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장난 듯 우울해 보이는 아들…“버려도 되나요” [씨네프레소]

박창영 기자(hanyeahwest@mk.co.kr) 2024. 4. 21. 0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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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프레소-119] 영화 ‘애프터 양’

*주의: 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그 아이는 고장난 것처럼 우울해 보였죠. 환불받았어요.”

인간을 두고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사회에서 곧 매장당할 것이다. 입양은 물건을 사고파는 것과는 다르다는 사실을 누구든 알기 때문이다. 입양은 한 존재를 낳는 것과 다르지 않은 행위다. 이제 인간은 개나 고양이를 입양했다가 파양하는 것도 비인간적인 일이라고 여긴다.

‘애프터 양’은 사람의 쓰임새에 따라 만들어진 존재를 어디까지 존중해야 할지 묻는 작품이다. [사진 제공=왓챠]
그러나 ‘애프터 양’(2022)이 그리는 세계에서는 저런 말이 통용된다. 휴머노이드가 일상적으로 거래되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기 필요에 따라서 휴머노이드를 쉽게 사들이고, 필요가 없어지면 중고로 판매도 한다. 중고차를 반납하면 신차를 저렴하게 살 수 있는 ‘중고차 보상 프로그램’처럼 이 세계에선 ‘중고 휴머노이드 보상 프로그램’이 운영된다.

사실 ‘사람의 필요에 따라 만들어진 존재를 어디까지 존중할 것인가’라는 물음은 새롭지 않다. SF영화의 닳고 닳은 주제다. 하지만 ‘애프터 양’은 이 질문이 비단 로봇에 한정되지 않음을 보여주면서 인간이 자기 존재를 성찰할 기회를 부여한다.

제이크는 양의 고장으로 고민에 빠진다. 넉넉지 않은 형편 때문에 수리비 걱정부터 태산이다. [사진 제공=왓챠]
휴머노이드를 자유롭게 거래하는 세상
줄거리를 살펴보자. 제이크(콜린 파렐)네 집은 다인종으로 구성됐다. 아빠 제이크는 백인, 엄마는 흑인, 딸은 아시아인이다. 그리고 양(저스틴 H. 민)이란 이름의 아시아계 남자가 같이 산다.

사실 양은 인간이 아닌 휴머노이드다. 제이크가 아시아계인 딸을 입양할 때 함께 사들였다. 딸이 미국 사회에 보다 잘 정착하기 위해서는 도움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양은 딸에게 아시아인으로서 알아야 할 것을 알려주고, 또 딸의 감정적 필요를 채워주는 역할을 했다.

그런데 어느 날 양이 고장난다. 각종 수리센터를 돌아다녔지만 고칠 수 없다는 이야기만 한다. 그 과정에서 제이크는 양의 기억이 담긴 메모리칩을 발견하고, 그의 기억을 따라간다.

양은 제이크의 딸이 미국 사회에 적응하는 데 도움을 준다. 한 나무에 다른 나무의 가지나 눈을 따다 붙이는 ‘접’의 개념을 활용해 아시아인인 그녀가 백인인 제이크 집의 일원이 될 수 있음을 설명한다. 원래 어느 나무에서 왔는지 잊어서는 안 된다는 말도 강조한다. [사진 제공=왓챠]
무(無)가 없으면 유(有)도 없다
제이크는 양이 자기 집에 오기 전까지 많은 집을 거쳤음을 알게 됐다. 일종의 입양과 파양이 반복된 것이다. 초기에 양을 구매했던 사람은 “고장난 것처럼 우울해 보여서 환불받았다”는 말을 한다. 양은 그저 필요에 따라 선택받고, 필요가 없어지면 버림받는 존재였던 것이다.

제이크가 이를 몰랐던 것은 양이 한 번도 내색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많은 상처를 받는 가운데, 세상을 향한 증오를 쌓기보다는, 자신이 받은 상처를 남에게는 주지 않겠다고 결심한 듯하다. 그래서 양은 제이크네 딸이 학교에서 겪을 수밖에 없는 정체성 혼란을 부모보다도 더 잘 이해하고, 보듬는다. 나무를 접했을 때, 하나가 되는 과정을 보여주며, 딸 또한 다른 곳에서 왔지만 이 집과 하나가 될 수 있음을 알려준다.

제이크의 부인이 언젠가 모든 게 끝난다는 사실이 두렵지 않느냐고 물었을 때, 양은 답한다. “저는 끝난 다음에 아무것도 없다고 해도 괜찮아요. 무(無)가 없으면 유(有)도 없으니까요.” 숱한 이별을 통해서 양은 헤어짐을 덤덤하게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식구들은 몰랐던 그의 모습. 그는 여성과 사랑하고 있었다. [사진 제공=왓챠]
그는 나의 눈밖에서도 존재한다
사실 제이크는 양을 도구로 간주했다. 양을 수리하기 위해 뛰어다닌 동력이 된 건 양에 대한 그리움은 아니었다. 대신 가족의 필요를 채워야 한다는 사명감이 가득했다. 자기 딸의 외로움을 채워줄 로봇이 없어진다는 것을 아쉬워하는 마음이 컸다.

그러나 제이크는 양의 기억을 더듬는 과정에서 알게 된다. 자신이 보는 ‘쓰임새’만이 양의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말이다. 양은 누군가를 사랑했고, 버림받았을 때 아파했다. 목적을 가지고 자기를 선택했을 뿐인 제이크네 가족을 진심으로 아꼈다. 제이크는 양의 삶이 자신의 필요를 채우는 것보다 훨씬 더 넓은 범위에 걸쳐 존재했음을 깨닫는다.

양은 제이크네 가족과 만나기 전부터 다양한 모습으로 존재해왔다. [사진 제공=왓챠]
영화는 휴머노이드를 넘어 인간관계 전반에 대해 얘기한다. 우리는 모두 자기 중심적이기 때문에 내 눈앞에 보이는 모습이 그의 전부라고 여기기 쉽다. 그는 내 기분을 좋게 하거나, 불쾌하게 하거나, 나를 피곤하게 하는 사람이 된다. 나의 필요에 따라 그의 존재가 재단되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그는 나와 만나는 장소와 시간을 넘어 더 큰 영역에서 살아간다. 누군가를 도구로만 여기는 피상적인 관계를 피하기 위해선 상상력이 필요한지도 모른다. 다른 시간과 장소에선 그가 어떻게 존재하는지 적극적으로 그려보는 것이다.

‘애프터 양’ 포스터 [사진 제공=왓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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