튀르키예서 온 이방인 베튤 “내겐 가난할 권리조차 없다”
전체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본문 보기를 권장합니다.
'포리너(FORIEGNER)'란 글씨가 새겨진 초록 점퍼 차림의 배우들이 무대를 누빈다.
불법과 합법 사이에서, 난민과 이주노동자의 경계를 위태롭게 오가는 미등록된(undocumented) 사람들이다.
튀르키예 태생이지만 어릴 때부터 한국에 살아 모국어가 한국어인 배우 베튤(33)은 "우리 누구나 난민이 될 수 있다는 메시지가 핵심"이라고 했다.
한 작가는 "난민들에겐 이른바 '난민다움'을 입증해야 하는 난제가 있는데 노동을 하면 바로 난민 신청 자격을 박탈당하게 된다"고 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오이디푸스를 최초 난민으로 설정
'포리너(FORIEGNER)'란 글씨가 새겨진 초록 점퍼 차림의 배우들이 무대를 누빈다. 불법과 합법 사이에서, 난민과 이주노동자의 경계를 위태롭게 오가는 미등록된(undocumented) 사람들이다. 제목부터 낯선 연극 ‘출입국관리소의 오이디푸스’는 소포클레스의 그리스 비극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에서 난민, 이주노동자 문제를 읽어낸다. 잔혹한 운명에 내몰린 오이디푸스와 살기 위해 밀려난 이들의 이야기가 수시로 교차한다.
연극은 오이디푸스를 최초의 난민으로 설정한다. “아테네에 있는 신성한 땅 콜로노스 사람들은 오이디푸스의 정체를 알게 되자 나가라고 합니다. 살인과 근친상간으로 오염된 몸은 받아들일 수 없다고 거부하는 거죠.”
한현주 극작가는 “그리스 고전에 기대 우리 사회의 난민과 이주 노동자 문제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싶었다”며 “그들의 고통이 아니라 그들에 대한 우리의 두려움을 다룬 작품”이라고 했다. 튀르키예 태생이지만 어릴 때부터 한국에 살아 모국어가 한국어인 배우 베튤(33)은 “우리 누구나 난민이 될 수 있다는 메시지가 핵심”이라고 했다. 최근 대학로에서 만난 두 사람은 이방인을 보는 우리 사회의 이율배반적 시선을 따갑게 짚어냈다.
6살 때부터 한국에서 생활한 베튤은 자신의 공적 위치를 ‘외국인 프리랜서 예술가’로 설명한다. “한국 시스템에서 저는 아예 입력이 안 되는 존재죠. 견디기 어려운 순간들이 많았어요.” 그는 “그나마 이주민 가운데 상황이 좋은 편”이라고 했다. 연세대 사회학과에서 학∙석사 학위를 마쳤고,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다시 연극을 전공해 다양한 가산점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방인 경험이 층층이 쌓여 있는 그에겐 이번 배역이 더욱 각별할 수밖에 없다. 한현주 작가는 “처음부터 베튤 배우를 염두에 뒀다”고 했다.
‘증명’이란 단어는 연극의 주요 열쇳말 가운데 하나다. 한 작가는 “난민들에겐 이른바 ‘난민다움’을 입증해야 하는 난제가 있는데 노동을 하면 바로 난민 신청 자격을 박탈당하게 된다”고 했다. 생존을 위해 무슨 일이라도 해야 하는데, 그러면 난민 지위를 잃게 되는 딜레마에 빠진다. 난민이 아니라도 외국인이 한국에서 살려면 끊임없이 자신을 입증하고 증명해야 한다. 언어, 문화적으로 한국인이라고 생각하는 베튤도 예외가 아니었다. “지원 사업에 응모하려면 예술인 증빙이 있어야 하는데, 외국인에겐 아예 자격이 없었어요. 최근에 자격 요건이 하나 생겼는데, 한국인과 결혼하면 해주겠다는 거예요.” 그는 “결혼할 생각이 없는 게 아닌데 내가 어떤 자격을 증명하기 위해 결혼하려는 것은 아닌지 자신을 스스로 의심하게 되더라”며 난감하다는 듯 웃었다.
스스로 자신을 의심하게 되었다는 베튤의 이야기는 연극 대사에 그대로 녹아 있다. “여보. 나는 정당하게 비자를 받고 일을 하러 이 나라에 들어왔어. 근데 있잖아. 자기랑 결혼하는 순간, 나는 가난한 나라 출신이라 당신의 돈을 바라고 원하지도 않는 결혼을 한 그런 여자가 돼버렸어. 너무 많은 의심에 둘러싸여 있다 보니까, 이젠 나도 잘 모르겠어. 내가 혹시 정말 그런 거 아닌가 하고…”
베튤은 지난해 연극 ‘신파의 세기’에서 이순신 장군을 연기한 적이 있다. 젊은 여성 외국인이 이순신을 연기한다는 역발상이었다. 그는 “한국에서 외국인을 상상하는 범주가 좀 넓어지면 좋겠다”고 했다. “소득과 소속으로 외국인 여부를 판정해요. 예술을 하는 가난한 외국인 프리랜서는 이곳에 존재할 수가 없어요.” 그는 “불편해도 가난을 받아들이며 살기로 했는데 내겐 가난할 권리조차 없는 것 같다”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이제 그만 기대할래요.” 베튤이 이번 연극에서 꼽은 가장 인상적인 대사다. 그는 “연기하는 인물이 막바지에 이르러 지치고 부질없다는 생각에 하는 대사”라며 말끝을 흐렸다.
손원정 연출에 윤현길, 김은정, 문성복, 조성현, 최지혜 등이 출연한다. 21일까지 아르코대학로예술극장.
임석규 기자 sky@hani.co.kr
Copyright © 한겨레.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크롤링 금지.
- [속보] 한 총리 “내년도 의대 증원분 50~100% 자율모집 허용”
- 윤 대통령, 4·19 기념식 불참 논란…조국혁신당 “조조참배”
- 이스라엘 소심한 복수?…이란 “미사일 없었다, 드론 3대 격추”
- 물 빨아올린 버드나무 40그루 벤 뒤…5만평 모래톱까지 초토화
- “나는 장발장, 홍세화 선생은 등대였다”…이틀째 조문 행렬
- 윤 대통령 지지율 23%, 취임 후 최저…물가·불통 영향 [갤럽]
- 이란-이스라엘 드론 공격 주고받기, 체면 살리고 피해는 최소화
- “엄마 나 살고 싶어”…112에 365번 전화 건 지적장애인 극적 구조
- 쿠팡 월회비 1만5000원까지 간다? [The 5]
- “중국 주요 도시 절반 가라앉는 중”…무분별한 지하수 개발 탓