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생각] 21세기 철학의 최전선, ‘죽은 물질 되살리는’ 신유물론

고명섭 기자 2024. 4. 19. 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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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위자-연결망 이론’을 주창한 프랑스 과학철학자 브뤼노 라투르. 위키미디어 코먼스

이 책은 신유물론이다
심귀연 지음 l 날 l 1만6800원

생태인문학을 연구하는 심귀연 경상대 인문학연구소 학술연구교수가 쓴 ‘이 책은 신유물론이다’는 제목 그대로 21세기 철학 최전선에 서 있는 신유물론을 안내하는 책이다. 지은이는 신유물론이 무엇인지 간략히 살피고, 신유물론을 대표하는 철학자 다섯 명(브뤼노 라투르, 로지 브라이도티, 제인 베넷, 도나 해러웨이, 카렌 바라드)의 사상을 안내한다.

신유물론이라는 용어는 1990년대 후반에 처음 등장했다. 신유물론이 왜 ‘새로운’ 유물론인지 알려면 먼저 과거의 유물론을 보아야 한다. 종래의 유물론은 물질이 인간의 의식에서 독립돼 있으며, 그 물질이 의식보다 선차적이고, 의식은 물질에 부수되는 것이라고 이해했다. 특히 근대철학의 문을 연 데카르트가 의식 혹은 정신을 중심에 놓은 것에 반대해 물질을 중심에 놓은 것이 근대 유물론의 시작이다. 데카르트의 ‘정신-물질’ 이분법을 받아들이되, 의식보다 물질을 우위에 놓고 의식을 물질의 파생물로 이해하는 사고방식이 근대 유물론이다. 그러나 근대 유물론은 데카르트와 마찬가지로 물질의 능동성과 창조성을 부정했다. 인간의 몸이나 다른 동물의 몸을 일종의 기계라고 보거나, 비생명체인 사물을 수동적으로 움직이는 죽은 물질이라고 본 것이다.

신유물론은 종래 유물론의 바로 이런 관점을 비판하고, 물질이 기계적으로만 작동하거나 수동적으로만 움직이는 것이 아니며 스스로 자기를 창조하는 활력을 지녔다고 본다. 데카르트의 ‘정신-물질’ 이분법을 거꾸로 뒤집는 데 그치지 않고, 인간의 몸과 동식물뿐만 아니라 무생물도 모두 능동적으로 활동한다고 보는 것이다. ‘죽은 물질을 되살리는’ 신유물론의 이런 지향은 정치적·윤리적 함의도 지닌다. 다시 말해 신유물론은 인간과 비인간 존재자들이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는가 하는 물음을 던진다. 특히 비인간 존재자들을 개발해 이용할 대상으로만 본 인간중심주의가 미증유의 생태 위기를 불렀다는 인식이 신유물론의 바탕에 깔려 있다.

지은이는 신유물론의 이런 관점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되, 그런 관점에 깃든 위험성도 지적한다. 인간 아닌 모든 생명과 사물을 의인화함으로써 그 비인간 존재자들이 인간처럼 느끼고 생각한다고 여기는 것이 그런 위험이다. 비인간을 의인화하는 것은 그 존재자들의 고유성과 독자성을 이해하는 데 방해가 될 수 있고, 인간과 비인간이 좋은 관계를 맺는 데도 장애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책은 신유물론의 대표자로 먼저 프랑스 철학자 브뤼노 라투르(1947~2022)를 소개한다. 라투르의 신유물론은 ‘행위자-연결망 이론’으로 집약되는데, 이 이론은 인간과 비인간이 모두 행위자로 존재하며 행위자들은 연결망을 통해서 자신을 드러낸다고 말한다. 인간만이 행위 주체이고 비인간은 그 행위의 대상이라는 인간중심적 관점을 비판하고, 비인간 존재자도 인간과 동등한 행위자로 서로 연결된 채 이 세계의 생성과정에 참여함을 강조하는 것이다. 라투르는 근대인이 문명과 자연을 나눈 뒤 문명이 자연을 완전히 지배한다는 꿈을 꾸었으나 그 꿈은 실현된 적이 없다고 지적한다. 라투르가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고 말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라투르는 자연의 능동적 행위에 주목하고 그 자연의 행위가 인간의 행위와 연결돼 있음을 강조한다.

이 책이 두 번째로 소개하는 로지 브라이도티는 신유물론적 페미니즘 이론가라고 할 수 있는데, 남성과 여성,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를 허물고 이들 사이의 상호작용에 주목한다. 브라이도티는 마누엘 데란다와 함께 신유물론이라는 말을 처음 쓴 사람이기도 하다. 또 제인 베넷은 물질의 생동성을 강조하는 ‘생기론적 유물론’의 주창자다. 동식물뿐만 아니라 사물도 살아 있는 존재자로서 능동적으로 활동한다고 본다. 물질과 생명의 이분법을 부정하는 것이다. ‘사이보그 선언’으로 유명한 도나 해러웨이는 인간과 기계의 연결 자체를 존재의 확장으로 본다. 일상에서 기계와 접속해 살 수밖에 없는 이상, 우리 인간은 모두 사이보그인 셈이다. 마지막으로 카렌 바라드는 양자물리학의 성과를 사유의 기반으로 삼아, 인간을 포함해 모든 사물은 독립된 존재자가 아니라 얽힘의 관계에 있다는 ‘철저한 관계주의’를 주장한다.

고명섭 선임기자 michae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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