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생각] 술 좋아해, 배 나와, 머리 빠져…‘고려 아저씨’ 이규보

한겨레 2024. 4. 19. 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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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보, '동국이상국집'.

강민경 국립제주박물관 학예연구사의 '이규보 선생님, 고려시대는 살 만했습니까'는 제목으로만 접했던 '동국이상국집'에서 "스스로 자신의 심정을 진솔하게 남긴" 이규보의 삶을, 하여 고려 중기의 일상사를 담은 책이다.

지은이는 위인과 거대한 역사로만 알았던 고려 시대가 아닌, 이규보의 시와 산문을 통해 술을 좋아했던, 배 나오고 머리가 빠져 슬픈 "고려라는 왕조를 살았던 한 지식인의 모습"은 물론 당대 모습을 생생하게 재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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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국이상국집’ 지은 고려 문인
배 나오고 머리 빠졌다는 한탄
시 바쳐가며 관직 구하던 모습까지
고려 중기 일상사도 빼곡하게
지은이가 직접 그린 이규보. 생선회와 게찜을 즐긴 미식가의 모습을 담았다. 푸른역사 제공

이규보 선생님, 고려시대는 살 만했습니까
강민경 지음 l 푸른역사 l 2만원

이규보, ‘동국이상국집’. 중학교 때 무슨 공식처럼 외던 조합이다. 하지만 ‘동국이상국집’에 어떤 내용이 담겼는지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강민경 국립제주박물관 학예연구사의 ‘이규보 선생님, 고려시대는 살 만했습니까’는 제목으로만 접했던 ‘동국이상국집’에서 “스스로 자신의 심정을 진솔하게 남긴” 이규보의 삶을, 하여 고려 중기의 일상사를 담은 책이다. 지은이는 위인과 거대한 역사로만 알았던 고려 시대가 아닌, 이규보의 시와 산문을 통해 술을 좋아했던, 배 나오고 머리가 빠져 슬픈 “고려라는 왕조를 살았던 한 지식인의 모습”은 물론 당대 모습을 생생하게 재현한다.

이규보는 유독 먹는 이야기를 많이 남겼다. 술 이야기는 시시때때로 나오는데 “붉은 생선”을 안주 삼아 술잔을 기울인 기록도 있다. “‘생선회’가 등장하는 우리나라 최초의 기록”이 바로 ‘동국이상국집’이다. 그 자신 술꾼이었음에도 아들이 술꾼이 되는 건 걱정스러웠나 보다. ‘아들 삼백이 술을 마시다’(兒三百飮酒)라는 시 중 일부다. “네가 어린 나이에 벌써 술을 마시니/ 앞으로 창자가 녹을까 두렵구나/ … / 아무래도 날로 삼백 잔씩 마실까 두렵구나”.

이규보는 병을 달고 살았다. 어려서부터 피부병으로 고생했고, 나이 들어서는 백내장으로 힘겨운 시간을 보냈다. “눈동자 안에 되레 막이 끼어/ 마치 구름 덮인 것처럼 약간 방해되네”. 친구의 도움으로 눈병에 특효라는 “아라비아 사막에서 자라는 용뇌향(龍腦香)이라는 나무에서 채취한 수지(樹脂)”인 용뇌를 구했지만, 가짜였다. 지은이는 이규보의 실망을 요즘 세태와 연결한다. “어쩐지 온갖 감언이설에 속아 효능도 의심스러운 건강식품을 사들여 놓았다가 사실을 알고 후회하는 분들이 떠오른다.” 아홉 살 때부터 시를 짓던 “총명하고 민첩”한 사람이었지만, 벼슬길은 순적하지 않았다. 스물셋이 되어서야 최종시험인 예부시(禮部試)에 턱걸이로 합격했다. 하지만 무인정권 시기 문인들의 자리가 많지 않아, 그는 “관직을 구하는 내용의 시를 지어 개경의 고관들에게” 바치기도 했다. 문하시중 등 최고위직을 지낸 조영인에게 바친 시에는 과거에 같이 급제한 막내아들과의 인연까지 언급하며 이렇게 적었다. “다시금 목을 빼고 바라보며/ 바야흐로 봉(鳳) 날개에 붙기를 기약하네/ …… / 막내 아드님은 참으로 옥과 같아”.

아들에게 ‘넌 배울 게 없어 술을 배우냐’ 한탄하는 이규보의 모습. 푸른역사 제공
눈 아픈 것을 서러워하는 이규보의 모습. 푸른역사 제공

원숭이 이야기도 종종 글감으로 삼았다. 당시 권세가였던 기홍수는 거대한 원림(園林)을 만들고 퇴식재(退食齋)라 이름 붙였다. 그곳에는 기화요초와 온갖 짐승들이 있었는데, 이규보의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원숭이였다. “나와 너는 같은 병을 앓는데/ 어찌하여 넌 사납게 부르짖느냐”. 지은이는 그가 목줄에 묶인 원숭이에게 “알량한 벼슬을 위해 발품 팔아야 하는 자신의 신세”를 감정이입한 것은 아닐까 상상한다. 벼슬을 구하는 시를 지었다고 해서 매사에 찌질한 사람은 아니었다. 술을 대접해야 노를 빠르게 젓는 사공 이야기에 덧붙여 그는 세태를 이렇게 비판한다. “아, 이 조그마한 배가 가는 데도 오히려 뇌물의 있고 없음에 따라 느리고 빠름, 앞섬과 뒤처짐이 있거늘, 하물며 벼슬을 다투는 마당에 있어서랴.”

책은 독특한 자취를 남긴 이규보의 삶은 물론 고려 중기 시대의 삶을 복원한다. 이규보의 옛글과 지은이의 재치 있는 글이 조응하며, 멀게만 느껴지는 고려 시대를 새로운 눈으로 응시할 수 있도록 돕는다.

장동석 출판도시문화재단 사무처장, 출판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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