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존이 곧 생존이라는 역설 담은 《기생수: 더 그레이》

이은선 영화 저널리스트 2024. 4. 21. 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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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주 연속 넷플릭스 비영어권 시리즈물 1위…《부산행》 연상호 감독의 독창적 연출로 日 원작 만화와 차별화

(시사저널=이은선 영화 저널리스트)

정체불명의 기생생물이 인간의 몸을 숙주 삼고, 그들은 다른 인간을 먹으며 생존한다. 그러나 인간의 뇌까지 온전히 차지하는 데 실패한 '변종'이 등장한다. 반은 인간, 반은 괴물인 이 존재는 공존이 불가능한 두 종족의 영역에서 어떻게 살아남아야 할까. 넷플릭스 오리지널 《기생수: 더 그레이》는 일본 고단샤가 출간한 인기 만화 《기생수》의 세계관을 바탕으로 만든 스핀오프(외전)다. 독자적 노선을 걷는 작품이라는 얘기다. 앞서 일본에서 만들어진 동명의 애니메이션 시리즈 및 두 편의 실사영화와도 온전히 다르다. 

우선 초반 반응이 좋다. 작품 공개 이후인 4월8일부터 14일까지 시청 시간을 분석한 결과, 2주 연속 넷플릭스 비영어권 시리즈물 가운데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시청된 작품에 이름을 올렸다. 한국과 대만, 태국, 칠레 등 33개국에서 1위를 차지했으며 총 84개국에서 10위 안에 인기작으로 랭크됐다. 가장 인간적이지 않은 존재이거나 인간성을 발휘할 여건이 없는 이들로부터 인간의 특질을 살펴보는 것. 한국 사회로 배경을 옮긴 《기생수: 더 그레이》는 이 같은 목표점을 향해 긴 촉수를 뻗는다. 

ⓒ넷플릭스 제공

하나의 몸과 두 개의 존재 

수인(전소니)은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남았다. 절반은 우연이며, 나머지 절반은 필연이다. 마트 점원으로 일하던 수인은 계산대에서 시비가 붙었던 남자의 보복으로 칼에 여러 차례 찔렸던 터다. 수인이 죽어가던 순간, 하늘에서 떨어진 기생수 포자가 수인의 몸으로 들어간다. 기생생물은 온전하지 않은 수인의 상태 때문에 신체의 일부만 차지할 수 있었다. 그 결과 수인은 반은 괴물, 반은 인간의 정체성을 가진 채 살아가야 하는 존재가 된다. 준경(이정현)이 이끄는 기생생물 소탕 전담팀 더 그레이가 수인을 쫓는 사이, 세력을 불리기 위한 기생생물들 역시 수인을 쫓는다. 그사이 폭력 조직에서 배신당해 도망자 신세가 된 강우(구교환)가 우여곡절 끝에 수인의 여정에 합류한다. 그의 가족 역시 기생생물의 숙주가 된 지 오래다. 

원작이 지닌 미학의 모방이나 재현이 아닌, 자신만의 정체성을 가진 세계를 구축하려고 한 대범한 선택은 《기생수: 더 그레이》가 지닌 장점이다. 원작과의 가장 큰 차이점은 작품의 핵심 이미지에서부터 드러난다. 주인공 이즈미 신이치는 한국의 수인으로, 신이치의 오른손을 차지해 '오른쪽이'라 불리던 기생 생물은 '지킬 박사와 하이디'에서 이름을 딴 '하이디'로 바뀌었다. 

공격을 위해 모습을 드러내는 방식 역시 다르다. 오른쪽이가 몸통에 금속 무기를 장착한 형태로 인간을 공격했다면, 하이디는 수인의 얼굴 반쪽에서 뻗어 나오는 긴 촉수의 모양을 하고 있다. 연체동물의 다리 같기도, 오래된 고목의 가지가 뒤엉킨 모양 같기도 한 촉수 덕분에 액션의 쾌감 역시 다른 질감으로 제시된다. 날카로운 무기로 단칼에 내려치는 듯한 원작의 묘사와 달리, 《기생수: 더 그레이》는 휘두르고 감고 찌르는 액션의 모양이 두드러진다. 이는 좀 더 육체적 질감이 강조된 방식으로 보인다. 

원작에서 기생생물에게 온전히 뇌를 잠식당하지 않은 '변종'은 인간의 몸에 두 존재가 공존하는 형태를 취한다. 요컨대 이즈미 신이치는 오른쪽이와 직접 대화가 가능하다. 오른쪽이가 불리한 전투에서 신치이가 건네는 전략이 더해지는 방식으로 연대와 합공도 가능하다. 두 존재가 협동하고 때론 반목하는 데서 오는 유머 코드 역시 원작의 중요한 매력이었다. 

반면 《기생수: 더 그레이》는 수인과 하이디의 직접 소통을 막아둔다. 지킬 박사와 하이드가 서로의 모습을 볼 수 없듯, 하이디가 활약할 때 수인의 인격은 잠들어버린다. 다만 대화가 필요하다고 판단하는 경우 하이디는 무의식의 세계에서 수인에게 말을 걸고, 교환일기를 연상케 하는 편지글을 통해 의견을 교환한다. 여기에서 강우의 역할이 보다 중요해진다. 수인과 하이디 사이에서 메신저 역할을 하면서 두 존재 모두를 이해하는 인물이 돼가는 것이다. 

인간의 몸을 숙주 삼아 살고 인간을 먹는 본능에 충실한 존재. 오직 그것만이 목적이었던 기생생물들은 생존을 고민하다 역설적으로 인간을 닮아가기 시작한다. 이들이 관찰한 인간의 가장 큰 특징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점이다. 인간은 늘 조직을 꾸리고, 협력의 방식을 통해 무언가를 이루고자 한다. 따라서 기생생물들이 가장 처음 인간의 습성을 본떠 만드는 것은 자신들만의 공동체다. 

여기서 '사회적'이라는 개념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기생수: 더 그레이》 속 캐릭터들의 행동 방향은 조금씩 갈리게 된다. 기생생물들의 우두머리가 인간의 사회적 욕구를 모방해 욕망한 것은 권력이다. 그는 신흥 종교집단을 통해 기생생물들로 이뤄진 또 하나의 강력한 공동체를 꾸리고자 한다. 그것이 인간에 맞서는 유일한 길이라는 판단에서다. 수인과 하이디 그리고 강우의 방식은 타인을 믿고 공존을 모색하는 것이다. 이들은 수인이 어릴 적부터 좋은 어른으로서 곁에 있었던 형사 철민(권해효)을, 나아가 서로를 끝까지 믿는다. 

영화 《기생수: 더 그레이》의 한 장면 ⓒ넷플릭스 제공

인간과 조직의 상관관계 탐구 

이때 수인과 강우가 언제나 공동체의 안락함에 속하지 못한 채 살아온 인물들이라는 점은 아이러니하다. 심지어 수인은 인간이 저지른 잔혹한 범죄 피해에서 살아남은 인물이다. 어린 시절 아버지의 가정폭력을 견디다 못해 스스로 신고했던 어린 수인은 주변으로부터 "제 아빠를 신고한" 괴물 취급을 받아야 했다. 마트에서 일하다 당한 범죄는 자신의 무례를 생각하지 않고 그저 존중받지 못했다는 범인의 뒤틀린 자의식 때문이었다.  

그러던 수인은 기생생물과의 기이한 공존을 통해 온전한 인간으로서는 단 한 번도 실감하지 못했던 '함께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를 깨달아가기 시작한다. 조직에서 버림받았던 강우 역시 마찬가지다. 개인과 조직, 소통과 불통, 공존의 가능성과 불가능성. 결국 《기생수: 더 그레이》의 균형추는 이 사이에서 움직이면서 인간 존재 본질의 의미를 탐구하던 원작과는 또 다른 결로 무엇이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지에 대한 최선의 답을 찾고자 한다. 

오직 선에만 기반하지 않는 인간 본성이 빚는 비극, 사이비 종교집단으로 대표되는 그릇된 욕망의 나약한 집합체, 그럼에도 미약하게 발견되는 희망은 《부산행》(2016), 넷플릭스 오리지널 《지옥》(2021) 등을 통해 연상호 감독이 장르적 세계 안에서 꾸준하게 탐구해온 주제다. 바로 그 점에서 《기생수: 더 그레이》는 그 누구보다 창작자로서 연상호 감독의 개성이 강하게 탐지되는 작품이다. 현실세계를 기반으로 뛰어난 상상력을 입히는 기획은 늘 그의 작품을 기대하게 하는 배경임에 틀림없다. 

다만 극의 주제를 인물들의 대사로 직접 처리하는 방식, 인물 간 상이하게 들쭉날쭉한 연기 톤을 전체적으로 정리하지 않는 연출은 이번에도 일말의 아쉬움을 남긴다. 기생수에게 점령당한 인간에게 표정이 없다는 설정이 오히려 거의 유일하게 균일한 톤을 만들어주고 있는데, 이것이 연기 연출의 허점을 덮는 장치로 사용된 것인지 생각해 보게 된다. 원작 팬들을 환호작약하게 하는 동시에 시즌2를 염두에 둔 듯한 결말은 《기생수: 더 그레이》의 한층 더 나아간 미래를 기대하게 한다. 그것은 연상호 감독의 연출적 DNA 그리고 실사영화에서의 살아 움직이는 연기라는 강점이 안정적으로 공존하며 발휘되는 새로운 모색이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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