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종훈의 근대뉴스 오디세이] 일제강점기 여공 수난사, 가슴 아픈 흔적들

2024. 4. 17.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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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반도체 공장에서 일했던 근로자 자녀의 선천성 질환이 처음으로 산업재해로 인정됐다.

"조선과 같이 공업이 발달 되지 못한 곳에 있어서는 이와 같은 사실이 그다지 중대히 들리지 아니할는지 모른다. 그러나 공업이 발달 되지 못하고 공장 조직이 불완전할수록 직공의 학대와 폐해는 더 심할 것이다. 가령 경성으로 말하더라도 연초 공장이나 정미소나 고무공장 같은 곳에서는 다수한 여자를 직공으로 사용한다. 현재 이 여러 가지 공장에서 사용하는 직공들은 과연 어떠한 대우를 받으며 어떠한 고통을 당하며 어떠한 무서운 현상이 숨겨 있는가. 우리는 이 작은 난(欄)에 장황한 말을 기록할 수가 없음을 안다. 오직 '품삯'을 받고 직공으로 일하는 동안에는 자본주나 혹은 관청에서 아무리 '후의(厚意)'를 쓴다고 할지라도 그들은 청천백일(靑天白日)을 자유로 대할 기회가 없음과 같이, 소위 '인도(人道)상에 중대한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말 것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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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종훈 19세기발전소 대표·아키비스트

공장의 참혹한 작업 환경, 악취 속 주야로 일해 물가는 높은데 임금은 입에 풀칠하기도 힘들어 일본인 감독관들의 차별과 성적 학대도 극심해 그들의 많은 눈물과 한숨, 이제는 다 말랐을까

지난달 반도체 공장에서 일했던 근로자 자녀의 선천성 질환이 처음으로 산업재해로 인정됐다. 삼성반도체에서 근무했던 여성 근로자 3명의 자녀다. 먹고 살기 위해 일했던 직장의 작업 환경으로 인해 자녀에게 선천성 질환이 생겼다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100년 전의 상황은 더 열악했다. 당시 신문을 보면 일제 강점기 여성 노동자들의 고난과 눈물이 가득하다. 작업 환경으로 인한 여공의 불임(不姙) 문제를 다룬 기사도 눈에 띈다. 그들의 수난사는 지금도 잊지 못할 아픔이다.

1924년 3월 19일자 동아일보에 '일본 여공(女工)의 불임증(不姙症)'이란 제목의 사설이 실려 있다. "일본 신문지의 보도에 의하면 일본 나가노현(長野縣)에서는 '제사(製絲) 직공에게 장가들지 말라'는 말이 유행하여 큰 문제가 생겼다는데, 그 내용을 알아보면 제사하는 여직공들은 날마다 아침부터 밤까지 작업대에 앉아서 일을 하는데 작업대와 기타 공장의 설비가 아주 불량하여, 필경은 심장, 폐, 자궁 등에 병을 얻게 되므로 따라서 자식을 낳을 수가 없이 되므로 이와 같은 말이 유행하게 되었다 한다. 이 사실을 안 나가노현 당국에서는 '이는 인도(人道)상에 중대한 문제'라 하여 급속히 공장 개량을 단행하는 동시에 엄중한 감독을 하여 그와 같은 폐단이 없도록 하려 한다고 보도하였다."

이어 사설은 조선 여직공들의 상황을 짚어본다. "조선과 같이 공업이 발달 되지 못한 곳에 있어서는 이와 같은 사실이 그다지 중대히 들리지 아니할는지 모른다. 그러나 공업이 발달 되지 못하고 공장 조직이 불완전할수록 직공의 학대와 폐해는 더 심할 것이다. 가령 경성으로 말하더라도 연초 공장이나 정미소나 고무공장 같은 곳에서는 다수한 여자를 직공으로 사용한다. 현재 이 여러 가지 공장에서 사용하는 직공들은 과연 어떠한 대우를 받으며 어떠한 고통을 당하며 어떠한 무서운 현상이 숨겨 있는가. 우리는 이 작은 난(欄)에 장황한 말을 기록할 수가 없음을 안다. 오직 '품삯'을 받고 직공으로 일하는 동안에는 자본주나 혹은 관청에서 아무리 '후의(厚意)'를 쓴다고 할지라도 그들은 청천백일(靑天白日)을 자유로 대할 기회가 없음과 같이, 소위 '인도(人道)상에 중대한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말 것이라고 생각한다."

당시 공장의 작업 환경은 참혹했다. 코를 찌르는 악취 속에서 여성 노동자들은 주야로 일했다. 그러나 받는 임금은 입에 풀칠하기도 힘들었다. 1923년 7월 6일자 조선일보에 실린 '고무공장 여직공의 애화(哀話)'라는 제목의 기사다. "생활 곤란이 극도에 달한 중에서 모진 목숨을 보전해 보려고 수입이라고 얼마 되지 못하는 고무공장의 직공 생활을 하는 그들의 머리 위에 임금 문제가 내리 눌러서 그도 저도 못하고 도로에서 방황하는 여직공들의 애화(哀話)를 들으면, 동정의 눈물이 있는 자는 차마 들을 수 없는 사정이라. (중략) 공장에를 가서 불같이 내리쪼이는 양철 지붕 밑에서 끓는 화로를 안고 앉아서 비지땀을 흘리며 일을 하는데, 가위 자국에 손가락마다 성한 곳이 없이 못이 박힙니다. 이것을 괴로운 줄도 모르고 한 푼이라도 더 벌어 보려고 애를 쓰는 것은 고무신 한 켤레라도 더 하려고 부지런히 하다가도, 어린 것이 젖을 먹자고 울며 도로에서 방황하는 형상이 눈동자를 가릴 때에는 이것도 저것도 다 귀찮고 나의 신세가 어찌 이렇게 기막힌가 하는 생각이 일어나며, (중략) 이와 같이 비참한 속에서 그중 잘하는 사람이 30원 그중 못하는 사람은 14~15원을 받게 되지 못한 즉, 그것을 가지고 물가가 고등(高騰)한 이 시대에 일가족 생활을 유지할 수 없는 중에 우리의 피를 빨아서 자기 뱃속의 기름이 지게 하려는 주인 측에서는, 조합인지 무엇인지 만들어 가지고 그와 같이 간신(艱辛)한 임금을 3분의 1이나 내리니 그것을 받고야 그 고생을 할 수가 있습니까. 그리하여서 유감이지마는 동맹파업을 하는 동시에 대표자를 정하여 주인 측에 향하여 요구한 바도 있습니다 마는, 그것은 모두 수포(水泡)로 돌아가고 직공을 새로 모집한다는 광고를 붙였습디다. 그런 즉 우리는 다만 이 세상을 비관할 뿐이요 그같은 주인들을 원망치는 않습니다. (후략)"

당시 여직공들을 괴롭게 하는 것은 열악한 작업 환경 뿐만이 아니었다. 일본인 감독관들의 조선인에 대한 차별과 성적인 학대도 상당했다.

"인천부 화정 전중(田中) 매가리(정미소) 공장 감독으로 있는 시본철부(31)는 홍영순(洪永順·20)이란 여직공을 잉태 중임에도 돌아보지 아니 하고 우악스럽게 발로 걷어차므로, (후략)" (1924년 1월 26일자 매일신보)

"공장의 재전(在前)이란 감독은 시내 여러 곳 정미소로 다니면서 쌀 고르는 여자를 능욕하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는데, 지금 재등(齋藤)정미소에서도 얼굴이 얌전한 여자에게 짐승 같은 욕심을 품고 그 뜻을 달하려는 등 가벼이 보지 못 할 짓이 많다 하여, 그러한 감독 아래에서 차라리 굶어 죽으면 죽었지 일을 할 수 없다는 것이 두고두고 내려오던 불평이었다 한다." (1924년 3월 12일자 동아일보)

"인천 재등(齋藤)정미소에서 쌀을 고르는 여직공 300여 명은 하루 종일 죽을 힘을 다하여 일하여도 하루에 30~40전에 불과하는 삯전에 목을 맨다. 그날 그날의 생활을 유지해 가는 여직공 300여 명이 단연히 동맹파업을 한 사건을 대할 때에 우리는 일종의 엄숙한 느낌을 갖지 아니 할 수 없게 된다." (1924년 3월 15일자 동아일보)

인천 신흥동에는 긴담모퉁이 길이라는 곳이 있다. 1932년 신흥동 일대에는 16개 정미소가 있었고 조선인 선미공(選米工)은 약 1,300여 명에 달했다고 한다. 그들은 도정한 쌀에서 쌀겨와 잔돌 골라내는 일을 했다. 무명 한복을 입은 선미공들은 하루 10시간 이상 작업을 한 후 이 길을 걸어 퇴근을 했다. 당시 긴담모퉁이 길에 뿌려졌을 그 많은 눈물과 한숨이 이제는 다 말랐을까. 지금도 어딘가에서는 눈물과 한숨이 뿌려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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