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양갱’ 노래 제목이 ‘탕후루’였다면?

한겨레21 2024. 4. 15. 1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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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적의 글쓰기]글을 끌고 부르는 제목, 이 글의 제목은 누가 지었을까요
비비의 <밤양갱> 뮤직비디오 장면. <밤양갱>은 바라는 게 너무 많다며 떠나는 애인에게 ‘바란 건 밤양갱’뿐이었다고 말하는 노래다. 유튜브 갈무리

유기농 농산물을 판매하는 ‘한살림’ 매장에 가면, 포장지에 붙은 상표 때문에 피식피식 웃음이 나옵니다. ‘상품’ 자체가 ‘상표’거든요. 그냥 내용물이 상품명입니다. 봉지 안에 들어 있는 게 쌀이면 겉봉투에 ‘백미, 현미’, 우유면 ‘유기농우유’, 쌀과자면 ‘쌀과자’, 엿강정이면 ‘들깨엿강정’이라고 돼 있습니다. 기껏해야 만드는 법을 곁들인 ‘바삭한 감귤’ ‘반건조 무화과’ ‘냉동딸기’ 정도입니다. 당최 상품명을 뭐로 할지 고심한 흔적이 없습니다. 표리일체, 겉과 속이 같은 거죠. 심심하고 밍밍한 평양냉면 같습니다. 라면도 ‘감자라면’ ‘비빔라면’ ‘자장라면’이라고 할 뿐, ‘신라면, 안성탕면, 너구리, 짜파게티’처럼 고유한 상표를 붙이지 않습니다. 민달팽이처럼 그럴듯한 껍질(제목)로 화장하지 않습니다. 이것도 하나의 전략이라 할 수 있습니다. 포장에 신경 안 쓰고 제품 내용물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 거래하는 상품으로만 농산물을 보지 말고 몸을 돌보는 먹거리로 보라는 뜻이기도 할 테고요. 화려한 포장으로 물건을 팔지 않겠다는 의지도 엿보입니다.

상상을 붙들어 매는 ‘정박’

글도 그렇게 봐주면 좋겠죠. 제목은 좀 평범하더라도 흔쾌히 글을 읽어주면 좋으련만. 글 속에 놀라운 얘기가 들어 있는데…. 하지만 입장을 바꿔 우리가 독자라면, 우리도 제목만 보고 계속 글을 읽을지 말지 결정합니다. ‘읽기’라는 관문은 생각보다 낡고 단단히 잠겨 있어 제목이라는 열쇠가 없으면 들어가기 어렵습니다.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습니다. ‘그 사람이 쓴 글은 뭐든지 읽겠다’는 전적인 신뢰와 충성심이 없는 한, 제목을 보고 읽을지를 판단합니다.

글의 내용도 그렇지만, 제목도 그 자체로 독특함이나 참신함을 갖춰야 합니다. 요즘 인기 있는 노래인 <밤양갱>을 아시는지요? 제목 자체가 흥미를 끌죠. ‘노래 제목이 <밤양갱>이라고? 내용이 뭘까?’ 궁금해집니다. 헤어지자는 애인한테서 ‘너는 바라는 게 너무 많다’는 얘기를 듣지만, 내가 바란 건 밤양갱 하나뿐이었다는 내용입니다. 이렇게 서로에 대한 생각이 다르니 헤어질 만하죠. 이 노래는 제목이 살렸습니다. 결코 노래 소재로 삼지 않을 것 같은 ‘밤양갱’이 ‘내가 원한 것’이라는 추상적인 걸 상징하고 대표했습니다. 제목 자체가 참신하니 노래가 듣고 싶어집니다. ‘밤양갱’의 맛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으니 다른 음식으로 바꿔도 상관없습니다. 같은 세 글자인 ‘순댓국’ ‘소시지’ ‘탕후루’ ‘떡볶이’ ‘마라탕’으로 바꿨다면 어땠을까요? 어색하고 안 어울리죠. 노래의 주제를 생각해서 ‘사랑’이나 ‘이별’, 또는 ‘관심’으로 바꾸면 너무 진부하군요.

제목은 ‘예인선’을 닮았습니다. 예인선은 다른 배를 끄는 배입니다. 다른 배를 끌면서도 스스로 배여야 합니다. 다른 배와 연결되지 않은 예인선은 그냥 배일 뿐입니다. 예인선의 동력은 예인줄을 통해 끌려오는 배에 그대로 전달됩니다. 동력이 과잉되면 강한 장력 때문에 줄이 끊어지거나 풀려서 큰 사고가 납니다. 적당한 장력, 적당한 긴장이 있어야 합니다.

제목과 글도 상호의존적이지만 적당한 긴장이 필요합니다. 제목은 글을 부르고, 글은 제목으로 응축돼야 하죠. 제목은 글의 내용과 밀착된 듯하지만, 내심 스스로 말하고 싶어 합니다. 기호학자 롤랑 바르트는 그림에 붙이는 제목의 역할을 ‘정박 기능’이라 하더군요. 항구에 들어온 배가 떠내려가지 않게 닻을 내리고 한곳에 머무르게 하듯이, 제목은 그림을 감상하는 사람이 아무렇게나 해석하지 않게 상상을 붙들어 매는 기능을 한다는 것이죠. 예를 들어, 조지프 코수스라는 작가는 미술관에 실물 의자, 그 의자를 찍은 사진, ‘의자’(chair)라는 단어를 정의한 판을 동시에 전시해놓았습니다. 관람객은 실물과 이미지와 말 중 어떤 게 ‘작품’인지 헛갈립니다. 이때 제목이 실마리를 던져줍니다. 작가는 이 작품에 <하나이면서 세 개인 의자>(One and Three Chairs, 1965)라는 제목을 붙입니다. 우리 인식이나 생각은 이질적 성격을 갖는 실물과 이미지와 말이 서로 연결돼 형성된다는 걸 보여주는 거겠죠. ‘아, 의자는 서로 다른 방식으로 나뉘어 있지만 그 셋은 하나로 연결돼 있구나.’ 제목은 해석의 길잡이 역할을 합니다. 제목만으로도 메시지를 발산해야 합니다.

조지프 코수스 작가의 <하나이면서 세 개인 의자>. 가운데 실물 의자와 왼쪽에 그 의자를 찍은 사진, 오른쪽에 ‘의자’라는 단어를 정의한 판을 나란히 전시해놓았다. 위키미디어 제공

제목과 글은 ‘밀당’ 관계

물론 제목의 효과는 상대적이고 유동적입니다. 글 읽는 사람이 제목에 주목하는지 내용에 주목하는지 확실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제목과 글은 ‘밀당하는’(밀고 당기는) 관계입니다. 두 가지 감정이 갈등합니다. 글의 내용을 한마디로 응축하려는 욕심과 결국 그 욕심을 다 채울 수 없다는 현실이 팽팽하게 긴장하는 가운데 제목이 튀어 오릅니다.

가장 흔하게 제목을 붙이는 방법은 중심 글감(소재)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글이 무엇을 중심으로 전개될지 예고하죠. 대화에서도 처음 운을 뗄 때 자주 쓰는 방식입니다. ‘어제 어디를 갔는데’ ‘어제 누구를 만났는데’라고 말할 때의 ‘어디’ ‘누구’가 중심 글감이 됩니다. 음식에 얽힌 이야기를 쓴다면, ‘청국장’ ‘도다리쑥국’ ‘누룽지’ ‘연포탕’처럼 자신이 다루는 글감을 제목으로 붙이는 것이죠. 책 제목으로는 <스타벅스 일기>(권남희), <사는 마음>(이다희), <문학이 필요한 시간>(정여울), <내밀 예찬>(김지선)처럼 붙이는 방식입니다.

흔한 방식이지만 너무 만만하게 보지는 마세요. 철학자 김영민이 쓴 <인간의 글쓰기>라는 책의 제목을 음미해보시기 바랍니다. 700쪽 가까이 되는 두꺼운 책 어디에도 ‘인간의 글쓰기’라는 대목이 나오지 않습니다. ‘글쓰기’는 인간만이 하는 행위이니 ‘인간의’라는 수식어는 불필요합니다(‘고양이의 글쓰기’라면 모를까). 불필요한데도 썼다는 건 그 말이 필요했기 때문이겠죠. 평생 매일 글을 쓴다는 저자는 ‘글쓰기는 (인간) 삶의 결핍과 어긋남을 드러내는 표식일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는 것입니다. 글쓰기를 삶의 지평과 연결해서 살펴보겠다는 뜻이겠죠. 책을 읽으니 글쓰기는 ‘인간의’ 글쓰기일 수밖에 없더군요. 양꼬치나 산적에 쓰는 꼬챙이처럼 다소 산만하게 펼쳐진 책의 내용을 하나로 관통해 맞춤하게 잘 지은 제목이었습니다.

‘글감 찾기’가 탈락한 이유

요즘에는 문장 형식으로 주제를 슬로건처럼 ‘분명하게’ 밝히는 제목을 많이 쓰더군요. <이야기는 오래 산다>(최재봉), <엉망으로 열심히 살고 있습니다>(천선란 등), <가슴으로도 쓰고 손끝으로도 써라>(안도현) 같은 예들입니다. 주제를 ‘흐릿하게’ 밝히는 제목도 유행이더군요. <이름 없는 것도 부른다면>(박보나), <친구 같은 나무 하나쯤은>(강재훈), <지구를 쓰다가>(최우리), <나의 아름답고 추한 몸에게>(김소민) 같은 제목은 일부러 말을 끝맺지 않음으로써 궁금증을 유발하는 효과를 내고 있습니다. <북한산에서> <92년 장마, 종로에서> <가을 우체국 앞에서> 같은 노래처럼 시공간적인 배경을 제목으로 붙이는 방식도 이런 효과를 기대하는 것이죠.

반드시 그런 건 아니지만, 명사형 제목은 글의 주요 글감이나 핵심어(키워드)인 경우가 많고, 문장형 제목은 그 글에서 궁극적으로 하고 싶은 말(주제문)인 경우가 많습니다. 생활 글쓰기(수필)는 명사형이 흔합니다. 누구를 설득하거나 주장하는 게 아니니까요. 신문이나 잡지에 문장형 제목이 많은 건 핵심 주장을 먼저 보여줘야 바쁘고 까다로운(!) 독자의 눈길을 끌 수 있기 때문이겠죠.

민망한 얘기지만, 저는 연구자로 살다보니 원고(논문)의 제목이 늘 ‘~에 대한 연구’더군요. 기껏 멋을 부린 제목이 ‘~의 제자리 찾기’ ‘~의 새로운 쟁점’ ‘~을 다시 생각한다’ 정도입니다. 전공자가 아니라면 아무도 읽고 싶지 않을 제목입니다. 제가 <한겨레21>에 원고를 보낼 때 붙이는 제목과 여러분이 받아보는 제목은 대부분 다릅니다. 저는 주로 명사형으로 보내는데, 편집부에서는 문장형으로 바꾸더군요. 제목을 달아 보내지만, 번번이 데스크(아마도 편집장님!)에서 제목을 다르게 뽑아주시거든요. 16편의 글 중에서 애초의 제목대로 실린 게 3편에 불과합니다(타율 1할8푼8리). 저는 호기심을 자극하는 제목을 붙이는 재주가 없고, 잡지의 제목 스타일에 익숙하지도 않기 때문일 겁니다. 원고 내용의 핵심 글감(소재) 중심으로 제목을 붙이다보니 별다른 매력을 풍기지 않는 제목만 답니다. 분하게도 번번이 실패합니다.

실제로 한번 볼까요? 따옴표 안의 제목이 제가 붙인 것이고 괄호 안이 편집부에서 붙인 것입니다. ‘글감 찾기’(→ 세상 모든 것은 언제 ‘진짜 글감’이 되는가), ‘두 개의 눈, 드러내면서 감추는’(→ 김밥을 말할 때 말하지 않은 것들), ‘기억과 시간 늘리기’(→ 무도의 시간처럼 던지고 던져져라), ‘상상력을 자극하는 장면 제시’(→ 당신의 흔한 문장에는 ‘낯섦’이 있는가), ‘추상과 구체 넘나들기’(→ ‘사과’를 보면 ‘개’가 생각난다고요?), ‘나는 어떤 문체를 갖고 있나?’(→ 형식이 먼저다. 처음에 형태를 잡고 의미를 담는다), ‘문장이라는 도깨비’(→ 문장의 길이를 어떻게 할까… 군악대보다 새떼의 감각으로), ‘글 쓰는 사람의 조건: 시작하는 사람’(→ 아무 목적 없이 시작하면 올지도 몰라 글 쓰는 계기), ‘주제, 보여주지 않을수록 좋다’(→ 글쓰기 주제는 따오기? 보일 듯이 보이지 않아야 좋다). ‘살아남은’ 제목은 ‘새로운 말의 세계를 건설하는 망치, 은유’ ‘나쁜 글만이 가슴에 남는다’ ‘시점, 피할 수 없지만 뒤집을 수는 있다’ 정도입니다.

어떤가요? 많이 다르죠. 편집부에서 다시 뽑은 제목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모두 본문에 있는 문장에서 뽑았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 문장을 찾지 못했지만, 핵심을 관통하는 문장을 편집부에서는 찾았던 거죠. 그게 경험이자 안목입니다. 제목을 달리 뽑으면 내 글을 읽는 사람 숫자도 달라집니다.

‘팥’이 아닌 ‘팥빵’을 만들자

그러니 제목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약간 과장하면 ‘제목이 전부’입니다. 제목은 글의 내용과 연결돼 있으면서도, 분리돼 있습니다. 제목은 내용의 자연스러운 결과가 아닙니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제목은 제목만으로 고유한 의미를 갖춰야 합니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나는 거긴 합니다. 하지만 제목은 추수한 팥 알갱이 하나를 그냥 내놓는 게 아닙니다. 그 팥으로 팥죽이나 팥빵, 팥떡을 만들어 내놓아야 합니다. 팥이 들어 있는 건 분명하지만, 팥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제목은 내용을 초과합니다. 입에서 수박씨 뱉어내듯이 쉽게 퉤 뱉어지는 게 아닙니다. 쓰기 전이든, 다 쓰고 나서든 시간을 따로 내어 ‘제목을 무엇으로 달까?’를 고민해야 합니다. 애초에 붙였던 제목도 글의 내용과 잘 어울리는지 고민해야 합니다. 그러면 됩니다.

그나저나 과연 이번 원고의 제목도 편집부에서 다르게 고쳤을까요? 다음 원고에서 알려드리겠습니다.

김진해 경희대 교수, <말끝이 당신이다> 저자

[독자 글]

‘나의 오늘 아침식사’라는 주제로 여덟 분이 글을 보내주셨습니다. 똑같은 장면을 쓰되, 분위기나 태도를 달리하여 두 편을 쓰는 거였습니다. 같은 글감을 다르게 써서 그런지 새롭고 깊이 있는 통찰이 담긴 글이 많았습니다.

아침식사(?)로 커피와 담배 두 개비가 전부라는 영희님은 시점을 달리하여 전혀 새로운 글 두 편을 찰지게 쓰셨더군요. 샬랄라님은 첫 글에선 양념만 남은 주꾸미볶음으로 아침을 준비하며 곤궁했던 가정사를 떠올리다가 결국 부대찌개를 먹었다는 내용이었는데, 두 번째 글에선 처음부터 부대찌개로 식사 준비를 하는 장면으로 바꿔 쓰셨습니다. 정선님은 음양탕에서 시작해 현미밥을 먹고 요거트에 식후 커피 한잔으로 마무리되는 아침 식사의 전 과정을 보여주다가, 밥상으로 초점을 옮겨 현미밥과 함께 여러 반찬을 정성스레 준비하면서 자연과 교감하는 삶을 보여줬습니다. 혜욱님은 청국장 냄새에 거부감을 보이는 자녀의 얘기로 시작하면서도 처음엔 청국장에 얽힌 어린 시절을 떠올리다가, 두 번째 글에선 청국장 조리법에 집중해 글을 풀어내셨더군요. 체스카님은 아침엔 커피 한잔 마시는 것이 전부였는데 오랜만에 도다리쑥국을 끓였다는 글인데, 처음엔 남편과 함께 먹는 장면에 주목하더니 두 번째 글에선 투병 중인 친구를 위해 도다리쑥국을 끓이게 된 사연을 중심으로 쓰셨습니다. 영미님은 누룽지를 먹고 있는데 새가 창문에 부딪혀 떨어진 듯 창틀에 깃털이 달려 있었다는 얘기를 쓰셨는데, 말하는 이를 사람과 새로 완전히 바꾸어서 씀으로써 같은 장면인데도 전혀 다른 정서를 불러일으켰습니다. 정윤님은 아침을 반드시 챙겨 먹는 이야기를 처음에는 자신을 중심으로, 나중에는 밥을 먹지 않는 아내와 대비하면서 글을 쓰셨는데 의식적으로 단문을 사용해 글에서 속도감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담이님은 친구들과 밤새워 술을 마시고 오래간만에 언니네 집에 가서 튀김우동 컵라면을 먹은 에피소드를 썼는데, 언니에 대한 이야기를 주변부에 두었다가 중심부로 끌어들이는 방식으로 글에 변화를 줬습니다.

[여러분의 글을 보내주세요]

우리는 살면서 무수한 오해를 하고, 오해를 받습니다. 삶 전체가 오해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오해받으면 억울하고, 오해하면 미안합니다. 기억에 남는 오해의 장면을 한 편의 글로 써주세요.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자신이 쓴 글에 어울리는 제목도 붙여주세요.

다음호부터는 독자 글 중 빼어난 것이 있으면 함께 실어보려 합니다. 가끔 저 혼자 읽기 아까운 글이 있더군요. 많이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주제: 오해

분량: 1천 자 정도(띄어쓰기 포함)

마감: 2024년 4월28일

보낼 곳: han21@ 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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