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보험 사기로 미수금 메꾸려다 덜미…횡령·보조금 부정 수급까지 적발

유종헌 기자 2024. 4. 15. 1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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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여름, 서울동부지법에서는 특이한 재판이 열렸다. 주류업체 자금 약 5000만원을 횡령한 혐의로 2심 재판을 받던 직원이 “사실 나는 이 회사 직원이 아니다”라고 주장한 것. 이 직원은 1심에선 혐의를 모두 인정하고 실형을 받았었는데, 갑자기 말을 바꾼 것이다. 반면 증인으로 출석한 주류업체 대표와 이사는 “저 사람은 우리 회사 직원이 맞는다”고 맞섰다. 어떻게 된 걸까.

사건의 전말은 이랬다. 서울의 한 중견 주류 도매업체 대표 A(55)씨는 평소 거래처 사장들이 미수금을 발생시킬까봐 걱정이었다. 이에 A씨는 거래처 사장들을 회사 직원으로 허위 등재시킨 다음 신원보증 보험에 가입하도록 했다. 미수금이 발생하게 되면 마치 직원이 회삿돈을 횡령한 것처럼 서류를 꾸며 보험금을 타내기로 한 것이다.

서울동부지검. /뉴스1

실제 거래처 사장인 B(50)씨가 약 5000만원에 가까운 미수금을 발생시키자 A씨는 계획을 실행에 옮겼다. B씨에게 “보험금을 타내려면 유죄 확정 판결문이 필요하니 협조해달라. 그러면 미수금은 없는 걸로 해주겠다”고 제안한 것이다. B씨가 이를 수락하자 A씨는 “B씨가 회삿돈 5000만원을 횡령했다”고 B씨를 허위 고소했고, B씨도 허위 자백했다.

그런데 완벽할 것 같았던 A씨의 계획은 엉뚱한 곳에서 틀어졌다. B씨가 1심에서 징역 8개월을 선고받고 법정 구속된 것이다. 막상 구치소에 갇히자 생각이 바뀐 B씨는 2심에서 “사실 A씨 회사 직원이 아니다”라고 진술을 번복했다. 반면 A씨는 “B씨는 우리 회사 직원이다”라고 허위 증언했다. 결국 B씨는 2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A씨 회사 직원으로 단정할 수 없다’는 이유였다.

재판을 지켜보던 검찰은 2심 선고 직후 위증 수사에 착수했다. 그 결과 A씨가 B씨를 허위 직원으로 등재시키기 위해 가짜 장부를 준비하고 진술을 조작한 사실이 드러났다.

◇위증 수사서 시작…보조금 부정 수급·횡령까지 드러나

그런데 이 사건을 수사하던 서울동부지검 형사2부 최혜민(변시 4회) 검사 눈에 A씨의 다른 범죄 정황이 포착됐다. A씨 회사에 직원으로 등재된 20여명 중 실제 직원은 4~5명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모두 거래처 사장, 지인 등 ‘가짜 직원’이었던 것이다. 최 검사는 이를 수상히 여겨 A씨 회사 자금 흐름에 대한 추가 수사를 벌였다.

그 결과 A씨가 코로나 사태에 따른 고용유지지원금 2억7000만원을 부정수급 한 사실이 드러났다. A씨는 2020년 4월~2022년 7월 총 15명을 가짜 직원으로 내세우고 출근부, 급여 장부 등을 조작해 각종 국가 보조금을 허위로 받아냈다. A씨가 부정수급한 보조금 종류도 휴업·휴직 급여부터 ‘워라밸 지원금’까지 다양했다.

한편 A씨가 2017~2023년 회삿돈 총 5억5000만원을 횡령한 사실도 드러났다. A씨는 모친 등을 가짜 직원으로 등재하고 급여를 허위 수령하는 등의 방식으로 회삿돈을 빼돌려 본인 및 가족의 주택·차량 대금으로 사용했다.

/일러스트=조선디자인랩 이연주

그의 범행이 오랫동안 드러나지 않았던 것은 A씨가 매우 치밀하게 움직였기 때문이다. A씨는 10년간 본인 명의의 은행 계좌를 가진 적도 없었고, 집 주소도 다른 곳에 신고해뒀다. 그는 평소 현금만으로 생활했고, 은행 계좌가 필요할 땐 지인 명의의 차명 계좌를 이용했다. 횡령한 돈도 차명 계좌나 현금 인출 등 세탁 과정을 거쳐 사용했고, 재산도 모두 차명으로 돌려놨다.

A씨는 또 회사 장부가 유출될 것을 우려해 자금 관리는 컴퓨터가 아닌 수기로만 했다고 한다. 장부는 금고에 보관했었다.

이런 꼼꼼한 계획에도 불구하고 A씨의 범행은 B씨의 진술 번복을 계기로 모두 적발됐다.

◇'셀프 무고’해놓고 형사보상 청구했다 기각

한편 B씨는 횡령 혐의 무죄가 확정된 직후 국가에 형사보상을 청구했다. 형사보상은 수사·재판 과정에서 억울하게 갇힌 사람에 대해 국가가 손해를 보상해 주는 제도다. 1심에서 실형을 선고받았던 B씨는 2심에서 무죄로 풀려날 때까지 6개월 간 구치소에 갇혀 있었다. 법원은 지난해 9월 B씨에게 4600만원 지급을 결정했다.

그러나 검찰은 이 결정에 대해 즉시항고 했다. B씨가 보험 사기를 목적으로 ‘셀프 무고’해 구속됐기 때문에 형사보상 대상이 될 수 없다는 취지였다. 형사보상 및 명예회복에 관한 법률은 본인이 수사 또는 심판을 그르칠 목적으로 거짓 자백을 해 유죄 재판을 받게 될 경우 보상청구를 기각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결국 대법원은 지난해 11월 형사보상 인용 결정을 파기했고, 지난 1월 B씨의 보상 청구가 최종 기각됐다.

서울동부지검 형사2부(부장 박명희)는 지난 2일 A씨와 B씨, A씨 회사 이사인 C(66)씨 등을 무고·위증·보험사기 미수 혐의로 불구속 기소했다. B씨에게는 ‘무고’ 대신 ‘무고방조’ 혐의가 적용됐는데, 이는 스스로 무고하는 경우는 처벌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 A씨는 국가지원금 부정 수급 혐의(보조금관리법·고용보험법 위반, 사기), 회사 자금을 횡령한 혐의(특경법상 횡령)로도 기소됐다.

최혜민 검사는 “보험 사기로 5000만원을 타내려다 덜미를 잡혀 다른 범행까지 적발된 사례”라면서 “A씨의 치밀한 자료 은폐 탓에 증거 확보에 어려움을 겪었지만, 수 개월 간 수사 끝에 결국 국고털이범의 실체를 밝혀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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