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응준의 포스트잇] [26] ‘포르노정치’ 사회

이응준 시인·소설가 2024. 4. 16.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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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이상 정치 자체 얘기로는 이 나라 정치의 해결책은커녕 진단조차 불가능하다는 의심이 든다. 독약도 약에 쓴다고 하니, 미친 척하고 ‘난도가 높은 얘기’를 좀 해보려 한다. 홍상수 감독 영화에 대한 호불호를 떠나서, 1996년 5월 4일 그의 첫 영화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이 개봉됐을 때 관객들이 매혹됐던 요소 가운데 중요한 하나는 배우들의 ‘사실적인 연기 톤’이었다. 요즘이야 그런 연기 방식이 유포된 지 오래돼서 그렇지, 홍상수의 필모그래피 전반기까지만 하더라도 그의 영화 속 인물들은 마치 몰래카메라에 찍힌 것 같은 감상을 불러일으켰고 그로 인해 리얼리즘을 구현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당시에도 나는 정반대 의견을 피력하고 다녔다. 예를 들어, 우리가 아무 각본 각색이 없는 일상을 몰래카메라나 CCTV로 촬영하면, 플롯이 없는 지루한 내용과 제거되고 다듬어지지 않은 잡음과 소음, 불필요하고 의미 없는 행동이 러닝타임을 온통 채우고 있기 때문에 극영화의 존재와 가치가 보장되지 않는다. 그런 영상은 관객이 아니라 범죄 단서를 잡아내려는 형사들의 야근에나 어울릴 뿐이다. 홍상수 영화가 사실적으로 다가오는 것은 도리어 세심하게 통제되고 강력하게 유도된 ‘인공물(人工物)’이기 때문이다. 플롯의 힘을 신뢰하는 자가, 플롯을 배제하거나 해체하는 ‘듯한’ 기법으로 인간 만사를 연출해 어떤 진실과 메시지를 드러내려 했기에 마치 리얼리즘처럼 감각될 뿐인 것이다. 따라서 홍상수 영화는 모더니즘이고 그는 리얼리스트가 아니라 모더니스트다. 이게 바로 ‘예술의 하얀 거짓말, 마술’이며 좋은 예술은 통상 그런 식으로 작동한다. 예술 작품이 지닌 표현과 본색에는 ‘차이’가 있고 이 격차에서 예술성과 미학이 빛을 발하는 것이다. 홍상수의 영화가 누군가의 취향에는 마음에 안 들 수 있어도 명백히 예술 작품일 수밖에 없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이런 이치를 잘 아는 예술가와 감상자가 많은 사회에 이해력과 격조가 있는 법이다.

반면, 표현과 내용이 무자비하게 일치하는 대표 격으로 ‘포르노’를 들 수 있다. 포르노는 그 겉과 속의 차이가 전혀 없다. 포르노 자체와 포르노를 보는 사람의 욕망 역시 그러하다. 도착증 환자가 아니면 포르노에서 아름다움을 느끼지 못하고 욕망 분출 뒤 역겨움에 이르는 것은 그런 까닭이다. 가장 질이 나쁜 질문이란 원하는 대답을 정해놓고 하는 질문이다. 그런데 이 사회는 그런 질문을 하는 사람이 대부분인 것도 모자라, 그런 부류가 대강 둘로 갈라져 있다. 한국 정치는 포르노적이고 한국 정치 대중은 그 수용 방식에 중독돼 있다. 대중 파시즘 단계를 지나 ‘포르노 정치’ 사회로 접어든 것이다. 그래서 그 어떤 비도덕이나 범죄도 비도덕과 범죄로 인식하지 못하는, 아니 인식한들 상관없어 하는 ‘수준’이 돼버린 것이다. 이념 문제인가, 수준 문제인가. 좌파 우파의 문제인가, 가짜 좌파 가짜 우파의 문제인가. 우리는 모두 이 ‘시대’의 산물이거나 그것에 대한 발버둥일 뿐이다. 함께 살고 있는 이상, 우리는 다 같은 포르노 수준이다. 이걸 인정해야 치료가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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