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진강 시인' 김용택의 고향 집에서 오간 사사로운 이야기

리빙센스 2024. 4. 19. 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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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재훈 시인이 만난 문인의 서재 7

고향의 봄, 섬진강 큰 형님

강물처럼 변하지 않는 사람, 강물처럼 변화하는 사람, 앞마당의 복수초처럼 피어 있는 사람. 40년 이상 보아온 김용택 시인은 항상 그 자리에서 찾아온 이들을 반겨준다. 그는 고향인 전북 임실에 한옥을 중심으로 벽돌집을 지어 가족과 살고 있었다. 보이는 듯 보이지 않은 듯,서재와 살림집이 서로를 보고 있다. 건축에 사람의 혼이 스민다. 집은 사람이다. 사람은 시다. 잠시 김용택의 시 속으로 걸어간다. 그곳에 소박하지만 놀라운 세상이 있었다.

새벽 4시에 하루의 문을 연다

"새벽 4시에 일어나서 하루를 시작합니다. 일찍 자니까, 일어나서 잠을 좀 몰아 내고 컴퓨터 앞에 앉아 포털사이트를 다니면서 이런저런 검색을 하지요. 우선 각종 신문의 뉴스를 먼저 보고, 인터넷 서점에서 신간 검색을 해봅니다. 사고 싶은 책도 있고 그냥 건너뛰는 책도 있는데, 주로 시집이지요. 그렇게 하루를 시작합니다. 그리고 6시경이 되면 카메라를 메고 밖으로 나가요."

김용택 시인은 사진에 관심이 많다. 아침에 일어나면 카메라를 들고 동네 한 바퀴를 걷는다. 그 동네에는 섬진강이 흐른다. 집 주변으로 세 그루의 느티나무, 앞마당, 뒷마당에 꽃들, 밭에 내려앉아 노는 까치, 동네 이장이 가꾸는 산수유 밭, 동네 주민, 수달, 청둥오리, 원앙, 개구리와 올챙이, 뱁새 등등 아주 많은 친구가 반겨준다. 어떤 새들은 시인 앞으로 날아와 포즈를 취해 준다고 한다. 40여 년의 교직 생활을 퇴직하고 나서 생긴 오래된 습관이다. 김용택 시인의 하루는 방금 뜯어낸 쌀자루처럼 꽉 차 있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을 다 담아 놓은 마당의 돌확 같았다. 그의 집을 보여주는 손길이 다정하다.

"이 집을 지을 때, 건축가의 도면을 놓고 아내가 깊이 관여했어요. 여기저기 전부 아내의 생각과 정성이 들어갔어요. 마당에 돌 하나까지 집사람, 정말 집, 사람이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입니다. 어머니의 혼이 있는 한옥을 중앙으로 우리 거처는 서재와 살림집으로 나뉘는데, 주위의 사물과 잘 어울리게 하려고 노력했지요. 앞에서 보면 한옥이 잘 보이고 벽돌집은 좀 숨어 있는 것 같기도 하지요. 그리고 후정, 뒷마당에 정성을 들였어요. 작은 연못은 자연과 가까워서 저절로 물이 차고 저절로 빠져요. 연못에 올챙이들이 알을 까고 하나, 둘 나오기 시작하네요. 우리 집 짓기와 까치 집 짓기가 많이 닮았어요."

까치 부부와 용택 부부

김용택 시인은 요즘 까치 부부를 유심히 바라본다. 까치가 나뭇가지를 물고 날아가 느티나무 위에 집을 건축하는 모습은 경이로웠다. 새털과 이런저런 것들로 인테리어도 한다. 까치 부부와 김용택 시인 부부가 임실에서 집을 짓고 살고 있다. 살림집에는 산에서 내려오는 물길을 자연 그대로 놔둔 샘이 있다. 물이 흐르는 이 샘이 살림집의 쉼표이다. 큰 숨을 쉬고 샘을 보면 물이 흘러가는 방향처럼 그렇게 살고 싶은 생각이 든다.

옛집을 그대로 복원한 한옥에는 '회문재(글이 돌아온다)'라는 현판이 붙어 있다. 그가 어린 시절을 보낸 회문재는 문학관이자 찾아오는 사람들을 위한 사랑방인 셈이다. 뒷산 봉우리 이름이 회문봉이다. 이 마을을 감싸고 있는 자연적 소산이 글을 쓰는 사람을 품고 있고, 태어나게 했다. 그가 바로 김용택이다. 평북 구성의 소산 아래에서 김소월이 살았듯이, 진매마을로 잘 알려진 김용택의 생가에는 그가 어린 시절부터 책 읽고, 공부했던 공간이 있다. 작은 공간이다. 회문재의 중앙이다. 마치 부엌의 아궁이처럼 이곳에서 꼬마 용택이 김용택 시인으로 성장하게 된다. 따뜻한 부엌이었고 마당이 었던 다감한 모친은 얼마 전에 작고하셨다. 마당의 감나무는 모친의 손길을 잘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아주 오래전에 말려 놓은 감을 하나, 둘 선배와 빼먹었던 생각이 난다.

하루에 한 문장을 본다

점심을 먹고 잠시 쉽니다. 낮잠을 잘 때도 있고, 4시부터 일어나 움직였으니 조금 쉬는 거지요. 그리고 독서와 집필을 합니다. 요즘에는 주로 일기를 써요. 길게 쓸 때도 있고, 짧게 쓸 때도 있지요. 일기를 쓰면서 세필로 그림을 그리듯, 세세한 것, 작은 것, 스치고 지나가기 쉬운 것들을 쓰지요. 그리고 하루에 한 문장을 놓고 거기에 대한 단상을 쓰는 작업을 합니다. 시는 계속 쓰고 있어요. 시를 쓰고 마음에 안 들면 따로 폴더를 만들어 보관했다가 나중에 다시 봐요. 가끔은 좋은 것들도 있어 시 폴더로 옮겨 놓고 있으니, 아마도 내년쯤에는 신간 시집을 내지 않을까 생각 하고 있어요. 그리고 책을 읽어요. 요즘엔 좋은 선생이 옆에 있어요. 바로 저의 아내입니다. 인문학에 대한 관심이 많은 아내는 고전을 저에게 많이 권해 줘요. «종의 기원»과 같은 클래식이지요. 아내가 하도 책을 많이 읽어서 왜 그렇게 책을 읽느냐고 했더니, 살림을 잘하려고 한대요. 허허. 그 말이 참 좋았어요. 그리고 성가신 일들이 사라지고 사람이 담대해진다는 거예요. 지적인 만족감은 그런 거지요. 저는 문학 서적을 주로 많이 읽어요. 요즘엔 쿳시의 «철의 시대»라는 소설에 푹 빠져 있어요. 참 대단한 소설이다 싶어요. 외국 작가의 작품들, 뛰어난 책을 보면 한국 작가에게 느낄 수 없는 일종의 경외감이랄까? 하여간 우리가 없는 뭔가를 가지고 있어요. 물론 우리가 가지고 있는 걸 유럽 작가들은 없겠지만 말이지요. 어떤 작가의 책을 읽고 전집을 구해 읽기도 하지요. 예를 들면 미국 계관시인인 루이즈 릭의 시 '전집'이 되겠군요. 책도 잘 만들었고, 그녀의 시는 참… 시인들이 많이들 좋아하는 시인이랄까? 시의 지평을 넓힌 사람이랄까, 작년 가을에 세상을 떠났지요. 아쉬운 일입니다." 이외에도 많은 책 이야기를 했다. 김용택 시인은 책을 많이 읽고 권해 주는 선배이기도 하다. 매우 지성적인 매력이 있는데, 섬진강, 시인, 시골, 이런 이미지들이 지적인 면을 가려버리고 무엇보다, 글에 대한 그의 겸손한 자세가 '지식인연' 하는 사람들과 구분 짓게 한다. 루이즈 릭의 시도 좋지만 나는 김용택의 시가 더 좋다. 솔직히, 거기에는 한국어가 품고 있는 서정과 혼의 울림이 있다. 번역은 아무리 좋아도 번역이라는 필터를 거치기에 시의 사상적인 면에 치우치기 마련이고, 메시지에 감동한다. 하지만 한국 시는 다르다. 소월과 용택의 시에 있는 것이, 우리 정서가 참 좋다.

내 손이 가만히 있으니

세상이 다 고요하구나

– 김용택 <봄비>

짧은 시, 긴 시, 그냥 보통의 시, 김용택의 시집을 펼치면 깜짝 놀란다. 이런 시의 배경에는 다독을 통한 깊은 사유가 보이지 않게 자리 잡고 있다. 뿌리 깊은 나무가 자양분을 빨아들이듯, 어려운 시절 문학을 통해 살아온 그 힘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영화를 본다. 한국 드라마, 미국 드라마를 비롯해 작가 주의 영화, 대중 영화, B급 영화 가리지 않는다. 세상의 모든 영화를 다 보겠다는 자세이다. 어린 시절부터 극장에 가서 인생의 단면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잠자리에 듭니다. 또 새벽에 일어나면 많은 것들과 일들이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이렇게 하루를 보내면서 살아요."

행복한데 불행한 사람들을 위한 시

"요즘엔 아름다움이 사라지고, 사랑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적대, 극단, 적개심이 들어선 것 같아요. 뭐랄까, 사람들이 참 행복한 조건에서 살고들 있는데, 불행하다고나 할까. 하여간 내 행복을 위해서는 남의 행복을 생각해야 해요. 이런 시대에 시는 어디에 머무는 것일까? 내 고양이 마루는 알까 몰라요. 저 녀석 참 조용하게 세상을 바라보는데 무얼 보는지, 참 깊은 세상을 보는 것 같아요. 저 고양이 눈으로 시를 쓰고 싶기도 하고.

파리에는 센강이 있다. 발터 벤야민은 "파리는 센강 위에 놓여 있는 거대한 도서관 열람실이다"라고 했다. 그에게 파리는 국립도서관의 파리다. 한나 아렌트는 20세기 최후의 지성으로 발터 벤야민을 언급했다. 경우는 다르지만, 김용택의 섬진강이 그러하다. 임실 진매마을은 섬진강 위에 놓여 있는 한국 정서의 서재이다. 그곳에서 그는 오늘도 새로운 책을 읽고 있다. 까치 부부라는 책, 원앙이라는 책, 거미줄이라는 책을 보고 읽고 쓴다. 우리 시대에 김용택 정신이라는 것이 필요하다고 느낀 다. '아름다움이 사라지고, 사랑이 사라지고, 적대적, 극단 적, 적개심이 팽배해지는 세태'에 글을 쓸 때도 조심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내 글이 너무 사나운 것은 아닌지, 남의 행복을 생각하면서 쓰라는 것이다. 지식도 권력화되고, 너와 나를 가르는 가늠자가 되기도 한다. 김용택 시인은 거기에서 멀리 벗어나 있다. 욕심을 부리지 않고,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겸손한 자세로 살아간다. 그래서 소박하다는 평가를 받지만, 그 소박은 오랜 독서와 사색, 고독에서 비롯된 자존감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봄이 왔다. 김용택의 시를 읽으면서 조금은 행복해도 좋은 시간이다. 이런저런 걱정은 당신 곁에 가까이 흐르는 강물 위로 보내고, 떨어지는 햇살처럼 반짝반짝 행복하시길.

매화꽃 이파리들이

하얀 눈송이처럼 푸른 강물에 날리는

섬진강을 보셨는지요.

푸른 강물 하얀 모래밭

날선 푸른 댓잎이 사운대는

섬진강 가에 서럽게 서보셨는지요.

해 저문 섬진강 가에 서서

지는 꽃 피는 꽃을 다 보셨는지요.

산에 피어 산이 환하고

강물에 져서 강물이 서러운

섬진강 매화꽃을 보셨는지요.

사랑도 그렇게 와서

그렇게 지는지

출렁이는 섬진강 가에 서서 당신도

매화꽃 꽃잎처럼 물 깊이

울어는 보셨는지요.

푸른 댓잎에 베인

당신의 사랑을 가져가는

흐르는 섬진강 물에

서럽게 울어는 보셨는지요.

- 김용택 <섬진강 매화꽃을 보셨는지요>

원재훈

등단한 지 36년이 됐다. 그보다 긴 시간 동안 책을 읽고 글을 썼다. 1988년 가을 «세계의 문학»에 시 ‹공룡시대› 발표를 시작으로, 시집 «낙타의 사랑», «사랑은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라 하네», 소설 «만남», «망치», 산문집 «나무들은 그리움의 간격으로 서 있다», «착한 책»을 비롯해 동화, 번역서 등을 냈다. 문학 관련 TV와 라디오 방송 프로그램에서 패널로, 국악방송 <행복한 문학> MC로도 활약하며, 언제나 시의 쓸모를 말하고 있다.

CREDIT INFO

editor이승민

words원재훈

photographer김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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