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과 중앙, 문학 저변 키운 100년

김진형 2024. 4. 19. 00:06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춘천고문인회 100주년 문집 ‘상록’
이승훈 시인·전상국 작가 특집
시 ·소설·수필 등 75명 작품 엮어
32회 졸업 등단 문인 14명 ‘최다’
한수산·이태극 등 일화도 조명

이태극·이승훈·전상국·한수산·황원갑·최승호·박찬일·박상우·최수철·최계선·김도연…. 모두 국내 문학 선집이나 문단사에서 기록될 만한 중량감 있는 문인들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춘천고를 졸업했다는 것이고, 그들의 작품은 단연 ‘명문’으로 통한다.

춘천고등학교문인회가 개교 100주년을 맞아 기념 문집 ‘상록’을 펴냈다. 시·수필과 소설 분야 2권으로 발간됐으며 시중에 유통되는 주요 문학상 수상작 단행본과 비교해도 손색없는 작품이 곳곳에 보인다. 시 47명, 소설 14명, 에세이 14명 등 75명의 작품을 실었고, 동문 문인 99명의 명단도 수록해 지역과 중앙을 연결하는 문학사적 자료로도 주목된다.

표지는 특집으로 수록된 전상국(32회) 소설가와 이승훈(32회) 시인이 차지했다. 한국 문학사에서 이들이 차지하는 위상을 생각한다면 충분히 납득되는 대목이다. 한승태(59회) 시인은 ‘사물A에서 이것은 시가 아니다까지-이승훈 시인의 자아 찾기’를 통해 ‘비대상 시론’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낸 이승훈 시인의 시 세계를 분석했으며 최삼경(55회) 소설가는 전상국 작가와의 인터뷰로 그의 문학 여정과 고교시절 문예반 활동 등을 조명했다.

춘천고 문학의 시초를 꼽자면 월하 이태극(5회) 시조시인이다. “밝음 어둠 소용돌아/절벽을 찬 이순간/목숨이 분수되어/솟구친다 티끌 속을/내일을 내일을 안고/피어나는 무궁화”라는 절창이 담긴 시조 ‘내일을’의 글귀가 시인의 이름 ‘태극’처럼 눈에 밟힌다. 1955년 시조 ‘산딸기’를 통해 등단한 이태극 시조시인은 한국시조작가협회를 창립하고 국어국문학회 대표이사 등을 역임하는 등 한국 시조의 입지를 다진 대표적 인물이다.

노재현(49회) 전 중앙일보 논설위원은 ‘현대문학사에서 춘천고 문학의 위상과 전망’이라는 글을 수록했다. 한국문학 선집 등을 활용해 춘천고 문학의 위상을 제시한다. 지역 내에 수많은 문학 애호가를 길러낸 것이 춘천고 문학의 가장 큰 저력이라고도 평가한다. 그는 “춘천고는 한 세기에 걸쳐 한국 문학사에 남을 문인들과 지역문학의 저변 확산에 기여한 많은 문인을 배출했다”며 “중앙 문단에 큰 몫을 보태고, 한편에서는 중앙이 등한시해 온 지역 문학을 몸으로 일궈 저변을 확대했다”고 했다.

32회 졸업생은 등단자가 14명으로 가장 많다. 이 중에는 학원문학상 수상자인 이승훈 시인과 전상국 소설가도 포함된다. 교사로 재직하며 문예반을 이끌었던 이희철(1930∼2016) 시인의 영향이다. 춘천 현대시의 출발점으로 꼽히는 이희철 시인은 교지 ‘소양강’을 통해 학생들이 문학적 연대를 쌓도록 도왔으며 1959년 예맥문학회의 시초격인 봉의문학회를 창립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특히 이승훈은 그의 촉망받는 제자였고, 박목월 시인과의 등단 인연도 닿게 했다. 전상국 소설가는 ‘어휘력과 문장력이 젬병’이라는 스승의 질타로 백일장에 나가지 못하게 되자 한참을 운 뒤, 절치부심 끝에 문장을 다듬어 글쓰기의 즐거움을 깨달았다고도 고백한다. 이무상(32회) 시인은 이번 문집에 이희철 시인을 추모하는 ‘사우’라는 시를 수록했다. 이희철 시인 외에도 이덕성, 배기생, 김병덕, 김광길 등이 춘천고 문예반을 이끌었던 주요 교사로 꼽힌다.

소설 ‘군함도’의 후기 격인 ‘30년의 끝’을 수록한 한수산(36회) 작가는 소설보다 시를 먼저 썼던 문청이었다. 어느날 한 해 선배였던 노화남(35회) 소설가가 대입 모의고사를 치러야 하는 자기 대신 강원도 학생 백일장에 대신 나가라고 종용했고, “결석 처리 안하니, 수업 대신 점심이나 얻어먹고 와”라는 말에 얼떨결에 나간 백일장에서 시 부문 장원을 차지했다고 한다. 그의 담임이었던 ‘뚝지’ 박병래 교사는 학생들에게 수업료 독촉을 하지 않았던 유일한 스승이었다.

새롭게 조명해야 할 인물은 독립운동가이자 국어학자로 활동했던 신영철(7회) 시인이다. 상록회 활동을 주도했던 그는 춘천고보 재학시절 기고를 통해 일제가 우리글을 비하해 사용하는 ‘언문’이라는 말을 자전에서 뽑아버리고, ‘한글’로 고치자고 주장했다. 조선어학회의 ‘한글’ 잡지 편집과 ‘조선말큰사전’ 발간의 주역으로 한글연구에 큰 업적을 쌓았지만 한국전쟁 때 납북됐다. “인류에게 평화와 행복 발전과 향상을 줄 수 있는 위대한 사상이 한글로 적혀져야 한다”는 것이 평소 그의 신조였다.

수필 분야에서는 춘천고 문인들의 재학시절 숨은 이야기와 역사를 엿볼 수 있다. 이영진(43회) 음악평론가는 재학시절 학교 밴드부 단원으로 활동하면서 교내 독후감 대회 장원을 받았다. 이 평론가는 재학시절 국어교사였던 전상국 소설가가 “영진이는 앞으로 나팔 불지말고, 열심히 글을 써 봐. 작가가 돼 보란 말이야”라고 한 마디를 던진 것이 훗날 밀알이 됐다고 회고했다. 유성선(54회) 수필가는 고등고시 사법과, 행정과, 외교과를 모두 통과한 한국 최초의 ‘고시 3관왕’ 고 장덕진(24회·전 농수산부장관) 동문을 소개했다.

젊은 작가의 등장이 현저히 줄어든 점은 아쉽다. 문학의 인기가 예전만 못하고 문학지망생이 줄어드는 현실은 춘천고도 비껴갈 수 없었다. 현재 춘천고 출신의 막내 문인은 이규호(73회) 수필가다. 지난해 12월 배출한 96회 졸업생까지 등단 문인은 없었다. 책에 수록된 명단만 살펴보면 춘천고 출신 20∼30대 젊은 작가가 없는 셈이다. 40대도 민왕기(68회) 시인을 포함한 2명 뿐이다. 지역문학 고령화의 현주소다.

최계선(53회) 편집위원장은 “한 그루 나무도 백년을 자라기 어려운 시절이다. 백년의 세월만큼이나 다양하고 깊이 있는 작품들을 대하니 감회도 새로웠다”며 “한국 문학속의 춘천고 출신 문인들의 무게는 적지 않았다는 자부심을 가져본다”고 했다.
김진형 formation@kado.net

▶춘천고등학교 출신 문인 명단

◇5회 △이태극(시조)

◇7회 △신영철(시조)

◇22회 △모상철(시조)

◇24회 △류광열(시)

◇27회 △지호영(시조)

◇28회 △박재릉(시)

◇29회 △김영기(평론)

◇32회 △길건영(시) △김순태(시) △김응길(시) △김희목(시) △박선화(시) △송병훈(시) △심상운(시) △유장균(시) △윤종삼(수필) △이국남(시) △이무상(시) △이승훈(시) △전상국(소설) △허남헌(수필)

◇33회 △김규성(아동) △전태규(시조) △황영찬(소설)

◇34회 △박민수(시) △윤용선(시)

◇35회 △김해성(수필) △노화남(소설) △이영세(시) △장영민(시) △정충영(시) △최창순(시)

◇36회 △조영수(시) △한수산(소설) △홍종원(시조) △황원갑(소설)

◇37회 △김진갑(수필) △신동화(희곡) △엄흥식(소설) △이도행(소설) △이충용(시조) △최종남(소설)

◇38회 △김완기(시조) △백승관(수필) △임동윤(시) △주근환(시조) △한상량(수필)

◇39회 △이응철(수필) △정병국(시) △채남희(수필)

◇40회 △김병찬(소설) △신중경(소설)

◇41회 △김종복(수필) △이영주(수필)

◇42회 △김두중(시) △이병욱(소설)

◇43회 △김중석(시) △박노영(수필) △신현봉(시) △연영흠(소설) △이영진(동화·희곡·음악평론) △최현순(시)

◇44회 △김용선(시) △송광호(수필) △이언빈(시) △장대연(시)

◇45회 △김현식(소설) △이형남(시·소설) △조성림(시) △지창식(수필) △최명걸(수필) △최승호(시)

◇46회 △김문전(시) △김주갑(시) △박철호(소설)

◇47회 △박찬일(시) △양승준(시) △이낙봉(시) △장승진(시)

◇48회 △권혁수(시)

◇49회 △박상우(소설) △양승국(희곡) △유호출(시) △정정조(시조) △최수철(소설)

◇50회 △신준철(시)

◇52회 △유승도(시)

◇53회 △권준호(시) △김영석(수필) △정운복(수필) △최계선(시)

◇54회 △유성선(수필)

◇55회 △이장길(시) △최삼경(소설)

◇57회 △김도연(소설)

◇59회 △한승태(시)

◇64회 △차창호(동시)

◇68회 △민왕기(시)

◇73회 △이규호(수필)

#이승훈 #전상국 #소설가 #이태극 #이희철

Copyright © 강원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