 집단 무의식까지 거슬러 탐색하고, 또 다른 곡 블랙스완과 그 뮤직비디오(뮤비)를 통해선 여러 인문과 예술 분야와의 끊임없는 소통으로 자신들의 음악 세계를 넓히려는 비티에스의 지향을 파고든다. 비티에스 팬클럽 아미 회원들이 인종과 민족, 종교적 편견을 뛰어넘어 사회 운동으로까지 나아가는 양태도 상세히 다루면서 “남과 북 아미들이 어깨동무를 하고 통일의 물꼬를 틀지” 상상하기도 한다.

2008년에 작문 강사로 합류
“수업 때마다 기막힌 글감 주워”
30대 중반 강남향린교회에서
안병무 신학 만나 신앙관 변화
사회적 약자 지원활동 적극 펼쳐
50살에 박상률 평론으로 등단

BTS 음악을 인문학으로 푸는
‘BTS, 인문학 향연’도 최근 출간

그는 다른 아이돌 음악과 비티에스의 차별점으로 세상의 편견과 억압에 맞서는 자기들 이야기를 한다는 점과, 음악과 뮤비에 인문학적 상징이 풍부해 수용자마다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는 점을 든 뒤 이런 특장이 2020년 나온 ‘비(BE)’ 앨범 이후론 퇴색한 것 같아 아쉽다고도 했다. “방탄 곡 블랙스완이 탄생하는 데 영감을 주었던 무용수 마사 그레이엄이 ‘무용수는 두번 죽는다. 첫 죽음은 춤을 멈출 때 찾아온다. 그 첫번 째 죽음이 (진짜 죽음보다) 더 고통스럽다’고 말했어요. 저는 그 말을 방탄 멤버들에게 되돌려 주고 싶어요. 언제 활동을 재개할지 모르겠지만 앞으로도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고 그들 음악의 정체성인 ‘성장’을 지켜나갔으면 좋겠어요.”

그는 자신이 문학과 사회적 약자와의 연대에 관심을 갖게 된 데는 장흥 출신 이청준(1939~2008) 소설가와 민중신학자 안병무(1922~1996)의 영향이 크다고 했다. “대학 시절 이청준 소설에 깊이 빠져 작품을 다 읽었어요. 소설적 공간, 내용, 형식이 다 마음에 들더군요. 특히 ‘서편제’ 등 여러 작품에서 제 고향과 부모님 이야기를 읽어낼 수 있어 좋았죠.” 그의 조부는 한두 달 바다에 머물며 어로를 할 수 있는 ‘중선배’ 선주였고 아버지는 해양대를 나와 외항선 선장으로 세계 바다를 누볐단다. “어릴 때 석양 무렵 금호도 동산에서 황포돛배 두 대가 붉게 물든 바다를 뚫고 경쟁하듯 섬으로 미끄러지듯 들어오는 모습을 본 게 지금도 잊을 수 없어요. 이청준 소설을 보며 그 장면이 떠오르면서 문학을 해야겠다고 결심했죠.”

1953년 향린교회 설립을 이끈 안병무 교수가 별세할 무렵 강남향린교회를 다니기 시작한 그는 교회에서 사회선교부장 등을 맡아 사회적 약자들을 위한 투쟁에 적극 나섰다. “안병무 민중신학을 만나 제 보수적인 신앙관이 확 바뀌었죠. 보통 교회에서는 예수를 믿고 고백하라고 하지만 안 교수는 사건이 먼저 있고 그 사건에 참여하는 과정에서 예수의 신성을 얻을 수 있다고 했어요. 수난에 참여하는 너로부터 구원이 온다는 거죠. 교회 신도들과 2006년 대추리싸움이나 2009년 용산참사 투쟁에 적극 결합하고 오랜 시간 노숙인들과 함께해 온 것도 그 영향이 커요.”

박경장 교수. 강성만 선임기자

올해로 17년 차 노숙인 작문 교수인 그에게 수업 중 언제 가장 즐겁냐고 하자 “매주 수업 현장에서 글감을 줍는다”는 답이 돌아왔다. “작문 시간에 ‘마구쓰기’ 수업을 하는데요. 기막힌 글들이 쏟아집니다.” 그는 내년 대학 20년을 맞아 시집 발간을 준비 중이라는 수료생 권일혁씨의 시 ‘빗물 그 바아압’을 예로 들었다. “지금은 안 하지만 예전에는 비올 때도 서울역 앞 노천에서 노숙인에게 배식을 했어요. 그 모습을 다룬 시이죠. ‘빗물바아압 빗물구우욱 비잇무울 기이임치이’ 등의 시어로 밥과 반찬에 빗물이 섞여 늘어나는 모습을 표현했어요. 기성 시인들도 이 시를 보고 깜짝 놀라더군요.”

작문 수업은 그가 인생을 배우는 시간이기도 하다. “병원 임상시험은 다 참여하고 온몸이 종합병동이었던 한 선생님이 그간 했던 아르바이트 20여 가지를 나열한 글을 보고 깜짝 놀랐어요. 카지노 이백 번 안쪽 순번 예약해주기, 교회 신자 머릿수 채우기, 영안실 상주 대행 등등의 목록이 저에게는 충격이었어요. 이런 글 앞에서 제 글은 힘이 없어요. 이 분들에 비하면 저는 ‘유사 통증’을 겪고 있다는 생각까지 들죠.”

그는 이어 “한글은 잘 못 읽어도 죽음 근처에서 놀아본 경험이 있는 선생님들과 수업하면서 많이 배우고 제 먹물 근성에 반성을 많이 한다”며 “노숙인 작문 수업은 현장 인간학을 배우는 시간”이라고 말했다.

강성만 선임기자 sungman@hani.co.kr

Copyright © 한겨레.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크롤링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