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태 기자의 책에 대한 책] "인간의 삶에 가장 밀착된 강력한 사물은 '종이'였다"

김유태 기자(ink@mk.co.kr) 2024. 4. 19.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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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가 태어나면 배냇저고리를 입히고, 노인이 죽으면 수의를 입힌다.

책에 따르면, 그러므로 종이란 인간의 두 번째 피부, 즉 '인공 피부'란 은유가 가능해진다.

역사, 종교, 철학, 과학, 상업은 전부 종이 위에서 시작됐으며 인류의 어떤 사물도 종이 이상의 생명력을 확보하지 못했다.

하지만 종이는 이중적인 의미에서 '가장 날카로운' 사물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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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필원고부터 대성당 스케치까지… 종이의 위대한 힘

아기가 태어나면 배냇저고리를 입히고, 노인이 죽으면 수의를 입힌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인간은 옷과 함께한다.

그런데 의복보다 인간의 삶에 더 '밀착'된 사물이 있다. 이 사물은 사람의 한 생애에 딱 달라붙어 있다. 책 '페이퍼 엘레지'의 저자 이언 샌섬에 따르면 그건 바로 종이다.

왜 그런가. 한 인간의 생멸 과정은 전부 종이 위에 적힌다. 출생신고서나 사망신고서 같은 관공서 서류만 뜻하는 게 아니다. 아이는 종이를 만지며 말과 글을 배우고 성장 과정이 모두 기록된다. 생활기록부, 수능성적표, 자기소개서도 종이가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뿐인가. 취업이나 이직에도 종이가 필요하다. 결혼할 때 한 장, 이혼할 때도 한 장. 내밀한 심경을 담아낸 일기, 유언장이나 유서까지 전부 종이 위에서 행해진다. 의사의 진단, 판관의 언어, 학자의 연구도 종이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렇다. 한 사람의 사유와 실체는 종이에 남겨진다. 저자는 그래서 이렇게 쓴다. "종이는 한 사람의 과거를 보는 열쇠다."

책에 따르면, 그러므로 종이란 인간의 두 번째 피부, 즉 '인공 피부'란 은유가 가능해진다. 심지어 종이는 내면의 거울이기도 하다.

거장의 걸작 육필 원고부터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캔버스, 바르셀로나의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 등 모든 예술은 종이 한 장에서 시작됐다. 역사, 종교, 철학, 과학, 상업은 전부 종이 위에서 시작됐으며 인류의 어떤 사물도 종이 이상의 생명력을 확보하지 못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종이는 힘이 없다. 종이는 구겨지고 찢어지며 잘 젖는다. 연필과 지우개가 아닌 이상 쓰고 나면 수정과 변형도 쉽지 않다. 하지만 종이는 이중적인 의미에서 '가장 날카로운' 사물이기도 하다. 우리는 망가지기 쉬운 연약한 종이에 손을 베고 상처가 아물 때까지 며칠 고생하기도 한다. 육체의 통증만이 아니다. 우리의 정신도 종이에 베는 일이 허다하다. 훌륭한 글일수록 사람의 마음을 자주 할퀴기 때문이다. 그건 종이와 그 종이에 담긴 내용이 가진 강력한 힘이다.

"종이의 최대 강점은 시간과 공간을 무너뜨리는 데 있다"고 이 책은 사유한다. 종이는 가보지 않은 장소에 사람을 도착하게 하고, 본 적도 없는 풍경 속에 읽는 사람을 위치시키기 때문이다.

이미 죽어버린 저자의 목소리가 종이에 기록되며 지나간 과거와 사라진 공간을 회복시킨다. 시간과 공간의 이동이 갖는 힘을 인지한 창작자들은 인생의 전부를 작업에 바치기도 한다.

묵직하고 두꺼웠던 종이는 사라져간다. 종이는 점점 낡고 희귀한 사물로 변해간다. 그러나 이 시간에도 누군가는 심각한 종이 중독증에 '시달리는' 중이다. 종이 냄새가 나는 전자책 리더기가 개발되더라도 저 탐서벽은 사라지지 않으리라고 저자는 진단한다.

[김유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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