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 승계는 옛말” 확 달라진 요즘 재벌가 여성들

오종탁 기자 2024. 4. 16. 0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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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현 삼성물산 사장 경영 복귀로 재계 ‘女風’ 주목
내실형·외향형·야심가형 등 다양한 모습으로 그룹 이끌어

(시사저널=오종탁 기자)

대기업 총수 일가 3·4세들이 속속 경영 일선에 나서고 있다. 이들의 일거수일투족과 소속 계열사 동향은 예나 지금이나 초미의 관심사다. 그런데 오너 3·4세들의 특징과 행보는 과거와 상당히 달라졌다. 특히 장자(맏아들) 승계 관행이 옅어지면서 '우먼 파워'가 부각되는 모습이다. 경영에 참여하지 않는 3·4세 여성들도 은둔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자신의 삶을 사는 경우가 많다. 요즘 재벌가 여성들의 흥미로운 움직임을 조명해 본다. [편집자 주] 

최근 가장 화제를 모은 재벌가 이슈는 단연 이서현 삼성복지재단 이사장(51)의 경영 복귀다. 재계 1위 삼성그룹을 이끄는 이재용 회장(56)의 둘째 여동생인 이 이사장은 3월29일 삼성물산 전략기획담당 사장으로 전격 복직했다. 2018년 말 경영 일선에서 물러난 지 5년3개월 만이다. '삼성물산 측에서 브랜드 가치 제고와 미래 준비를 위해 이서현 사장을 필요로 했다'는 게 표면적인 복귀 이유지만, 오히려 이 사장이 강한 의지를 갖고 다시 경영에 발을 담갔다고 재계는 보고 있다. 

이서현 삼성물산 전략기획담당 사장, 정유경 신세계그룹 총괄사장, 구지은 아워홈 부회장(왼쪽부터) ⓒ삼성그룹·신세계그룹·아워홈

이서현 복귀로 재부상한 삼성 계열분리설 

이 사장은 예원학교, 서울예술고를 거쳐 미국 파슨스 디자인스쿨에서 패션디자인을 전공했다. 2002년 제일모직(삼성물산 패션부문의 전신) 패션연구소 부장으로 삼성그룹에 발을 내디뎌 2018년 12월 삼성물산 패션부문장 사장직에서 내려올 때까지 커리어 대부분을 패션 사업으로 채웠다. 해당 기간에 섬세하면서도 과감한 리더십을 발휘했다는 평과 가시적인 성과를 내는 데 실패했다는 평이 공존했다. 삼성물산 패션부문은 이 사장이 2015년 말 진두지휘하기 시작한 뒤 2016년 매출 1조8430억원에 452억원의 영업손실을 냈다가 2017년에는 매출 1조7495억원과 영업이익 326억원으로 적자에서 벗어났다. 실적 모멘텀은 유지되지 못했다. 2018년 매출 1조7590억원, 영업이익 250억원으로 LF(영업익 1195억원), 한섬(영업익 920억원) 등 경쟁사보다 초라한 성적표를 받아들였다. 삼성물산 산하 제조·유통 일괄형(SPA) 브랜드 에잇세컨즈가 실적 악화의 주요 원인으로 꼽혔는데, 에잇세컨즈는 이 사장 주도로 2012년 런칭된 바 있다.

이 사장이 돌연 패션 사업에서 손을 놓았을 땐 '실적 부진에 부담을 느끼고 퇴진한 게 아니냐'는 해석이 지배적이었다. 삼성물산 패션부문 매각설이 흘러나와 내부 동요가 생기는 분위기도 포착됐다. 이후 삼성미술관 리움 운영위원장과 삼성복지재단 이사장, 삼성글로벌리서치 CSR(기업의 사회적 책임)연구실 고문 등으로 외유한 이 사장이 삼성물산으로의 복귀를 결정한 건 삼성물산과 삼성그룹은 물론 재계 전체를 술렁이게 하는 사안이다.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던 이재용 회장과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54), 이서현 사장 등 삼성가 세 남매의 계열분리 시나리오도 재차 부상할 조짐이다. 기존의 계열분리 시나리오는 삼성그룹 계열사 중 호텔신라는 이부진 사장이, 삼성물산 패션부문과 제일기획은 이서현 사장이 가지고 삼성을 떠나 독립할 거란 추측에 기반했다. 이번에 복직한 이서현 사장이 삼성물산의 패션뿐 아니라 건설, 상사, 리조트 등 사업 전반의 중장기 전략을 짜게 되면서 계열분리 시나리오에도 일부 변화가 생길지 주목된다. 

삼성 사정에 밝은 한 경제연구기관 관계자는 "이건희 선대회장 별세 후 유족들이 내야 하는 12조원 규모의 상속세 재원 마련을 위해 이부진 사장과 이서현 사장이 당분간 삼성그룹의 우산 아래 있으려 하겠으나, 문제가 해소되면 언제든 자신들의 몫을 떼서 독립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관측했다. 그는 이어 "이재용 회장은 1년 반 전에 회장으로 승진해 삼성전자를 중심으로 그룹의 확고한 1인자 지위에 올랐고 이부진 사장도 마이너한 계열사였던 호텔신라를 탄탄한 알짜 대기업으로 성장시키며 계열분리의 당위성을 충분히 확보했다"면서 "오빠와 언니처럼 50대가 된 이서현 사장 입장에선 더 늦기 전에 존재감을 확실히 증명해 독립 등 다음 스텝에 대비해야 하는 시점"이라고 설명했다. 

말수가 적고 조용한 성격인 이서현 사장은 그동안 대외에 얼굴을 내비치거나 발언한 경우가 거의 없었다. 다만 삼성가 세 남매 중 유일하게 결혼생활을 안정적으로 유지하고 있는 데다 다둥이(3남1녀)를 기르며 다른 학부모들과 격의 없이 어울리는 등 소탈한 면모도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사장의 남편은 인촌 김성수 선생의 증손자이자 김병관 전 동아일보 회장의 차남인 김재열 삼성글로벌리서치 사장 겸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56)이다. 이건희 선대회장은 생전에 사위인 김재열 사장을 각별히 아낀 것으로 전해졌다. 묵묵히 수신제가(修身齊家)하며 남편과 함께 그룹 내 기반을 닦아온 이 사장은 이제 경영 능력 증명이라는 마지막 퍼즐 맞추기에 속도를 내고 있다. 

실적으로 능력 입증한 이부진·정유경 

이서현 사장의 그간 행보를 '정중동'(靜中動·조용한 가운데 어떤 움직임이 있음)이란 키워드로 요약한다면 언니 이부진 사장은 '내실 경영'을 지상목표로 달려왔다고 볼 수 있다. 이건희 선대회장의 성격이나 경영 스타일을 가장 많이 닮아 '리틀 이건희'로 언론에 회자될 정도다. 그는 3월21일 호텔신라 정기주주총회에 13년째 의장으로 참석한 자리에서 "수익성 개선에 역량을 집중하겠다"며 "면세 부문에서는 지난해 7월 오픈한 인천공항점의 조기 안정화와 시내점, 온라인, 국내외 공항점의 경쟁력을 강화하고 호텔·레저 부문에선 호텔 위탁운영 사업 및 브랜드 활용 사업을 확대해 매출을 극대화할 것"이라고 전했다. 

구체적인 청사진에서 느껴지듯 이부진 사장은 2010년 12월 취임한 후 줄곧 철저한 전략에 기반한 실적 상승을 추구하고 있다. 호텔신라 매출은 2010년 1조4500억원 수준에서 2019년 5조7000억원까지 뛰어올랐다. 이 사장이 승부사적 기질과 빈틈없는 경영 관리로 면세 사업을 확장한 게 주효했다. 코로나19 팬데믹 여파가 계속된 탓에 매출이 지난해 3조5685억원으로 떨어지긴 했지만, 국내외 사업 여건이 나아지며 실적도 회복 흐름을 나타낼 것으로 시장은 전망한다. 

이 사장은 최근 들어 활발한 대외활동을 통해 삼성가 여성 경영자로서의 외연을 넓히고 있다. 우선 이 사장은 지난해 2월 두을장학재단 이사장을 맡아 차세대 여성 지도자 육성에 몸담기 시작하면서 바로 사재 10억원을 재단에 출연했다. 같은 달 한국방문의해위원회 위원장도 맡았다. 단순히 직을 맡는 데서 더 나아가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퍼포먼스'도 마다하지 않는다. 올해 1월 재단의 장학증서 수여식에 등장한 이 사장은 장학생인 여대생들과 '볼 하트' 포즈를 취하며 단체사진을 찍거나 개별 학생들의 사진 촬영 요청에 일일이 응하기도 했다. 2월3일에는 제주신라호텔에서 열린 '맛있는 제주 만들기'(맛제주) 프로젝트 10주년 기념행사에 참석해 해바라기의 《사랑으로》를 불러 이목을 집중시켰다. 정제되고 제한적인 대외활동을 소화했던 이전과 확연히 달라진 모습이다. 어느덧 이 사장은 성공적인 재벌가 여성 경영자의 표본으로 자리 잡았다. 

이부진 사장처럼 안정적인 실적을 바탕으로 경영 능력을 입증한 인물로 정유경 신세계그룹 총괄사장(52)도 거론된다. 정 총괄사장은 이부진 사장과 사촌지간이다. 이건희 선대회장 여동생인 이명희 신세계 총괄회장(81)이 정 총괄사장의 어머니다. 이 사장이 아버지를 닮았듯 정 총괄사장은 어머니의 모습과 겹친다. 이런 특징은 이병철 삼성 창업회장의 비상한 사업 감각으로 수렴된다. 정 총괄사장으로 대표되는 신세계의 백화점부문 매출은 2015년 5조원 수준에서 2022년 12조5000억원까지 고성장했다.

2015년 12월 신세계 백화점부문 총괄사장에 오른 그는 2016년 어머니 이 총괄회장과 신세계백화점 강남점을 증축해 강남의 새로운 랜드마크로 만들었다. 강남점은 2019년 국내 유통업계 최초로 단일 점포 거래액 2조원을 돌파한 데 이어 지난해엔 3조원 고지도 넘어서며 신세계 백화점부문의 역대 최대 실적 달성을 견인했다. 그 배경에는 불경기 속에서도 본질을 놓치지 않으려 애쓴 정 총괄사장의 경영 철학이 있었다는 분석이다. 세일 행사보다 명품 라인업, 차별화된 상품 기획 등에 집중한 전략이 적중했다는 것이다. 3월8일 오빠인 정용진 총괄부회장(56)이 회장으로 승진하며 그룹 내 영향력을 확대했음에도 정 총괄사장의 입지는 확고부동하다. 재계는 신세계의 백화점과 면세점, 패션부문을 맡고 있는 정 총괄사장이 앞으로 그룹의 신(新)성장동력 발굴에도 관여하며 영향력을 더욱 확대할 것으로 내다본다. 

재벌가 여성은 내향적? 깨지는 고정관념 

범삼성가의 다른 기업 여성 경영자 중에서는 이경후 CJ ENM 경영리더(39)가 눈에 띈다. 이 경영리더는 이병철 삼성 창업회장 장손인 이재현 CJ그룹 회장(64)의 장녀다. 이 경영리더는 2018년부터 CJ제일제당과 더불어 CJ의 핵심 계열사인 CJ ENM에서 브랜드 전략을 담당하고 있다. 이 상무는 소탈하고 꾸밈없는 성품으로 사내 신망이 두터운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면서도 일에 있어선 매우 적극적이고 꼼꼼하다는 평가가 나온다. 5촌지간인 이서현 삼성물산 사장을 연상케 한다. 

남편이 그룹에서 탄탄한 입지를 보유하고 있는 점도 이서현 사장과 닮았다. 이경후 경영리더의 남편인 정종환 CJ ENM 콘텐츠·글로벌사업총괄(44)은 미 컬럼비아대 동문인 이 경영리더와 결혼하고 2년여 후인 2010년 CJ 미국 지역본부에 입사해 올해로 15년 차 CJ맨이다. CJ㈜ 소속으로 미국에서 쭉 근무하다가 올 2월 CJ ENM 콘텐츠·글로벌사업총괄로 발령 나며 처음 한국에 사무실을 꾸렸다. 그는 앞으로 CJ ENM에서 콘텐츠 기획·제작 역량을 강화하고 국내외 유통망을 확대하며 아내와 실질적인 '투톱' 체제를 구축할 전망이다. 

이부진 사장과 이서현 사장, 정유경 총괄사장, 이경후 경영리더 등 범삼성가의 주요 여성 경영자들은 내향형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사실 이는 폐쇄적인 성향이 짙은 국내 재벌가의 여성 구성원 대다수가 보여온 태도이기도 하다. 그러나 시대가 달라지며 스테레오 타입에 금이 가고 있다. 이부진 사장과 같이 외향적이려 노력하는 경우도 있지만, 이를 넘어 솔직하고 과감한 행보를 이어가는 재벌가 여성 경영자도 보인다. 

식자재 유통과 단체급식을 주력으로 하는 기업 아워홈은 장자 승계 원칙을 지켜온 범LG가 일원이고 범삼성가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아워홈 경영을 책임지는 구지은 부회장(57)의 아버지는 구인회 LG그룹 창업회장의 3남인 구자학 아워홈 회장이고 어머니는 이병철 삼성 창업회장의 차녀 이숙희씨다. 구 부회장은 이 집안의 1남 3녀 중 막내다. 오빠나 언니들이 경영에 참여하지 않은 반면 구 부회장은 2004년 아워홈에 입사해 다양한 직무를 경험했다. 2009년 자회사인 캘리스코 대표 자리에 올라서는 뛰어난 사업 수완으로 사세를 크게 확장했다. 

경영권 승계가 눈앞에 있던 2016년 오빠이자 최대주주였던 구본성 전 아워홈 부회장이 아워홈에 입사해 대표이사 자리를 차지하면서 구지은 부회장에게 위기가 닥쳤다. 구지은 부회장은 후계구도에서 거의 밀려났다가 2021년 구본성 전 부회장이 보복운전으로 실형을 선고받은 일을 기점으로 기사회생했다. 1심 재판 이틀 후 구지은 부회장을 비롯한 세 자매가 지분을 합쳐 임시 주주총회를 개최해 구본성 전 부회장을 해임한 것이다. 결국 구지은 부회장은 2021년 6월 극적으로 아워홈 경영권을 갖게 됐다. 

산전수전을 다 겪으며 내공이 쌓여서인지 구 부회장의 경영 행보엔 거침이 없다. '푸드테크 기업으로의 전환' 등 비전을 직접 수립하고 사내 곳곳을 수시로 드나들며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2020년 사상 첫 적자(영업손실 93억원)를 냈던 아워홈은 2021년 흑자 전환(영업이익 256억원)에 성공하고 2022년(영업이익 536억원), 2023년(영업이익 900억원·예상치)에도 상승세를 이어갔다. 얼마 전에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구 부회장은 경영 멘토가 이모인 이명희 신세계 총괄회장과 사촌언니인 이미경 CJ 부회장(66)이라고 밝혔다. 범삼성가의 얽히고설킨 관계를 고려하면 대담한 발언이 아닐 수 없다. 

"승계 진행될수록 우먼 파워 커질 것" 

2018년 '물컵 갑질' 논란으로 경영에서 손을 뗐다가 2019년 6월 복귀한 조현민 ㈜한진 사장(41)은 지난해 말부터 적극적인 공개 행보에 나서고 있다. 앞서 조 사장이 물류 계열사인 ㈜한진의 미래 먹거리를 발굴하고, 지속 가능한 성장 기반을 만들었다고 한진그룹 측은 평가했다. 재기와 도약을 위한 예열을 마친 조 사장은 지난해 12월 이커머스 고객사를 대상으로 한 행사에서 취재진과 만나 ㈜한진의 실적 목표를 '2025년까지 매출 4조500억원'으로 설정하고 "올해부터 본격적으로 눈에 보이는 성과를 내겠다"고 공언했다. 한진의 지난해 매출은 2조8076억원이었다. 조 사장은 "한진이 지금 최고는 아닐 수 있지만 '정말 열심히 해준다, 진심이다'라는 이야기를 항상 듣고 있다"며 "우리는 물류만 하기 때문에 이것 없으면 돈을 못 번다. 그러니까 정말 진심이 나올 수밖에 없는 것 같다"고 솔직한 입담을 과시했다. 

이 밖에 재계에서 보폭을 넓혀가고 있는 오너가 여성 경영자로는 최윤정 SK바이오팜 사업개발본부장 부사장(35·최태원 SK그룹 회장의 장녀), 서민정 아모레퍼시픽 럭셔리 브랜드 디비전 AP팀 담당(33·서경배 아모레퍼시픽 그룹 회장의 장녀·휴직 중), 정지이 현대무벡스 전무(47·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의 장녀), 임상민 대상그룹 부사장(44·임창욱 대상그룹 명예회장의 차녀) 등이 있다.  

이들은 아직 그룹 내에서 아버지 또는 어머니인 총수의 후광에 가려져 있으나, 현시점 기준으로 경영권 승계에 가장 가까이 있다. 그룹의 미래를 책임져야 하는 무거운 책임감을 진 여성 후계자들인 셈이다. 재계 관계자는 "과거에 대기업 후계구도를 지배했던 '장자 승계' '남성중심주의' 등은 이제 완전히 옛말이 됐다"며 "3·4세 승계와 계열분리가 진행되면 될수록 재계의 여성 경영자 비율과 그들의 영향력에서 비롯된 '우먼 파워'가 더욱 강해질 것"이라고 예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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