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린 풍경] 덕유산 자락 뒤늦은 ‘벚꽃 엔딩’… 꽃잎 지고 초록이 핀다

최흥수 2024. 4. 17. 0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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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창 병곡마을-수승대-덕천서원-창포원
지난 12일 덕유산 자락 거창 북상면 병곡마을로 이어지는 도로변에 치렁치렁 늘어진 능수벚꽃 가지가 바람에 살랑거리고 있다. 이번 주는 흩날리는 꽃잎과 함께 '벚꽃 엔딩'을 맞을 것으로 보인다.

“꽃이 / 피는 건 힘들어도 / 지는 건 잠깐이더군 / 골고루 쳐다볼 틈 없이 / 님 한 번 생각할 틈 없이 / 아주 잠깐이더군” 최영미 시인의 ‘선운사에서’의 한 대목이다. 어디 선운사 동백만 그럴까. 올해 벚꽃은 예상보다 늦게 피고, 기대보다 일찍 마무리되고 있다. 경남 거창에는 숨겨진 벚꽃 명소가 여럿 있다. 대규모 군락이 아니어서 축제도 없고 사람이 몰리지도 않는다. 주민과 알음알음으로 찾아온 여행객만 호젓하게 산골의 황홀한 봄 정취를 만끽한다. 대개 선현들이 미리 점찍은 ‘풍경 맛집’ 주변이다. 지난주 절정이었으니 지금쯤이면 바람에 날린 꽃잎이 바닥을 하얗게 덮었겠다. 봄꽃이 지고 나면 산자락으로 오르는 초록이 눈부시다.


아는 사람만 아는 능수벚꽃 명소, 병곡마을

병곡마을(병기실마을)은 남덕유산 자락에 위치한, 거창에서도 산골 오지다. 전북 무주 구천동에서 빼재를 넘으면 거창 고제면 삼포마을이고, 이곳에서 다시 고갯마루를 두 번 넘어야 북상면 병곡마을이다. 도로가 개설되기 전까지는 동업령을 넘어 무주 안성면에 닿을 수 있었다. 동업령은 해발 1,320m 고개로 영호남을 잇는 장삿길이었다. 병곡마을은 양쪽이 높은 산줄기에 둘러싸인 지형이라 태풍과 같은 자연재해가 적고 열대야와 황사가 없는 청정지역이라 자랑한다. 말인즉슨 크게 내세울 게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지난 12일 거창 병곡마을로 이어지는 도로변에 능수벚꽃이 늘어져 있다.
거창 북상면 병곡마을로 이어지는 도로변에 능수벚꽃이 늘어져 있다. 지난 12일 풍경이다.

그런 산골마을이 꽃 피는 봄이면 반짝 주목을 받는다. 함양으로 가는 37번 지방도에서 갈라지는 마을 안길 약 4㎞ 구간에 가로수로 심은 능수벚나무가 분홍빛 꽃가지를 드리우기 때문이다. 능수버들처럼 가지를 아래로 길게 늘어뜨린 모양새라 수양벚나무라고도 부른다.

도로와 나란히 이어지는 분계천에는 맑은 개울물이 흐르고, 주변 좁은 들판에는 푸릇푸릇 새싹이 돋았다. 바람에 살랑거리는 꽃가지가 산뜻한 봄 색깔과 어우러지니 정신이 혼미해진다. 한곳에 나고 자라도 생육은 제각각이다. 개화는 지난주 절정이었지만 아직 망울을 품은 가지도 더러 있어 이번 주까지는 꽃잎이 흩날리는 산골의 봄 정취를 즐길 수 있을 듯하다.

거창 병곡마을 능수벚꽃길이 덕유산 자락으로 이어져 있다.
거창 병곡마을 능수벚꽃길에서 여행객이 늦은 봄 정취를 만끽하고 있다.

긴 꽃길에 비해 주차장이 부족하다는 건 단점이다. 마을로 들어서는 도로 초입에 예닐곱 대 댈 수 있는 주차장이 있고, 중간중간에 차를 세울 수 있는 공간이 있지만 넉넉한 편이 아니다. 별도의 산책로도 없다. 병곡마을이 도로 끝이어서 차량 통행이 많지 않지만 꽃놀이에만 정신 팔지 않도록 각별히 조심해야 한다.


거창 대표 관광지에 퇴계의 흔적이

병곡마을에서 거창읍 방면으로 조금 내려오면 영남 제일의 동천(洞天·산천으로 둘러싸여 경치가 빼어난 곳)이라 자랑하는 수승대가 있다. 옛날 안의현(현재 함양군 안의면) 땅이었을 때는 ‘안의삼동(安義三洞)’의 하나로 꼽혔다. 원학동 계곡으로 불렸던 위천 한가운데에 넓은 암반이 형성돼 있고, 섬처럼 고립된 작은 바위 봉우리가 주변 경관과 어우러진 명승지다. 거북바위라고도 부르는 바위 둘레에 이곳을 다녀간 이들이 남긴 무수한 이름과 글귀가 새겨져 있다. 오랜 옛날부터 경치 좋고 놀기 좋은 곳이었음이 증명된 셈이다.

거창 수승대 암반에서 여행객들이 인증사진을 찍고 있다.
수승대 거북바위에 '수승대'를 비롯해 이곳을 다녀간 이들의 이름과 여러 문장이 새겨져 있다.
수승대 요수정 아래 맑은 물이 흐르고 있다.

수승대(搜勝臺)의 애초 명칭은 수송대(愁送臺)였다. 신라로 가는 백제 사신들이 수심에 차서 송별하는 곳이었다는 의미다. 근심 어린 표정으로 이별주를 나누는 모양새가 빼어난 경관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여긴 탓일까. 훗날 퇴계 이황이 이곳 풍경을 예찬하는 시를 한 수 읊은 뒤부터 발음이 비슷한 수승대로 이름이 바뀌었다고 한다.

수승대에는 거북바위를 중심으로 요수정, 관수루, 구연서원 등이 어우러져 있다. 철재다리를 가로질러 맞은편으로 솔숲 산책로가 연결되고, 이른바 ‘물멍’하기 좋은 곳에 요수정이 위치하고 있다. 거북바위를 휘도는 계곡물이 바윗돌에 하얗게 부서졌다가 그윽하게 초록을 머금고 있다.

돌아올 때는 거북바위 바로 위 암반에 놓은 석교를 건넌다. 방문객들이 주로 인증사진을 찍는 곳이다. 계곡을 건너면 구연서원이 자리 잡고 있다. 조선 중종 35년(1540) 요수 신권이 제자를 가르치던 서당이었는데, 숙종 때 거북바위에서 이름을 따 ‘구연서원(龜淵書院)’으로 개칭했다. 신권은 갈천 임훈, 남명 조식과 함께 영남학파 중 경상우도의 학풍을 형성한 인물이다. 서원은 구한말 흥선대원군 때 훼철되었으나, 강당과 문루인 관수루는 그대로 남았다. 물결처럼 휘어진 관수루 기둥이 예술이다.

수승대 구연서원 입구 관수대. 나무 모양 그대로 휘어진 기둥이 예술작품처럼 보인다.
수승대 계곡 상류에 출렁다리가 놓여 있다. 높이에 비해 아찔하다.

이 정도만 해도 부족함이 없는데, 최근 계곡 상류에 출렁다리를 놓아 산책 구간을 늘렸다. 솔숲으로 난 탐방로를 따라가다 출렁다리 입구까지 제법 가파른 계단이 이어진다. 길이 240m 출렁다리는 높이에 비해 아찔하다. 현실적으로 공포를 체감할 수 있는 높이여서 오싹함이 온몸으로 전달된다.

인근 영승마을 역시 수승대와 마찬가지로 퇴계의 영향으로 ‘영송’이라는 본래 이름에서 개명된 경우다. 조선 중종 38년(1543년) 이황이 장인 권질을 찾아왔다가 신라와 백제 두 나라 사신을 맞이하고 보낸다는 의미의 마을 이름이 아름답지 못하다고 지적하고 영승으로 고쳤다고 한다. 신라 선화공주가 백제 서동왕자를 만나러 마을 뒷산(아홉산) 취우령을 넘어가다 죽음을 맞았다는 이야기도 전해 내려온다.

영승마을 사락정. 정선 전씨 후손이 세웠는데 담장으로 둘러져 있어 정자 본래의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다.
영승마을 사락정과 영승서원 사이에 아담하게 마을 정원이 조성돼 있다.

영승마을 앞에는 수승대에서 이어진 위천이 흐르고, 물가에 사락정과 영승서원이 자리 잡고 있다. 사락정의 사락(四樂)은 ‘농사짓고 누에 치며, 물고기 잡고 땔나무하는 즐거움’을 이른다. 퇴계가 이른 봄 영승마을의 아름다운 경치에 반해 읊은 ‘영승촌의 조춘’이라는 시에 등장하는 내용이다. 퇴계의 시는 사락정에 걸려 있다는데 대문이 굳게 잠겨 있으니 확인할 길이 없다.

정자는 정선 전씨 후손인 재일동포 기업가 전병수 전 크린랲 사장이 사재를 들여 복원했다고 하는데 높은 담장이 둘러져 있다. 주변 풍광을 즐기기 위한 정자 본래의 역할을 못해 아쉬움이 남는다. 함께 복원한 영승서원도 문이 굳게 잠겨 있기는 마찬가지다. 두 건물 사이 오래된 솔숲에 가꾼 정원만 아담한 정취를 풍기고 있다.

영승마을 아래 건계정 계곡은 거창에서 수승대에 버금가는 관광지다. 덕유산에서 발원한 물줄기가 옛 원학동을 지나 이곳에서 크게 굽어 돈다. 깎아지른 벼랑 사이로 흐르는 물은 유난히 푸르고 고요하다. 도로변 주차장에서 계곡 양쪽으로 산책로가 나 있고, 그 끝자락 바위 위에 올려진 자그마한 정자가 건계정이다.

거창 위천변의 건계정. 중국에서 귀화한 거창 장씨 후손들이 세웠다.
건계정 아래 암반 위로 맑은 물이 흐르고 있다.
복사꽃이 화사하게 핀 건계정 주변 산자락으로 초록이 번지고 있다.

대한제국 시기 거창 장씨 후손들이 선조 장종행(章宗行)과 홍건적을 토벌하고 개성을 수복하는 데 공을 세운 아들 두민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정자다. 장종행은 송나라 때 고려로 귀화한 인물로, 그의 고향인 중국 건주(建州)의 지명을 따서 건계정이라 이름했다고 한다. 정자 앞 넓은 반석에 맑은 물이 흐르고, 바로 위 얕은 보에 갇힌 물에 초록 산자락이 그득 담겨 있다.

영승마을에 머물던 퇴계가 이 멋진 곳을 지나쳤을 리 없다. “양쪽 산이 한 줄기 물로 묶여 빠져나갈 문 없는 듯한데, 쌓이고 쌓인 바위 절벽 속에서 차고 찬 물이 솟아난다. 흥 솟아 노래도 하고 싶고 그윽한 곳 낙원 열어 살고파라”라는 시를 남겼다.


벚꽃은 늦었지만, 창포원엔 봄이 활짝

용원정과 덕천서원은 거창의 소문난 벚꽃 명소다. 아쉽게도 지난주 이미 절정을 지나 화사한 벚꽃놀이는 내년을 기약해야 할 듯하다. 마리면 용원정 앞에는 작은 하천을 가로지르는 돌다리가 있다. 쌀 1,000석을 들여 만들었다고 해 ‘쌀다리’라 불린다. 정자와 이 다리 주변에 10여 그루의 벚나무가 가지를 펼쳤는데, 아담한 계곡과 어우러져 그림 같은 풍광을 빚는다. 지난 11일 흐드러진 벚꽃 아래서 작품 하나 건지려는 사진작가와 모델의 발길이 꾸준히 이어지고 있었다.

지난 12일 거창 용원정 주변에 벚꽃이 만개해 있다.
거창 마리면 용원정 쌀다리에서 여행객이 화사한 벚꽃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있다. 내년 봄에나 다시 볼 수 있는 풍경이다.
거창 용원정 쌀다리 아래 바위에 벚꽃잎이 곱게 떨어져 있다.
지난 12일 거창 덕천서원 주변에 벚꽃이 만개해 있다. 올해는 늦었고 내년 봄에야 다시 볼 수 있는 풍경이다.
지난 12일 거창 덕천서원 저수지 수면에 떨어진 벚꽃과 버드나무 꽃잎이 덮여 있다.

인근 덕천서원은 영천 이씨 후손들이 세운 서원인데, 바로 옆에 조성한 저수지를 빙 둘러 가며 심은 벚꽃이 주변 산세와 어우러져 환상적인 봄 풍광을 빚는다. 지난주 이미 수면에 떨어진 분홍 꽃잎과 연둣빛 버들가지가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이번 주는 꽃잎이 수면을 가득 덮을 것으로 보인다.

벚꽃 졌다고 봄이 끝난 건 아니다. 남상면 거창창포원엔 이제 화사하게 봄이 피어나고 있다. 1988년 합천댐 건설로 생긴 호수 상류 지역에 거창군이 생태정원을 조성해 창포원이라 이름했다. 오염원을 줄여 황강의 수질을 보호하고, 주변 경관을 살려 관광지로 활용하자는 목적이다.

거창창포원은 사계절 관광 정원이다. 전망대 주변에 꽃잔디가 화사하게 피어 있다.
이맘때 거창창포원에선 알록달록한 튤립이 가장 돋보인다.
여행객들이 4인승 자전거를 대여해 거창창포원을 둘러보고 있다.
거창창포원의 키 큰 나무와 주변 산자락으로 초록이 번지고 있다.
거창 봄 여행지 지도. 그래픽=이지원 기자

수질 정화 식물이자 여름에 보랏빛 꽃을 피우는 꽃창포를 상징으로 내세웠지만, 지금 창포원에선 튤립이 주인공이다. 알록달록한 꽃송이가 눈길을 잡는 튤립정원을 지나 전망대 아래에는 진분홍 꽃잔디가 눈부시다. 일직선의 탐방로에 심은 키 큰 나무에는 새순이 돋아 생동감이 넘친다. 곧 장미와 창포, 수련, 연꽃, 수국이 뒤따를 테니 사계절 새 옷으로 갈아입는 정원이다. 거창창포원은 전체 면적이 약 42만㎡(128만 평)에 달한다. 여유롭게 걸어도 좋고 입구에서 자전거를 대여해 돌아봐도 운치 있다. 입장료는 없다.

거창=글·사진 최흥수 기자 choisso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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