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첩 몰려 12년 옥살이…‘27년 뒤 무죄’ 국가는 사죄 안 했다

한겨레 2024. 4. 15. 1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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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신이의 발자취] 장기수 박순애 선생을 기리며
고 박순애 선생의 빈소. 필자 제공

고문에 의해 간첩으로 조작된 사람 가운데 억울하게 감옥 생활을 한 사람들이 있다. 외세와 분단, 냉전과 대결 시대의 희생양들이다. 그들 가운데 박순애 선생이 있다. 법정에서 진실을 아무리 말해도, 부당하다고 해도, 몸부림치면서 외쳐도 소용이 없었다. 결국 사법부는 박순애를 간첩이라고 판결했다.

박순애 선생은 1930년 4남3녀 가운데 막내딸로 전남 남원군 아영면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한약방을 했으며 오빠들은 교사였다. 아영면에서 여성동맹위원장을 한 선생은 19살에 명륜학원(지금 전북대) 법과에 들어갔다. 2학년 때 한국전쟁이 일어나서 학교에 다니지 못했다. 여성 변호사의 꿈을 꾸던 중 어머니가 돌아가시는 바람에 홀로 생활하다가 재일교포를 만나 결혼을 선택하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서 ‘김대중 석방’에 서명했다
1977년 중정에 끌려가 고문·구타
간첩으로 조작돼 12년 감옥살이

출소 뒤 무연고 홀몸노인으로 살다
재심 통해 2016년 대법원 무죄 확정
파출부·간병인 등 버겁게 생활해도
나누고 베푸는 마음만은 항상 풍성

박순애 선생이 조작 간첩이 된 직접적 계기는 일본에서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총련) 회원 집에 머무른 것이었다. 그것은 취직하기 위해서 간 것이었다. 1977년 7월29일 불법 체류자로 체포돼 요코하마 수용소에 잡혀갔다가 1977년 9월9일 한국으로 송환됐다. 그때 나이가 47살이었다. 바로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고문과 구타 등이 이어졌다.

박순애 선생이 일본에 머물렀던 1970~1977년은 박정희의 군사독재와 겹치는 시기였다. 1973년 김대중이 일본에서 망명 중 납치되는 사건이 벌어졌을 때 재일교포 사회에서 김대중 석방 운동을 벌였다. 박순애 선생은 정치적 신념보다는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석방 운동에 서명했다. 이것을 빌미로 중앙정보부 조사관들은 “1972년 11월부터 1973년 1월 사이 총련에 포섭돼 북한을 다녀와 지령을 수행했다”는 자백을 강요했다. 사실 그때 박순애 선생은 일본의 한 호텔에서 근무 중이었다. 하지만 조사관들이 불러준 대로 쓸 수밖에 없었다. 쓰지 않으면 고문과 구타를 하기 때문에 무서워서 시킨 대로 쓴 것이다. 37일 동안 불법 감금된 채 있다가 검찰에 송치됐다.

1978년 4월7일 서울 형사지방법원은 국가보안법과 반공법 위반으로 징역 20년에 자격정지 15년을 선고했다. 그해 서울고등법원에서 징역 15년과 자격정지 15년을 선고받고 대법원에 상고했지만 곧바로 기각됐다.

생전의 박순애 선생. 필자 제공

박순애 선생은 감옥생활을 하면서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자신이 왜 징역을 살아야 하는지 이유를 몰랐다. 그러던 중 1980년 5월 광주민중항쟁으로 학생들이 광주교도소에 입소하면서 군사정권이 국가보안법으로 간첩을 만들려고 한 이유를 알게 됐다. 옥중 생활 12년 동안 누구 하나 면회 온 사람이 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오빠들도 중앙정보부에 끌려가서 고문을 받는 등 박순애 선생이 간첩이라는 사실이 가족들을 옭아매고 있었기 때문이다.

박순애 선생은 억울한 옥살이를 12년3개월 동안 하다가 1989년 겨울에 출소했다. 그때 나이 59살이었다. 막상 감옥에서 나왔지만 가족도 집도 없는 무연고 홀몸노인이 되었다. 파출부 생활을 하다가 건강이 악화해 더이상 할 수 없었다. 주변의 도움으로 임대아파트를 소개받았지만 보증금을 마련하지 못하다가 겨우 융통해 1992년 이사했다. 하지만 보안관찰법이 있어서 형사들이 따라다녔다.

2001년 보안관찰이 해제되면서 여권 발급이 되자 일본에 사는 지인을 만나러 갔다. 그동안 억울하게 감옥살이했던 것과 젊은 청춘을 보낸 것이 한이 되어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2006년 진실화해위원회에 진실규명을 신청했을 때 그 지인이 증인을 서게 됐다. 그 뒤 ‘진실규명 불능’으로 어려움도 있었지만 2012년 5월25일 법원은 재심 개시를 결정했다. 2016년 6월9일 대법원은 무죄를 확정했지만, 간첩으로 몰아간 국가는 사죄하지 않았다.

박순애 선생과 필자 장헌권 목사. 필자 제공

필자와의 인연은 광주 기독교회협의회(NCC)에서 설과 추석 명절에 장기수 선생님들과 함께하는 자리에서 시작했다. 재심하던 사이 고관절 수술로 거동이 불편해진 선생을 필자가 차로 모시고 다녔다. 간병인으로 일하다 마지막에 요양병원에 입원한 박순애 선생은 외롭고 힘들게 살면서도 마음만은 풍성하여 나누고 베풀려고 하셨다. 전북 고창 선운사로 장기수 선생님들과 나들이했을 때는 어린아이가 소풍 간 것처럼 좋아하셨다. 분단된 조국에서 조작된 간첩으로 살다가 간첩이 아니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 하루하루 버겁게 사셨던 박순애 선생은 지난 4월7일 향년 95살의 나이로 별세했다. 흔한 추모 화환 하나 없이 외로운 길이었지만 장례식장 밖에는 봄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꽃길 따라 하늘나라 가신 박순애 선생의 안식을 기원한다

장헌권/목사·광주전남민주화동지회 상임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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