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 심판[꼬다리]

2024. 4. 17. 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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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청 앞 서울광장에 조성된 10·29 이태원 참사 추모 공간에 희생자와 생존자의 고통을 공유하고 기억하겠다는 시민들의 메시지가 담긴 포스트잇이 빼곡히 붙어 있다. 박하얀 기자



명예훼손 피해 구제를 위해 법률 상담을 받은 적이 있다. 상담 말미에 변호사는 다른 사건의 의뢰인은 피해 정도가 더 심했다며 “이 정도는 괜찮다”고 말했다. 악의 없이, 위로를 건네는 취지의 말이었을 것이다. 법리 검토를 요청했던 나는 예상치 못한 피해 평가에 적잖이 당황했다. 무엇이 더 힘든 일인지를 왜 제3자가 정하는지 이해되지 않았다.

내 사건과 비교 대상이 된 사건의 고소인은 자원이 여느 사람보다 많은 이였다. 이른바 ‘권력자’에 가까웠다. 각자의 고통이 있는 것인데, 그 고통에 무게가 달리니 나 역시 이런저런 비교를 하게 됐다. 회복은 그만큼 멀어졌다.

고통은 쉽게 비교되곤 한다. 자신이 겪은 피해를 말하는 이에게 “더한 것도 있다”라고 반응하는 식이다. 국가 참사도 예외는 아니다. 10주기를 맞은 세월호 참사를 다룬 기사에는 희생자와 생존자, 유가족의 아픔은 마땅하지 않다는 듯 다른 사건과 비교하는 댓글이 이어진다. 고통의 무게를 저울질하며 비난을 쏟아낸다.

정치 영역에서 이 같은 고통의 비교가 수사학처럼 쓰일 때, 그 폐해는 더욱 크다. 오세훈 서울시장은 탈시설 현안에 대해 장애인 활동가들과 논의하기로 한 날에 하루 앞서 장애인 집단거주시설을 찾아 종사자들, 거주인의 보호자들을 만났다. 자립을 지원하면 시설에서 살던 누군가는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는, 얼핏 들으면 시설 거주 장애인의 고충에 공감하는 듯한 정치인의 발언은 장애인이 자립을 꿈꿀 수 없게 하는 사회 구조의 문제를 교묘하게 은폐한다.

개인이 겪는 고통은 ‘개인적’이지 않은 경우가 많다. 이면에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거나 애초에 부재한 제도, 차별과 위계 등이 겹겹이 쌓여 있게 마련이다. 개개인의 일로 비치는 사건의 본질을 드러내고 법·제도를 정비하는 것이 정치의 역할 중 하나일 것이다.

제22대 총선을 지켜보면서 정치가 이 같은 역할을 하고 있는지 되묻게 됐다. 여당과 제1야당의 정책 공약에서 여성, 장애인, 청년 등은 실종됐다는 평가가 나온다. 이번 총선에서 젠더 정책으로 논의된 것은 사실상 비동의강간죄 도입을 위한 형법 개정뿐인데 “억울한 사람이 양산될 수 있다”고 국민의힘과 개혁신당이 공세를 펴자 정책공약집에 이를 담았던 더불어민주당은 “실무적 착오였다”며 철회했다.

법률이 담지 못한 피해자의 고통은 ‘실존’하는 것이지만, 거대 양당이 언급한 가해자의 고통은 ‘상상’의 영역에 있다. 한국이 강간죄 성립 요건을 폭행 또는 협박의 유무로 협소하게 해석해 발생하는 문제에 대해선 유엔 여성차별철폐위원회도 법 개정을 권고했다. 합리적인 의심을 할 여지가 없을 정도로 공소사실이 진실한 것이라고 확신할 수 없다면 피고인의 이익으로 판단해야 한다는 원칙은 이미 법정에 서 있다. 이런 비교가 민의의 대변 기구에서 횡행하는 현상이야말로 뿌리 깊은 가부장제를 보여주는 방증이 아닐까.

소수자들이 겪는 문제를 해소하기 위한 움직임에 곧잘 제동이 걸리는 데는 여성이 아닌 존재, 비장애인 등의 ‘고통’을 더할 수 없다는 계산이 깔려 있다. 정치가 제 역할을 하지 않는 게으름을 가리려 시민들 사이 고통을 비교하는 ‘고통 심판’을 하지 않길 바란다.

박하얀 기자 whit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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