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억압 꼬집은 원작 넘어… 인간의 자유 찾기 여정 그려
제국주의 사회 그린 원작과 달리… 정치-철학적 요소 과감히 덜어내
실험-피실험자의 인간성에 집중… SF 요소 가미한 미장센도 돋보여
벨라(에마 스톤)는 지난달 6일 개봉한 영화 ‘가여운 것들’에서 위험하니 밖에 돌아다니지 말라는 주변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돌아다니는 걸 좋아하고, 호기심이 많은 벨라는 아버지처럼 따르던 천재 과학자 고드윈 백스터(윌럼 더포)의 집에서 나온다. 영화는 자유분방한 벨라의 성격을 강조한다.
원작의 배경은 19세기 빅토리아 시대(1837∼1901)다. 당시 영국 여성에게는 참정권이 없었다. 경제는 급성장하고 국력은 팽창해 대영제국의 황금기로 불렸지만, 여성에 대한 시선은 보수적이었다. 고드윈 백스터는 원작에서 “매년 젊은 여성 수백 명이 가난과 지독하게 부당한 우리 사회의 편견 때문에 스스로 물속에 몸을 던진다”고 말하며 시대상을 드러낸다.
특히 원작에서 벨라의 전 남편 블레싱턴 장군은 제국주의를 상징하는 괴물 같은 인물이다. 대영제국 군대를 이끄는 블레싱턴 장군은 툭하면 하인들에게 총을 겨눈다. 영국이 당시 식민지를 지배한 방식을 은유적으로 보여 준다. 그의 폭압적 시선은 아내였던 벨라에게도 향한다. 벨라의 성욕을 제한하는 수술을 시도하며 “그것(수술)이 그들(여성)을 세상에서 가장 양순한 아내로 만든다”고 말할 정도다.
원작을 번역한 이운경 번역가는 “영화는 순수한 인간의 사고가 얼마나 자유롭게 해방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반면 원작은 여성을 억압하고, 제국주의가 팽창했던 당시 영국의 시대상을 짙게 응시한다”고 말했다.
스코틀랜드 작가 앨러스데어 그레이(1934∼2019)가 쓴 원작은 사회 불평등에 대한 치열한 고민을 담았다. 그는 원작에서 제국주의 이면의 빈부격차를 신랄하게 풍자한다. 예를 들어 벨라가 여행 중 만난 ‘회의주의자’ 해리는 “나폴레옹 전쟁이 끝난 뒤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일자리를 잃고 굶주리게 됐다”고 말한다.
이에 비해 영화는 벨라가 사회 모순을 직시하는 정도로만 간단히 다뤘다. 상류층인 벨라가 시원한 카페에서 풍경을 즐길 때 밖에선 더운 날씨와 식량 부족으로 가난한 이들이 죽어 간다는 사실을 목격하는 장면으로만 표현된 것. 그리스 출신의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은 지난해 12월 영국 가디언과의 인터뷰에서 “원작소설 중 철학, 정치에 대한 내용은 삭제하기로 했다. 나는 그런 종류의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 수 없다고 생각했다”고 털어놨다.
영화가 등장인물의 외양을 시각적으로 표현한 점도 돋보인다. 영화 속 고드윈 백스터의 얼굴은 큰 흉터로 가득하다. 비정상적으로 자라난 한쪽 턱도 두드러진다. 원작과 달리 스스로 위액을 만들어내는 능력이 없어 외부 장치에 의존한다는 충격적 설정까지 극에 더해졌다.
영화가 빅토리아 시대의 의상과 건물에 환상적 이미지를 더한 점도 눈길을 끈다. 열기구가 지중해 위로 솟아오르고, 공중전차가 골목 위에 매달린 밧줄을 따라 날아가는 영상을 보여 주며 배경이 과거인지 미래인지 헷갈리게 한다. 빅토리아 시대 과학기술에 공상과학(SF) 요소를 더한 장르인 ‘스팀펑크’ 요소다. 영화는 지난달 열린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미술상, 의상상, 분장상, 여우주연상 등 4관왕을 차지하며 독특한 미장센을 인정받았다.
벨라의 시선에서 진행되는 영화와 달리 원작은 구성이 복잡하다. 벨라의 현 남편인 매캔들스가 쓴 문건이 첫 번째 이야기라면 이를 벨라가 반박하는 편지인 두 번째 이야기가 다른 한 축에 있다. 한 사건에 대해 시선을 달리하며 시각차를 보여주는 것이다. 또 작가가 매캔들스의 문건과 벨라의 편지를 각각 발견해 정리하는 세 번째 이야기로 정리돼 있다. 장은진 황금가지 편집자는 “영화가 벨라의 시선에서 직선적으로 이야기를 풀어간다면 원작은 이야기가 여러 겹으로 덮여 있다. 독자가 진실과 거짓을 구분할 수 없도록 하는 형식미가 돋보인다”고 말했다.
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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