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뿐인 ‘이방인’…서구에 갇힌 베네치아

노형석 기자 2024. 4. 21. 1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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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베네치아 비엔날레 2024
‘공기를 채운 보이지 않은 질문들’이란 제목으로 베네치아의 옛 건물 팔라초 로레단에서 미국 작고작가 제임스 리 바이어스의 작품과 나란히 한국 실험미술의 선구자 이승택의 작품이 선보였다. 건물 1층 들머리 베네치아 출신 저명한 위인들의 흉상 사이로 이 작가의 대표작인 채색 도기 조형물들이 함께 놓여 눈길을 붙잡았다.

이탈리아 베네치아의 날씨는 극도로 변덕스러웠다. 무덥기까지 했던 늦봄 날씨는 지난 16일 오후 급변했다. 돌풍과 번개를 동반한 소나기가 베네치아 석호와 시내에 몰아쳤다. 초겨울처럼 기온이 떨어졌다. 이례적인 날씨 변화는 전란과 양극화, 기후이변 등 세계적 위기의 앞날은 물론 길을 잃었다는 한탄이 이어지는 제60회 베네치아 비엔날레의 불안한 미래를 예시하는 듯했다.

베네치아 본전시관에서 한 현지 관객이 처음 출품된 이쾌대의 자화상(오른쪽 위)과 장우성의 대작 아틀리에(왼쪽)를 감상하고 있다. 노형석 기자

이번 비엔날레에서 총감독으로 임명된 브라질 출신 큐레이터 아드리아노 페드로사는 제3세계 예술가들의 작품을 전시장에 쏟아내며 집중조명했다. 시내 동남쪽 자르디니 공원 안쪽 비엔날레 본전시관(센트럴 파빌리온) 정면이 정연한 흰색의 신전 같았던 기존 모습과 달리 남미 선주민 예술가들의 울긋불긋한 대형 그림들로 벽면이 뒤덮인 건 이런 주제의식을 단적으로 반영하는 몸짓으로 비쳤다. 대형 그림은 브라질과 페루의 후니쿠인족 예술운동 모임인 ‘마쿠(MAKHU)’가 물고기, 거북, 새 등을 그려넣은 집단 창작 벽화다. 옛 조선소였던 아르세날레에 마련된 또 다른 본전시관 들머리에서도 뉴질랜드 마오리족 여성 작가 단체인 ‘마타 아호 컬렉티브’의 설치작품들이 관객을 맞았다.

베네치아 비엔날레에 초대된 원로 여성조각가 김윤신씨가 자르디니 공원 경내의 본전시관에서 자신의 출품작들 앞에 서 있다. 국제갤러리 제공

‘어디를 가든 항상 외국인을 만난다’ ‘당신은 어디에 있든 외국인’이라는 모토로 이방인의 문제를 미술현장에 끌어낸 페드로사의 주제 의식은 지난 2015년 흑인들의 정치적 예술을 대거 등장시킨 나이지리아 출신 감독 오쿠이 엔위저와 2년 전 여성들을 절대 주제로 만들었던 알레마니 감독에 이어 또다른 맥락의 진보적인 의제 설정으로 보인다. 한국 근대작가인 이쾌대, 장우성의 1940년대 그림과 남미에서 작업하며 노마드적 예술을 추구해온 원로조각가 김윤신, 서울과 미국을 오가며 활동중인 퀴어아티스트 이강승을 초대작가로 선정한 파격도 그런 맥락으로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뚜껑을 열고 보니 기대에 미치지 못하며 겉다르고 속다른 불편한 전시라는 비판이 쏟아지고 있다. 이는 자르디니 공원에 자리잡은 센트럴 파빌리온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건물 전면과 들머리 등을 남미 선주민 예술가와 튀르키예 출신 여성 작가의 작품 등으로 구성하면서 형식파괴적 면모에 구색을 맞추는 듯했지만, 그 뒤로 이어지는 제3세계권 작가들의 추상작품과 초상화 전시, 푸에르토리코의 미국 식민지 역사를 조명한 영상관은 명백한 백색 공간, 암전 공간의 뮤지엄 회화관, 영상관 전시의 형식을 한치도 벗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난 17일 현지 퀠리니스탐팔리니 재단 건물에서 개막한 유영국 작가 회고전 현장. 이서현 삼성리움운영위원장(왼쪽 두번째) 등 관객이 지켜보는 가운데 김인혜 기획자가 처음 공개된 작가의 60년대 대작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브라질, 콜롬비아, 싱가포르, 베트남, 중동권 작가들이 19~20세기 서구 모더니즘에 영향받아 토착적인 그림체를 정립하거나 새로운 양상을 모색하는 그림들이 나왔는데, 제도권 미술관에 가져와 깔끔하게 배치하며 르네상스 바로크시대 유럽 귀족들이 즐겨 만들었던 호기심의 방 수준으로 정제해 늘어놓은 데 불과했다. 동서양 화풍을 융합했던 이쾌대의 자화상과 채색수묵화로 아틀리에의 작가와 모델의 여자가 서로 눈빛 나누는 장면을 담은 장우성의 대작들은 이런 ‘호기심의 방’에서 지난 세기와 21세기 중남미, 남미, 아시아권 작가들의 작품과 함께 놓였는데 단지 전체적인 전시실의 성격을 뒷받침하는 소품 내지 부품 같은 인상을 주었다.

지난 17일 사전공개된 자르디니 공원 들머리 안쪽의 비엔날레 본전시관(센트럴 파빌리온) 정면. 정연한 흰색의 신전 같았던 기존 모습과 달리 남미 선주민 예술가들의 울긋불긋한 대형 그림들로 벽면이 뒤덮였다. 브라질과 페루의 후니쿠인족 예술운동 모임인 ‘마쿠(MAKHU)’가 강에 사는 물고기, 거북, 새 등을 그려넣은 집단 창작 벽화다.

국내 미술사 맥락에서만 바라봤던 그들의 그림을 세계적 시야 특히 국제무대 유수의 전시에서 제3세계의 시야에서 볼 수 있게 됐지만, 많은 국내외 전문가들은 진정성이나 파격성이 느껴지지 않는 뮤지엄 전시이며, 새 작가층을 원하는 서구 미술자본이나 대형 컬렉터들을 위한 브리핑식 전시와 다름 없다고까지 비판했다.

우크라이나 특별전에 나온 우크라이나 아이들이 자는 모습을 담은 영상들.

인근 국가관들도 물량공세를 통해 전시주제를 작위적으로 뒷받침하는 듯한 행보를 보였다. 인디언 장식 무늬와 조형물로 내외부를 요란하게 덧씌운 미국관이 단적인 사례이고 현란한 미디어파사드를 내놓고 자신들이 지배한 중남미·아프리카 식민지 선주민 출신 작가들의 작품을 내놓은 영국관·프랑스관도 양상은 비슷했다. 제3세계 선주민들의 상상력과 예술을 조명하고 존중하는 듯하지만 작품을 바라보는 시각은 전형적인 서구인의 시선이란 점이 불편하다는 지적들이 나온다. 이용우 전 광주비엔날레 대표이사는 “뮤지엄 디렉터를 주로 뽑아서 비엔날레 감독으로 쓰는 관행이 계속되면서 전시 자체가 비엔날레 고유의 파격과 도발성, 행동성을 잃은 한계가 올해 두드러지게 표출되고 있다”고 말했다.

흙에 국가관 건물이 파묻힌 충격적인 광경을 보여준 독일관 전면.

전시 기획의 방향성과 형식 측면에서 부정적인 면이 도드라진 반면에, 국가관에 참여한 작가들은 독특한 감성적 작업들을 통해 민족주의적 퇴행이 심화되는 국가관 전시 체제에 대한 거부감 혹은 혁신의 의지를 은연중 표상했다. 자르디니 공원 안쪽 한국관에서 단독전시를 차린 구정아 작가는 ‘오도라마시티’란 작업을 통해 한국 근현대사를 휘감은 냄새에 주목해 이를 재현하는 작업을 내놓았지만 실제로 전시를 살펴보면 향의 강렬함보다 사방 전체가 투명한 통창으로 뚫린 유일한 전시장인 한국관의 개방성을 슴슴하게 펼쳐놓는 데 주력했다는 인상을 줬다. 국가관으로 표상되는 구별짓기와 경계없음에 대한 작가적 신념을 요란한 조형물이나 영상장치가 일체 없는 투명한 공간성을 통해 강조했다고나 할까. 안쪽 공간의 중성적인 아이 캐릭터가 발끝으로 서서 향을 내뿜으며 도약하는 듯한 초현실적 이미지를 보여준 것도 그런 맥락으로 비쳤다. 바로 옆 독일관도 장대한 기둥 건물의 전면 자체를 흙더미에 파묻어버리고 그 안쪽에서 흙먼지 속에서 옷을 벗거나 음식을 조리하는 인간의 일상 행위를 배우들이 보여주는 연출구도를 통해 기존 국가관 구도에 대한 아티스트들의 염증을 표출한 것으로 보였다.

선주민과 더불어 전쟁의 여파와 감수성은 이번 비엔날레에서 가장 극명한 특징이다. 이스라엘의 출품 기획자와 작가가 가자지구 휴전을 촉구하며 전시를 중단한 것이나, 러시아가 국가관을 우방 볼리비아에 대여한 사례 등에서 지구촌 전쟁의 여파는 극명하게 전달됐고, 국가관의 퇴색된 의미와 결부되면서 더욱 큰 성찰을 안겼다는 평가가 나온다. 이런 맥락에서 바닥에 널브러진 생화와 피난처에서 잠자는 아이들의 영상을 뇌우를 맞으며 서있는 사람의 전신그림과 한 공간에 병치시킨 핀추크 센터의 우크라이나 특별전시관 ‘감히 꿈꾸다’와, 러시아 침공 당시 몇 달 동안 일상에 파고들어온 전쟁의 단면을 우크라이나인들이 유튜브, 틱톡으로 찍은 동영상들을 편집해 보여준 우크라이나관의 작품들은 가장 아름답고도 절절하게 전쟁의 이미지를 빚어냈다는 호평을 받으며 이번 비엔날레의 화제관이 되었다. 찬란한 이집트 문명을 지니고도 3세계 식민지의 비참한 질곡을 겪은 이집트 역사를 가상 오페라 연출무대로 꾸민 거장 와엘 샤키의 이집트관 전시도 절찬 속에 관객들의 긴줄이 이어졌다.

17일 광주비엔날레 30주년 특별전 ‘마당’의 개막행사를 치른 강기정 시장과 박양우 비엔날레 재단 대표이사, 니콜라 부리오 총감독 등이 홍보 플랭카드를 들고 오찬장으로 행진하고 있다. 일행 앞에서 전통 연주자가 징을 울리면서 대열을 이끌었다. 이날 행진 이벤트를 두고 강 시장은 “광주 정신을 베네치아에서 발산한 자리여서 흐뭇했다”고 말했다.

한국 미술은 이번 비엔날레에서 10건 이상의 전시를 꾸리면서 위상을 과시했다. 본전시 초대 작가뿐 아니라 연계 전시와 여러 기획전에 유영국, 하인두 등 근대 작가들과 바로 그 밑세대 원로작가, 중견작가들이 잇따라 소개됐다. 한국 근대 작가들이 이렇게 많이 소개된 것부터 전례가 없다. 본전시와 별개로 개최된 작가전시회 가운데 가장 뛰어난 건 ‘공기를 채운 보이지 않은 질문들’이란 제목으로 팔라초 로레단에서 열린 미국 작고작가 제임스 리 바이어스와 한국 실험미술 선구자 이승택의 2인전이었다. 건물 1층 들머리 베네치아 출신 저명한 위인들의 흉상 사이로 이 작가의 대표작인 채색 도기 조형물들이 함께 놓여 눈길을 붙잡은 그의 전시는 1950년대부터 정립된 전위적인 물질성, 물건 모양의 작업들 꿰기 등의 형식을 고풍스러운 베네치아 고전건물에서 절묘하게 펼쳐내면서 그의 작품이 지닌 국제성과 보편성을 웅변했다.

황금사자상을 받은 뉴질랜드 ‘마타 아호 컬렉티브’의 설치작품 ‘타카파우’(2022).

20일 열린 베네치아 비엔날레 미술전 공식 개막식에서 대상인 황금사자상은 오스트레일리아관과 본전시에 참가한 뉴질랜드 마오리족 여성 작가 집단인 ‘마타 아호 컬렉티브’가 받았다. 오스트레일리아 관은 원주민 작가 아키 무어의 작품으로 꾸려졌다. 전시장 내부 벽면 사방을 거대한 칠판으로 꾸미고 6만5천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자기 조상의 역사를 분필로 그려 넣고 전시장 한가운데는 원주민 탄압과 관련된 정부 당국의 행정 서류 뭉치 수십만장을 그대로 옮긴 설치작품을 배치해 주목을 받았다. ‘마타 아호 컬렉티브’는 지난해 광주비엔날레에도 참여했던 작가들이다. 아르세날레 본전시장 들머리에 마오리 족의 출산 때 쓰이는 정교하게 짠 섬유 매트 작품 ‘타카파우’를 선보이면서 제3세계 선주민의 생활문화유산과 현대미술의 접점을 보여주었다.

베네치아/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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