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면의 K브랜드 집중탐구] 〈1〉 활명수, 생명을 살리는 물. 전세대를 아우르는 최장수 브랜드를 조명하다

2024. 4. 16. 0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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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분 좋게 식사하고 난 후 갑자기 속이 답답할 때, 묘하게 소화가 안 되는 느낌을 받을 때 바로 머릿속에 떠오르는 건 바로 소화제가 아닐까 싶은데요. 그 가운데에서도 액상 타입의 소화제는 복용하기 편하고, 기능 면에서도 뛰어나 저를 포함하여 많은 사람이 찾는 제품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한 모금 한 모금 목으로 넘길 때마다 식도를 따라 느껴지는 기분 좋은 탄산과 맡기만 해도 나을 것 같은 한방의 향과 맛은 그 자체만으로도 속이 뻥 뚫리는 느낌을 느끼게 해 줍니다.

저는 액상 소화제 가운데에서도 부채표 활명수가 가장 먼저 떠오릅니다. 특히 '부채표가 없는 것은 활명수가 아닙니다'라는 브랜드 카피는 뇌리에 강하게 박혀서 구매할 때마다 되뇌게 됩니다. 실제로 까스활명수는 액제소화제 시장에서 점유율 70%를 넘기는 등 확고하게 1위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 생활 깊숙이 자리 잡은 장수 아이템 까스활명수가 국민의 삶 속에 어떻게 자리 잡게 되었는지, 어떻게 장수 브랜드가 될 수 있었는지 그 비결에 대해 살펴보는 시간을 가져 보고자 합니다.

활명수의 변천사

동화약품에서 제조하는 일반의약품인 활명수는 한자로 '活命水'인데 이는 즉 '생명을 살리는 물'이라는 의미로, 사실 그 당시 급체·토사곽란 등으로 사망하는 사람이 많았던 것을 생각하면 그에 걸맞은 이름이 아닐까 합니다.

활명수는 한국 역사상 첫 번째 브랜드 상품이자 매년 기록을 경신하는 최장수 브랜드이지요. 그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무려 대한제국 이전부터 시작되었다니 실로 엄청난 기록을 보유하고 있는 셈입니다. 1897년 궁중 선전관 노천 민병호 선생이 궁중 비방에 서양의학을 접목해서 개발한 것으로, 국내 최초의 양약이었습니다. 제중원에 있던 친구가 알려준 서양의학에서 이 약의 제조 아이디어를 얻게 된 것입니다.

초기 활명수는 지금처럼 바로 마실 수 있는 방식이 아니라 원액을 물에 타서 먹어야 하는 과정을 거쳐야 했습니다. 이후 지금처럼 바로 음용 가능한 형태로 출시되면서 원액을 담은 큰 병의 활명수는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당시에는 달여 먹는 탕약이 전부였는데 복용이 간편할 뿐만 아니라 효과가 뛰어난 활명수의 등장은 선풍을 일으키며 인기를 끌게 됩니다. 1910년 활명수 1병 가격이 40전으로, 당시 쌀 1되 가격이 약 10전이던 것과 비교하면 상당히 고가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활명수가 유명해지면서 유명세를 치르게 됩니다. 유명한 제품 뒤에는 늘 그림자처럼 따라오는 유사 제품이 속속 등장하면서 치열한 생존경쟁이 시작되고, 유사 상표 등장을 막기 위하여 1910년에 '부채표'를 상표 등록하게 됩니다. 이 역시 한국 최초의 상표 등록입니다. 당시에는 상표권 개념의 굉장히 희미하던 때였음을 감안하면 동화약방은 굉장히 선구적이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창업자 민강 선생

이뿐만 아니라 활명수는 기네스 기록도 보유하고 있습니다. 국내 최고(最古)의 제조회사, 최고(最古)의 제약회사, 최초의 등록상표(부채표), 최초의 등록상품(활명수) 이렇게 4개 부문에 걸쳐 한국기네스협회로부터 기록을 인정받았습니다.

지금까지 까스활명수는 85억병 이상이 판매되었습니다. 이는 전 세계 인구 약 77억명이 1병 이상을 마시고도 남는 수량이며, 지구를 25바퀴 돌고도 남는 양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오래된 만큼 써 내려간 역사 또한 유구합니다.

초대 사장인 민강 선생은 일제 강점기인 1910년부터 1936년까지 동화약방 사장으로 지내면서 활명수를 판매한 돈의 일부를 모아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자금으로 보탰습니다. 이뿐만 아니라 1919년 3·1운동 직후 체계화한 독립운동을 위해 중국 상하이에 세워진 대한민국임시정부와 국내 간 비밀 연락망인 '서울연통부'를 동화약품 사옥 내에 설치해서 운영하였고, 서울연통부 책임자로서 대동청년당을 결성해 적극적으로 독립운동에 헌신하는 등 나라를 구하기 위해 힘썼습니다.

활명수가 지금까지 많은 사랑을 받을 수 있는 비결로는 당연히 부작용이 거의 없고 효능과 효과가 검증되었기 때문인 것도 있지만 전통을 유지하고 존중하면서도 시대 흐름에 따라 끊임없는 변화를 추구하고 시도해 왔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시대 변화에 맞게 브랜드를 꾸준히 리뉴얼하고 전 세대를 아우르는 다양한 제품을 출시하거나 매년 타 브랜드와 협업한 한정판 활명수를 출시해서 전 세계 어린이들에게 식수를 지원하는 사업인 '생명을 살리는 물' 캠페인을 통해 수익금 전액을 기부하는 등 '활명수'라는 이름의 뜻 그대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살리는 일에 앞장서며 국민 소화제의 명성을 이어 나가고 있습니다.

120년이 넘는 오랜 시간 그 명맥을 이어 오며 우리의 삶에 진득하게 녹아져 있는 소화제, 활명수.

앞으로도 최장수 브랜드라는 타이틀을 유지하며 우리 곁을 지켜 주기를, 국민들에게 꾸준히 사랑을 받아서 더욱더 활약하기를 기대합니다.

김종면 위고페어(위조상품 토탈플랫폼) 대표이사 · 변리사 jmk@wegofair.com

[ 필자 소개 ]

IP 및 브랜드 보호 전문가로, 한국IBM 시스템엔지니어와 독일 IP분야 로펌인 Stolmar&Partner 한국변리사로 근무했다. 국내외 IP 전문 변리사 경험을 바탕으로 AI기반 위조상품 모니터링 및 차단 플랫폼 'Wegofair'를 개발, 위조상품 유통 방지에 힘쓰고 있다. 현재 플랫폼 운영사인 (주)위고페어 대표이사와 특허법인 아이엠의 파트너변리사를 겸임하고 있다.

김종면 위고페어(위조상품 토탈플랫폼) 대표 겸 변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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