똑같이 생긴 미국인 ‘로다주’의 1인 4역은 할리우드 향한 일침
소설 ‘동조자’를 몇 페이지만 읽어도 박찬욱 감독이 각색을 맡은 이유를 알 수 있다. 주인공은 CIA 비밀 요원이자 베트콩의 스파이인 두 얼굴의 남자. 배경은 신문 한 장 넘기는 일만큼 사람을 죽이는 게 쉬운 폭력의 세계. 공산주의 간첩이지만 미국 역사와 문학을 배우고, 미국인의 사고방식을 완벽히 흡수해야 하는 아이러니가 담겼다.
박 감독이 공동 제작·연출을 맡은 미국 HBO 드라마 ‘동조자’의 첫 화가 15일 쿠팡플레이를 통해 공개됐다. 베트남계 미국인 작가 응우옌 비엣타인의 동명 소설이 원작이다. 베트남전 말기, 남베트남 비밀경찰로 잠입한 북베트남 첩자 ‘대위’(호아 쉬안데)의 이야기를 그린 첩보 스릴러. 7부작으로 매주 1화씩 공개되며 1~3화까지는 박 감독이, 4~7화는 다른 감독들이 연출했다.
18일 열린 간담회에서 박 감독은 “베트남인도 미국인도 아니지만, 전쟁과 분단이라는 근현대사의 공통점을 가진 나라의 국민으로서 적당한 수준의 거리감을 가질 수 있었다. 동병상련을 느끼지만, 객관성을 유지할 수 있는 저의 정체성을 활용해 만들려고 했다”고 밝혔다.
소설과 드라마 모두 미국 사상에 물들었다는 이유로 북베트남 재교육 수용소에 갇힌 대위의 회상에서 시작된다. 대위는 프랑스인 신부와 베트남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푸른 눈의 베트남인’. “잡종”이라고 멸시당하던 주인공처럼 드라마도 베트남과 미국 문화를 결합해 독특한 정서를 만들어낸다. 할리우드 영화를 상영 중인 극장, 코카콜라와 버드와이저 맥주, 여기저기서 흐르는 1970년대 팝송까지 전쟁 중인 베트남에 미국 문화가 얼마나 깊숙이 침투했는지 보여준다.
배우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이하 ‘로다주’)는 CIA 요원, 하원 의원, 동양학 교수, 영화감독으로 1인 4역을 맡았다. 인종차별적이거나 아시아에 대한 무지를 드러내는 역할들이다. 원작은 아시아인을 재현하는 할리우드의 얄팍함을 비판한다. 한국계 배우가 모든 아시아인 역할을 맡는다거나, 베트남전 영화를 촬영하면서 베트남 단역들은 비명만 지르게 하는 모습을 신랄하게 풍자한다. 로다주의 1인 4역은 그동안 아시아인 캐릭터를 납작하게 그려온 할리우드에 대한 우아한 복수이자 세련된 미러링(mirroring·모방)인 셈이다. 대위의 기억 속에선 네 명의 미국인이 도긴개긴이라는 비유이기도 할 테다.
박 감독은 “로다주의 역할들은 정치·안보·교육·문화 각 분야에서 성공한 백인 남성들이다. 미국이라는 사회를 보여주는 네 얼굴이자 결국 하나의 존재라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고 했다. 그럼에도 아이언맨 슈트에 어떻게 갇혀 있었나 싶을 정도로 다채로운 로다주의 연기는 보는 맛을 더한다. 1화에선 CIA 요원 역할로 듬성듬성한 붉은 머리에 목소리, 발음까지 바뀐 모습으로 충격을 준다. 그가 카메라에 바짝 다가올 때마다 주인공이 느낄 섬뜩함을 어렵지 않게 체험할 수 있다.
영상 매체의 한계일 수 있으나, 두 세계 사이에서 갈등하는 주인공의 내면은 소설에서 더 풍부하게 그려진다. 조연들의 과장된 연기 톤도 적응에 시간이 걸릴 듯하다. 박 감독은 캐스팅의 어려움을 토로했다. “베트남 배우를 최대한 많이 캐스팅하려고, 전 세계 베트남 커뮤니티를 샅샅이 뒤졌다. 연기 경험이 없는 배우들도 많아서 가르쳐가며 촬영했다. 뒤로 갈수록 연기력이 느는 걸 볼 수 있다(웃음).”
소설은 공산당 모독이라는 이유로 베트남에서 출판되지 못했고, 미국에선 2016년 퓰리처상을 수상, 찬사를 받았다. 인종·이념·문화의 충돌과 뒤섞임이 ‘동조자’의 매력이고, 드라마는 시각적인 요소로 그 매력을 충분히 살려낸다. 박 감독은 “주인공은 모든 일의 양면을 보는 축복이자 저주를 받은 인물”이라고 요약했다. “양쪽 모두 이해할 수 있다는 건 어느 쪽에도 설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냉전이 끝났다고 하지만 ‘신냉전’이라는 말도 있고, 한국 사회의 이념 갈등은 또 얼마나 격렬한가. 저에게는 남의 나라 이야기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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