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미국→일본 380년 식민지배… 상처 속 다시 꽃 피는 동방무역 중심[장은수의 도시와 문학]

2024. 4. 19. 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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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은수의 도시와 문학 - (35) 필리핀 마닐라
마닐라의 대표 관광지 중 하나인 인트라무로스 유적 산책로. 게티이미지뱅크

1565~1946년 외세에 점령
亞·유럽·아메리카 문화 혼재
이도저도 아닌 정체성만 남아`

힘겨운 독립뒤 마르코스 독재
피플파워로 철권통치 끝냈지만
양극화 불안 등 그림자는 여전

닉 호킨 작품 ‘어느 필리핀…’
독립 위한 불굴의 정신 담아

“내가 누구인 것을 나는 압니다. 그게 구원의 시작이 아닙니까?”

‘어느 필리핀 예술가의 초상’(1950)에서 필리핀 현대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닉 호킨은 되묻는다. 이 작품은 마닐라 인트라무로스 지역에 있는 유럽풍 낡은 저택을 배경으로 칸디아와 파울라 자매, 아버지 돈 로렌조 마라시간, 파울라의 연인 토니 하비에르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필리핀 역사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7107개 섬들로 이루어진 이 나라는 푸른 바다 위에 진주를 흩뿌린 듯한 모습을 하고 있다. 여러 종족과 언어로 갈라져 강력한 구심점 없이 살아오던 필리핀인들은 10세기 이후 중국과 동남아시아 무역이 활발해지면서 마닐라 등 항구 도시를 중심으로 역사에 등장했다.

그러다 1521년 스페인 마젤란이 이 땅을 ‘발견’하고, 스페인 황태자 펠리페의 이름을 따서 필리핀(펠리페의 백성들)이라는 이름을 붙이면서 역사의 물줄기가 달라졌다. 1565년 스페인 식민체제에 필리핀 전역이 완전히 편입되었고, 1946년까지 무려 380여년간 이어지는 기나긴 식민 통치 기간이 시작됐다. 스스로 정체성을 이루지 못하고 외부에서 강제로 정체성을 부여받았다는 사실은 필리핀인들의 가슴에 큰 상처를 남겼다. 스페인, 미국, 일본을 거치면서 짓밟혀 고유함을 빼앗기고 뒤섞여 잡종이 된 문화는 정체성 불안을 가져왔다. 아시아이면서 아시아가 아니고, 유럽의 지배를 받았으면서 유럽적이지 않고, 미국의 영향을 받았으면서 미국적이지 않은 키메라 정체성이 형성된 것이다. 필리핀 문학이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 주변을 맴도는 이유이다.

오늘날 마닐라는 인구 약 1300만 명에 이르는 메가시티다. 도시 이름은 ‘마이닐라’, 즉 ‘부레옥잠이 가득한 곳’을 뜻하는 타갈로그어에서 유래했다. 동방 무역의 거점이 필요했던 스페인은 마이닐라를 정복한 후, 1571년 그 위에 요새를 짓고 마닐라라는 이름을 붙였다. 총독 관저, 성당, 대학 등이 몰려 있는 인트라무로스, 현재 ‘올드 마닐라’라 불리는 지역은 1898년까지 스페인 식민 통치의 중심부였다. 작품의 낡은 저택은 그 유산을 상징한다.

16세기 말 마닐라는 세계 최초의 글로벌 무역항이 되었다. 마닐라와 멕시코 아카풀코를 잇는 정기 무역선 마닐라 갤리언은 그 상징이었다. 멕시코와 페루에서 채굴된 은이 태평양을 건너 마닐라에 와서 중국의 비단, 인도의 보석, 중동의 양탄자, 동남아의 향료 등과 교환되었다. 아시아, 유럽, 아메리카를 잇는 국제 무역 네트워크가 완성된 것이다.

19세기 초, 멕시코가 독립하면서 갤리언 무역이 쇠퇴하자 식민 정부는 필리핀에 담배, 사탕수수, 마닐라삼 등을 재배하는 플랜테이션 농장을 건설했다. 소수 지주는 스페인과 결탁해 부를 누렸으나, 대다수 민중은 강제 노동에 시달리면서 수탈당했다. 높은 세금, 강제 노역, 강제 개종 탓에 산발적으로 이어진 봉기가 불붙기 시작했다.

인트라무로스 유적 산책로 교회 앞 수도승 동상. 게티이미지뱅크

독립 투쟁을 이끈 인물 중엔 대지주의 자녀가 많았다. 농장 경영으로 부를 축적한 지주들이 자녀들을 스페인, 프랑스, 독일 등으로 유학 보냈는데, 선진문물을 접한 이들이 각성해 계몽 지식인 ‘일루스트라도스’가 되었다. 필리핀 국부 호세 리살도 그중 하나였다. 독립 투쟁에 나섰다가 체포된 그는 1896년 처형장으로 가면서 ‘마지막 작별’이라는 유명한 절명시를 남겼다. “내 영원히 사랑하고 그리운 나라/ 필리핀이여, 마지막 작별의 말을 들어다오./ (중략)/ 저기 노예도 수탈도 억압도/ 사형과 처형도 없는 곳/ 누구도 나의 믿음과 사랑을 사멸할 수 없는 곳/ 하늘나라로 나는 가노라.”

리살의 죽음은 끝이 아니었다. 그의 소설 ‘나를 만지지 마라’(1887)를 읽고 각성한 안드레스 보니파시오의 무장 투쟁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마닐라의 차이나타운 비논도를 배경으로 종양과도 같은 식민체제의 모순을 폭로한 작품이다. 1896년 8월, 보니파시오가 주동한 무장 혁명이 일어나서 공화국 수립을 선언했다. 이 혁명에서 두각을 나타낸 사람이 필리핀 초대 대통령 아기날도였다.

혁명은 미국의 배신으로 실패로 돌아갔다. 1898년 미국-스페인 전쟁이 끝난 후, 파리조약에 따라 필리핀을 넘겨받은 미국은 독립 약속을 저버리고 필리핀 직접 통치에 나섰다. 이에 반발한 혁명정부와 미국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다. 미국은 야만적 전략을 채택했다. “그들을 죽이고 태워버려라. 무기를 들 수 있는 자는 모두 죽여라.” 1902년까지 필리핀인 20만 명이 학살당했다. ‘전쟁을 위한 기도’에서 마크 트웨인은 풍자했다. “주님, 꽃 피는 벌판을 그들의 시체로 가득 채우도록 도와주소서.” 필리핀을 점령한 미국은 스페인 통치의 유산을 빠르게 지워나갔다. 스페인 300년 통치의 유산 대신 미국식 양키 문화가 필리핀인을 다시 혼란에 빠뜨렸다.

‘어느 필리핀 예술가의 초상’에 나오는 아버지 마라시간은 아기날도와 함께 필리핀 혁명에 뛰어든 적이 있는 늙은 화가다. 무력하게 방 안에 칩거하다 마지막 힘을 기울여 스페인풍 자화상을 완성한다. 이 초상화는 스페인 식민 통치의 유산인 동시에 숱한 고난에도 굴하지 않고 독립을 쟁취하려는 불굴의 정신을 표상한다.

거액을 주고 이 그림을 사 오라는 한 미국인 부자의 의뢰를 받은 토니는 마닐라 빈민가 톤도 출신으로, 미국에 기대어 인생을 바꿔 보려는 신세대를 상징한다. 두 딸이 작품 팔기를 강하게 거부하는 가운데, 그는 초상화를 볼 때마다 자신을 비웃는다고 느낀다. 민족 정체성을 상실했다는 심리적 불안이 낳은 신경증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토니는 이 집이 “최초로 느낀 구원이며 고향”이라고 고백하고, 파울라와 함께 집을 나온다.

작가는 1946년 독립 이후, 정신적 갈등과 혼란에 빠져 방황하는 필리핀인들에게 미국적인 것도, 스페인적인 것도 아닌 곳에서 필리핀 정체성 회복과 주체성 정립을 주문하고 있는 셈이다. 1896년 혁명의 꿈을 담은 초상화는 그 이정표를 보여준다. 그러나 필리핀 현대사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제대로 답하지 못했다. 지지부진한 토지 개혁, 극단적 빈부 격차 등으로 속이 곪아갔고, 독재와 권위주의가 그 길을 파괴했다.

마차가 인트라무로스에 위치한 스페인 식민시기 지어진 건물을 지나고 있다. 게티이미지뱅크

‘에르미따’에서 프란시스코 시오닐 호세는 한 고급 창녀의 일생을 통해 필리핀 현대사의 모순을 격렬하게 고발한다. 메스티소는 마닐라의 부유한 메스티소 집안 출신의 사생아다. 그녀는 1941년 일본군이 침략했을 때 일본 병사에게 성폭행당해 태어났다. 그녀는 묻는다. “매춘이 양심의 가책이나 도덕적 신념 없이, 생존 때문이 아니라 오직 돈을 벌기 위해 하는 행위라면, 누가 진짜 매춘부일까요? 주위를 돌아보세요. 가면을 쓰고 인격자 노릇을 하는 사람들이지요.” 가면을 쓴 인격자들이란, 체면을 위해 그녀를 버린 집안, 그녀의 몸을 사들인 의원, 관료, 기자, 군인 등이다. 작가는 이들이 식민 세력에 필리핀을 팔아먹은 진짜 매춘부라고 말하는 것이다.

1965년 집권해 20년 동안 피의 통치를 이어간 페르디난드 마르코스의 부패 정권은 이 ‘가면을 쓴 인격자’의 집합체였다. 1986년 마르코스의 음모에 분노한 시민들이 마닐라 한복판 에드사 대로에 모여들어 마르코스 퇴진을 요구했다. 한국, 태국, 인도네시아 등 아시아 민주주의 혁명의 선구가 된 피플파워 혁명의 시작이었다. 현재 마닐라는 무역 및 금융의 허브로 동남아에서 가장 빠르게 발전하는 도시로 변했다. 그러나 오랜 식민 통치와 독재 정권의 유산, 양극화에 따른 불안, 권위주의적 통치의 귀환 등이 이 도시에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저기 노예도 수탈도 억압도/ 사형과 처형도 없는 곳”이라는 호세 리살의 노래가 여전히 필리핀 민중의 가슴을 울리고 있다.

출판평론가

■ 용어설명 - 파리 조약

1898년 12월 10일 미국-스페인 전쟁 결과, 미국과 스페인이 체결한 조약이다. 스페인이 쿠바 독립을 인정하고 푸에르토리코, 서인도 제도, 괌, 필리핀 제도 지배권을 미국에 양도하는 대가로 미국이 2000만 달러를 지급하는 것이 주요 내용이다. 미국은 필리핀을 아시아 정복과 지배의 첨단 기지로 삼으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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