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진신고 하면 선처한다던 병무청의 배신…그리고 반전 [법원 앞 카페]

우종환 2024. 4. 21. 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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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이 끝난 뒤 법원 앞 카페에 앉아 쓰는 법원 출입기자의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때로는 소소하면서도 때로는 중요하지만 잊혀진 그런 법정 안팎이야기를 다뤄보려 합니다.

‘산업기능요원’ 흔히 병특이라고도 불리는 병역 대체복무제도입니다. 군복무 대신 병무청이 지정한 업체에서 일정 기간 복무하는 형태죠.

원칙적으로 산업기능요원은 반드시 신고한 업체 소속으로, 또 신고한 장소에서 복무해야 합니다. 만약 신고한 내용과 다르게 복무한 사실이 드러날 경우 병무청은 복무 기간을 연장하거나 고발까지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다 병무청이 이런 근무지 이탈을 ‘자진신고’하면 선처하겠다고 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 말을 믿고 한 산업기능요원은 자진신고를 합니다. 하지만, 병무청은 이 요원에게 원칙대로 연장복무 제재를 내려버립니다. 요원 입장에서는 황당하겠죠. 이 요원은 법정 문을 두드렸습니다.

근무지 이탈 자진신고하면 봐준다던 병무청

일러스트=챗GPT

A 씨는 지난 2022년 3월부터 서울 성동구의 한 IT 관련 업체에서 산업기능요원 복무를 시작했습니다. 신고한 업체명은 B 였고 데이터팀 소속으로 복무했습니다.

복무를 시작한 지 6개월 째인 같은 해 9월 A 씨는 병무청으로부터 알림톡을 하나 받았습니다.

업체장 지시로 부득이하게 위반행위를 한 사람이 위반행위를 한 날부터 1,217일 이내에 그 사실을 관할 지방 병무청에 신고한 경우 의무복무기간을 연장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 A 씨가 받은 병무청 알림톡

이에 A 씨는 자신이 처음 신고한 것과 다른 위반 근무를 했다는 내용을 담은 신고서를 병무청에 냈습니다.
신고자인 저는 현재 소속 부서 상사의 지시로 타 업체에 위치해있는 장비를 운용 중입니다. 첫 몇 주간은 면접 당시 안내 받은 업무를 맡아 수행했으나, 2월 중 기존 작업자가 코로나19 확진을 이유로 쉬게 되면서 제 소관 부서 상관의 지시를 받고 같은 건물 1층의 C 업체에 위치한 장비를 운용하게 됐습니다.

저는 현재 B 업체 데이터팀에 소속돼 있으며 어떠한 전직 처리나 파견 근무 신고 없이 데이터팀 상관의 지시에 따라 C 업체에 위치한 장비를 운용 중입니다. 최초 면접 당시 이 같은 직무는 안내 받은 사실이 없으며 자리 이동 지시 당시 C 업체가 B 업체와는 별도의 법인임을 고지 받은 사실도 없습니다. 현재 근무 방식이 복무 의무 위반임을 인지한 시점은 동료 직원을 통해 5월쯤에 인지하였으며 지금에야 신고합니다.

- A 씨가 낸 신고서
안 봐준다는 병무청 "연장복무해"
서울지방병무청 (사진=병무청)


병무청은 곧바로 B 업체를 상대로 실태조사를 진행했습니다. A 씨는 자진신고했으니 병무청 알림톡 내용대로 자신은 피해를 보지 않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같은 해 11월 A 씨는 병무청으로부터 아래와 같은 처분을 통보 받았습니다.

A 씨가 병무청으로부터 받은 처분

A는 산업기능요원으로서 편입 당시 병역지정업체인 B에서 근무하여야 함에도 전직·파견할 수 없는 C에서 근무한 상황이 확인되어 다음과 같이 행정처분을 하였음.

위반내용 : 편입 당시 병역지정업체가 아닌 다른 업체 근무
행정처분 : 연장복무 178일

A 씨는 황당했습니다. 자진신고하면 봐준다더니 뒤통수를 맞은 상황이 된 거죠. 결국 A 씨는 같은 해 12월 병무청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연장복무 처분을 취소해달라는 거였죠. 재판에서 A 씨 측은 자진신고하면 의무복무를 연장하지 않는다는 병무청 알림톡을 믿고 신고를 한 만큼 병무청 처분은 '신뢰보호원칙'에 어긋난다고 주장했습니다.
재판에서 나온 뜻밖의 반전

서울행정법원 (사진=연합뉴스)

재판 결과는 1년 4개월 만에 나왔습니다. 지난달 28일 서울행정법원 행정합의13부(박정대 부장판사)는 A 씨에게 내린 연장복무 처분을 취소하라고 선고했습니다. A 씨의 승소였습니다.

그런데 승소 이유가 뜻밖이었습니다. 병무청의 ‘배신’을 문제 삼은 게 아니라 애초에 ‘A 씨는 근무지 이탈 자체를 하지 않았다’고 판단한 겁니다.

병무청에 신고할 때는 ‘원래 근무해야 하는 B 업체가 아닌 C 업체에서 근무했다’고 주장했던 A 씨가 법정에서는 ‘C가 B의 페이퍼컴퍼니기 때문에 사실상 같은 업체’라고 입장을 바꾸긴 했습니다. 재판부는 이게 맞다고 봤습니다.

이번에는 병무청이 황당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근무지 이탈이라고 자진신고를 해서 실태조사까지 하고 제재 처분을 내렸는데 근무지 이탈이 아니라면, 애초에 병무청 처분이 문제가 아니라 실태조사부터 잘못됐다는 의미기 때문입니다.

법정에서 병무청 측은 “A 스스로 (다른 업체인) C에서 근무했다고 인정했고, B 업체 관련자들도 같은 진술을 했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법원은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C 업체가 B 업체로부터 공장 일부를 임차했다 해도 그 임차 공간 역시 A의 산업기능요원으로서 근무지인 공장 내부인 점, B 업체와 C 업체 사이 업무 공간이나 사무실 구분이 명확하게 돼 있지 않은 점, B 업체 대리가 C 업체 대표이사로 등기 돼 있고 C 업체 다른 이사들도 모두 B 업체 직원들인 점 등 특수성을 모두 고려해보면 A 씨가 B 업체 근무 장소와 전혀 별개의 장소에 위치한 C 업체 작업장에서 C 업체를 위해 근무했다고 단정할 수 없다.

- 1심 선고

또 재판부는 “A 씨에 대한 업무상 지휘와 감독도 B 업체 직원들이 했고, 급여도 B 업체에서 지급된 만큼 원래 신고한 업체인 B 업체에서 복무했다고 볼 수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자진신고하면 봐준다는 알림톡을 보내고도 연장복무 처분을 내린 건 재판부가 어떻게 봤을까요? 재판부는 이미 연장복무를 시킬 위반 자체가 없는 만큼 “신뢰보호원칙에 관한 A 씨의 나머지 주장은 더 나아가 살펴볼 필요가 없이 처분 사유가 인정되지 않고 위법하다”고 밝혔습니다. 봐줄지 말지 결정할 잘못 자체가 없었으니 봐줬어야 됐느냐 안 봐줬어야 됐느냐 자체를 따질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병역 의무자에게 신뢰보호원칙 지켜야

A 씨 승소로 끝난 1심 판결은 병무청이 항소하지 않으면서 지난 13일 그대로 확정됐습니다. 불합리한 연장복무를 하지 않아도 된 점은 다행이지만, 재판까지 거치면서 병무청은 두 가지 문제를 낳았습니다. 첫째는 A 씨가 근무지 이탈을 했다고 신고했더라도 실태조사에서 근무지 이탈이 아니라고 정확한 판단을 내리지 않은 점, 둘째는 설령 근무지 이탈이 맞다 해도 자진신고는 선처하겠다는 약속을 어긴 점입니다.

산업기능요원의 근무지 이탈 자진신고에도 연장복무 제재를 내린 건 이전에도 많은 논란을 낳았습니다. 한 예로 지난 2013년 A 씨처럼 내부고발을 하고도 병무청으로부터 무려 440일 연장복무 처분을 받아 국민권익위원회에 신고가 접수되는 일이 있었습니다.

병역을 대체하는 산업기능요원과 사회복무요원은 적은 급여를 받으며 병역 의무를 수행하고 있습니다. 굳이 A 씨가 받았던 일시적 알림톡이 아니라도 병역법 시행령에는 '산업기능요원이 업체 측 지시로 부득이하게 위반 행위를 한 경우 이를 신고하면 의무복무기간을 연장하지 않을 수 있다'는 조항이 있습니다. 잘못된 일을 신고하면 병무청으로부터 보호 받을 수 있다는 신뢰보호가 필요해 보입니다.

[우종환 기자 woo.jonghwan@mb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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