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정아의 아트 스토리] [527] 거대한 철판이 만든 낯선 공간
지난달 타계한 리처드 세라(Richard Serra·1938~2024)는 조각의 패러다임을 바꾼 미술가다. 그 이전까지 조각이란 사실적이거나 추상적인 형상을 만들어 좌대에 올려놓고 바라보는 대상이었다. 세라 이후로 조각은 공간의 구조를 바꿔 그 안에 들어선 사람들이 일상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움직이며 낯선 감각을 경험케 하는 독특한 장(場)이 됐다.
세라의 작품 세계를 집약해 보여주는 ‘시간의 문제’는 스페인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이 최대 규모 주 전시장을 위해 특별히 주문한 작품이다. 길이 130미터 너비 30미터에 달하는 이 전시장은 차라리 운동장이라고 하는 게 맞겠다. 세라는 여기에 부식 철판으로 만든 ‘조각’ 여덟 점으로 이루어진 ‘시간의 문제’를 설치했는데, 시시때때 작품을 교체하는 이 미술관에서 ‘시간의 문제’가 유일한 영구 전시품이다. 사실 전체 무게가 1000톤 이상이니 이들을 다른 데로 옮길 수도 없겠다.
각각의 작품은 어마어마한 철판의 크기와 무게가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마치 종이를 잘라서 돌돌 말았다가 이리저리 세워둔 듯, 부드럽게 휘어진 곡면과 불규칙하게 기울어진 나선형으로 이루어졌다. 관객들은 작품들을 하나씩 거쳐가면서 한 치 앞을 알 수 없이 갑작스레 나타나는 길거나 짧은 통로, 넓거나 좁은 틈, 고압적으로 높은 벽과 쓰러질 듯 위태로운 철판을 거쳐 기나긴 전시장을 빠져나가야 한다. 그 어떤 역사적 사건이나 종교적 상징과 무관한, 정해진 이름도 없는 부정형의 공간을 걸으며 관객들은 오롯이 스스로의 움직임과 감각, 흐르는 시간을 느낄 뿐이다. 사람들은 이런 세라를 ‘철(鐵)의 시인’이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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