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10년, ‘정쟁 아닌 참사’로 응시할 때 다음 장이 열린다
피디수첩 ‘세월호 10년’
지난 4월16일 문화방송은 세월호를 기억하는 특별한 시간을 가졌다. ‘뉴스데스크’를 팽목항에서 진행하는가 하면, ‘피디(PD)수첩’에서 ‘세월호 10년의 기억, 밝혀진 것과 묻힌 것’(1414회)을 방송하였다. 심야에는 다큐멘터리 ‘봄이 온다’를 내보냈다.
세월호 10주기를 맞았지만, 여전히 트라우마이다. 참사를 둘러싸고 온갖 불신과 혐오가 뒤엉켜 있기 때문이다. 지난 10년간 참사 원인과 구조 실패에 관한 국가적인 차원의 조사가 수차례 있었다. 4·16세월호참사 특별조사위원회(특조위), 세월호 선체조사위원회(선조위), 사회적참사 특별조사위원회(사참위)를 비롯해 검경합동수사본부, 특별수사단, 특별검사 등이 꾸려져 총 아홉번의 조사가 진행됐다. 하지만 여전히 세월호 참사가 왜 일어났고, 왜 구하지 못했는지 합의된 결론이 없다. 그 결과 ‘알 수 없다’ 혹은 ‘믿을 수 없다’는 의혹이 팽배해 있다. ‘무엇을 더 밝혀냈는지 모르겠다’는 무용감은 ‘피곤하고 지겹다’는 냉소를 불러일으킨다. 나쁜 사회적 선례를 남긴 셈이다. 그런데 과연 세월호 참사에 관한 그 많은 조사들은 모두 헛수고였을까? 세월호 10주기를 맞아, 정말로 확인된 것은 무엇이고, 기각된 것은 무엇인지를 짚고 가야 한다. ‘피디수첩’(1414회)은 이를 위해 꼭 필요한 시간이었다.
비난 빌미 제공한 ‘열린 안’
잔잔한 바다에서 세월호가 옆으로 기울면서 급격하게 침몰했다. 일본에서 18년 동안이나 사용한 낡은 배를 사들인 청해진해운이 4·5층을 올리는 무리한 증개축으로 좌우 균형이 맞지 않게 배를 뜯어고쳤다. 여기에 적정 무게의 두배가량 과적을 하였고, 이를 감추기 위해 평형수를 뺐다. 그 결과 배의 복원력이 아주 낮은 상태였는데, 맹골수도를 지날 무렵 갑자기 방향을 틀다가 왼쪽으로 기울었다. 갑판 위의 화물들은 고박이 제대로 안 된 상태로 18도 이상 기울자 우르르 쏟아져 서로 부딪치면서 더 쉽게 균형을 잃었다. 격실 수밀문 7개가 모두 열려 있었던 것도 배가 약 100분 만에 빠르게 가라앉도록 한 원인이다. 기관실의 각 구역을 막는 수밀문은 항해 중 반드시 닫혀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인양된 세월호의 수밀문은 모두 열려 있었다. 수밀문만 닫혀 있었더라도, 세월호는 옆으로 누운 상태에서 하루 이상 떠 있었을 수 있었고, 구조할 시간을 벌 수 있었다.
이것이 참사 초기부터 밝혀지고 확인되어온 내인설이다. 갑자기 방향을 틀었던 급변침의 원인으로 조타장치 부속인 솔레노이드 밸브의 고착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하지만 사참위에서 외부 조사 없이 최종 기각해버렸다. 솔레노이드 밸브 고착(조타장치 부속의 고장) 때문이 아니라 하더라도, 내인설은 부정되지 않는다. 배의 복원력이 매우 떨어져 있는 상태에서 작은 폭의 변침으로도 배가 균형을 잃고 옆으로 기울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네덜란드 해양연구소 ‘마린’과 대한조선학회 역시 내인설을 지지한다.
한편 외력설이 있다. 세월호가 잠수함과 부딪혀서 침몰했을 가능성이다. 선체 인양 전에 네티즌 ‘자로’ 등에 의해 주장되었지만, 배가 인양된 후 선조위 조사로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하지만 2018년 선조위는 외력설을 폐기하지 않고, 내인설과 더불어 ‘열린 안’(외력설)을 채택한다. 그 결과 마치 명확한 결론이 없는 것 같은 혼선을 자초했다. 이런 업보는 이후 사참위로 이어진다. 사참위는 2022년 6월 “외력으로 침몰했을 가능성도 있지만, 다른 가능성을 배제할 정도에는 이르지 못했다” “외력 가능성을 조사했으나, 외력이 침몰 원인인지 확인되지 않았다” 등의 애매한 문구로 마침표를 찍었다. 그리고 명확한 원인을 못 밝히고 최종 결론을 낸 것에 대해 위원장이 사과하였다. 보고서에는 훌륭한 내용도 많았다. 하지만 ‘진상규명이 되지 않았다’는 느낌과 ‘더는 규명할 진상도 없는데 공연히 세금만 낭비했다’는 비난을 불러왔다.
사회적 합의 막은 두개의 결론
선조위와 사참위는 왜 애매한 결론을 낸 걸까. 세번의 조사위원회 모두 정치적인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박근혜 정부에서 운영된 특조위는 정권의 방해로 제대로 된 활동도 못 한 채 1년6개월 만에 종료되었다. 정권 내내 세월호를 추모하거나 진실을 알려는 사람들은 감시와 억압을 받았다. 그사이 제한된 정보를 짜깁기한 무수한 추측과 음모들이 난립했다. 마침내 박근혜 대통령이 탄핵되고, 13일 뒤 세월호가 인양되었다. 문재인 정부 출범을 앞둔 시점에 선조위가 활동을 시작했다. 선조위는 인양된 선체와 블랙박스 등을 바탕으로 1년4개월 동안 외력설을 비롯해 그동안 제기되었던 온갖 의혹에 대한 조사를 벌였다. 조사 결과 내인설이 유력했지만, 정치적인 진영 논리가 작동했다. 선조위는 내인설을 인정하면서도 ‘여러가지 원인을 더 보자는 취지’라며 외력설을 폐기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은 패착이었다. ‘피디수첩’에서도 “내인설로 결론짓고, 외력설은 소수의견 정도로 갈음했어야 한다”는 정현 카이스트 교수(해양시스템공학)의 의견 등을 인용하며, 아쉬움을 피력한다. 두개의 결론은 국민적 합의에 이르지 못하게 한 원인이 되었고, 유족들의 진상 요구 목소리는 더욱 거세졌다. 유족단체들은 전면 재조사를 요구하며, 특별수사단 구성을 통해 국방부·국가정보원·국군기무사령부 등 전방위적인 추가 조사도 벌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후 선체 조사에 국한되었던 선조위보다 조사 범위를 사건 전체로 넓히고 가습기 살균제 의제와 묶어서 사참위가 꾸려졌다. 사참위는 3년 반 동안 외력설을 입증하기 위해 집착에 가까운 노력을 쏟았다. 그러나 네덜란드 해양연구소 ‘마린’, 대한조선학회 등 외부 기관에 의해 외력설은 사실상 기각되었다. ‘주간 뉴스타파’의 ‘세월호, 기각된 의혹과 확정된 사실’에서 김성수 기자는 애초에 입증하고자 했던 가설이었던 외력설을 기각해버릴 경우, 사참위가 그간 쏟아부은 노력과 그 과정에서 얻게 된 성과 등을 모두 보고서에 싣지 못할 것을 우려하여, 사참위 최종 보고서에 애매한 문구와 함께 외력설이 남게 된 것이라고 전했다.
세월호 기록팀 ‘진실의 힘’이 펴낸 책 ‘세월호, 그날의 기록’의 개정판 ‘세월호, 다시 쓴 그날의 기록’이 4월 출간되었다. 저자들은 이런 사참위를 매섭게 비판한다. “세월호 침몰 원인 조사가 외력에 대한 가능성, 잠수함 충돌 가능성을 찾는 데 집중됨으로써 침몰 원인을 보다 깊이 있게 종합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시간과 자원이 그쪽으로 많이 몰렸다. 이런 것을 ‘기우제식’ 조사라고 하는데, 과학적인 가설로 외부 충돌설을 기각할 수 있는 조건이 충분히 마련되어 있음에도 외력설을 기각하는 대신 잠수함이 등장할 때까지, 비가 내릴 때까지 기우제를 지내듯 조사를 계속한 것이 큰 아쉬움으로 남는다.” 그리고 “‘잠수함 충돌설은 그동안의 오랜 과학적 검증을 통과하지 못했다. 그래서 이제 외력이나 잠수함과 같은 개념은 세월호 침몰에 관한 설명에서 삭제할 수 있다’는 것이 결론이다”라고 못박는다.
☞한겨레S 뉴스레터 구독하기. 검색창에 ‘한겨레 뉴스레터’를 쳐보세요.
☞한겨레신문 정기구독. 검색창에 ‘한겨레 하니누리’를 쳐보세요.
무능하면서 유능했던 국가
왜 구하지 않았을까. 세월호 사건에서 가장 어이없던 것이 이 대목이었으리라. 배가 기울었을 때 선장이 퇴선 명령을 내려야 했지만 ‘가만있으라’는 잘못된 명령을 내렸다. 선원이 아닌 승객의 신고를 받고 해경이 출동했지만 퇴선 지시는 선장의 권한이라며 적극적으로 승객 탈출을 시도하지 않았다. 근처에 승객 구조를 도울 선박들도 있었지만 아무도 퇴선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이후 벌어질 불상사를 책임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한편 사고를 인지한 청와대에서는 대통령에게 보고할 영상을 내놓으라고 해경에 독촉했다. 해경 지휘부는 청와대에 보낼 영상을 현장에 요구할 뿐 현장을 파악하고 제대로 된 구조 지시를 내리지 않았다. 구조 주체가 없었다. 일부러 안 구한 것은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구하지 않은 셈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구조 실패와 관련해 유죄 선고를 받은 사람은 현장에 가장 먼저 도착한 해경 123정 정장이 유일하다. 세월호 참사의 초동 구조 실패는 국가적 위기관리 체계의 총체적 실패였다. 굉장한 음모 따위는 없었다. 믿기지 않지만 이것이 전부였다.
“세월호 참사를 겪으며 우리는 국가의 두 얼굴을 목격했다. 두 얼굴의 국가는 정권에 관대했고 피해자에게 가혹했다. (…) 국가는 한없이 무능하다가도 놀랄 만큼 유능했다. 재난 대응을 지휘하여 인명을 구하는 역할에 관심조차 없었지만, 그 책임을 회피하려 여론을 조작하고 피해자 정보를 수집하는 일이나 진상규명 방해를 지휘하는 역할에는 비할 수 없이 성실했다. 진도 앞바다와 팽목항에서는 정부의 그 누구도 컨트롤타워를 자임하지 않았지만, 광장, 언론, 국회 등 유가족의 행동을 막아야 하는 곳에서는 지휘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국가의 역량은 선택적으로 그리고 편향적으로 발휘되었다.”(사참위 종합 보고서) 명징한 요약이다.
‘피디수첩’은 세월호 참사가 무엇을 바꾸었고 무엇을 바꾸지 못했는지를 짚으며 프로그램을 마친다. 사참위 보고서가 나온 뒤 이태원 참사와 오송 지하차도 참사가 발생했다. 세월호 참사 뒤 매뉴얼이 강화되고 중앙재난안전통신망이 마련되었다. 하지만 작동하지 않았다. 결정해야 될 사람들이 결정하지 않고 책임져야 할 사람들이 책임지지 않으려는 관료 시스템의 풍토는 여전했다. 어쩌면 이것이 핵심이리라. 그렇다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은 것인가. 그렇지 않다. 한가지는 분명하다. 세월호는 처음 가는 길이었다. “재난도 진상이 규명되어야 하는 것이고, 가해자의 사법적 책임을 지켜보고, 피해자도 사회적 추모를 받을 수 있는 존재임을 깨닫게 된 첫 사례였다.”(유해정 재난피해자권리센터장) 그것을 깨닫기 위해 지난 10년 동안 유가족과 시민사회가 처절하게 뒹굴며 싸우며 시행착오를 겪었다. 지난 10년은 헛되지 않았다. 편향과 반편향을 넘어, 참사를 정쟁이 아닌 참사로 바라볼 때, 비로소 다음 장이 열릴 것이다.
대중문화평론가
‘씨네21’ 영화평론가로 출발하여 티브이 드라마, 예능 등을 두루 평론한다. 인권·역사·여성·장애·인구·성·계급·권력 등 사회과학 전반에 관심이 많다. 원래 전공은 의학·보건학이다.
Copyright © 한겨레신문사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 윤, G7 정상회의 초청 못 받았다…6월 이탈리아 방문 ‘불발’
- ‘윤석열은 생각하지 마’…한동훈 총선 메시지 ‘폭망’ 이유
- 의대 증원 1000~1700명으로 줄 듯…물러선 윤 정부
- 홍세화의 마지막 인사 “쓸쓸했지만 이젠 자유롭습니다”
- “봄인데 반팔...멸종되고 싶지 않아” 기후파업 나섰다
- 이란-이스라엘 공격 주고받기, 체면 살리고 피해는 최소화
- 이종섭의 ‘자백’, 윤석열 대통령을 향한다 [논썰]
- 조국·이준석·장혜영 등 야6당…‘채 상병 특검 촉구’ 첫 야권연대
- 윤 대통령 지지율 23% ‘최저’…“조기 레임덕, 더 떨어질 수도”
- “나는 장발장, 홍세화 선생은 등대였다”…빈소 찾는 발길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