닥터 지바고가 들려주는 슬기로운 매칭의 기술 [조원경의 현인들의 경제적 조언]

2024. 4. 15. 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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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닥터 지바고 예고편 스크린샷

보리스 파스테르나크(1890. 2- 1960. 5)는 소비에트 연방의 시인이자 소설가다. 모스크바에서 화가인 아버지와 피아니스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대표작 ‘닥터 지바고’는 그의 유일한 소설이다. 1958년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됐으나, 수상을 거부했다. 수상의 배경과 그 거부가 모두 정치적 배경에 바탕을 둔 것이어서 오랫동안 논란의 대상이 됐다. 세월이 한참이나 흐른 1988년 스웨덴 한림원이 그의 아들 예브게니에게 대리 시상을 하기는 했지만 살아생전 파스테르나크는 노벨상 메달을 구경조차 못 했다. 소련 당국은 러시아 격동기 인텔리의 비극적인 사랑과 운명을 그린 소설을 탐탁지 않아 했다. “10월 혁명과 인민, 소련 사회건설을 비난한 부르주아 로맨스 소설”이라는 것이 이유였다.

“살아있는 것은 얼마나 멋진가. 근데 왜 이렇게 항상 아픈 걸까?”

삶은 희망차지만 고달프기도 하다. 그런 삶을 치료하는 경제학자는 어찌 보면 병든 사람을 구하는 의사와 닮았다. 경제 문제가 발생하면 어떤 국가나 사회는 시장에 기초해 해결한다. 어떤 국가나 사회는 반대로 정부가 직접 개입해 문제를 해결한다. 여기 러시아가 사회주의로 들어서기 전에 한 의사가 있었다. 그의 이름은 유리 지바고다. 그는 8세의 나이에 고아가 됐다. 입양된 후 생에 감사하며 지내는데 어느 겨울밤, 크렘린궁 앞에서 노동자들과 학생들이 기마병에게 살해되는 것을 본다. 사회의 어두운 면을 목격한 그는 빈곤한 사람을 돕기 위해 의사가 되고자 한다. 러시아에서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나기 전에 사람들은 이런 말을 했다. 거대한 산맥이 가른 두 개의 세상이 있었다. 기쁨과 절망이 교차하는 곳이 당시 러시아였다. 귀족과 천민으로 양분된 나라 혹은 칼날과 쟁기의 나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겸손과 자만이 서로 목을 죄는 곳이 그때의 러시아였다.

의대 증원 계획을 둘러싼 정부와 의사들의 갈등이 점점 더 고조되고 있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의사가 돈을 추구하는 것을 나무랄 수 없다. 돈이 안 되는 필수 의료와 지방 소멸로 몸서리를 치는 지역의료에 온기를 불어넣어야 하는데 이게 마냥 쉽지 않다.

1958년 1월에 출판된 영어판 ‘닥터 지바고’.책 뒷면에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 사진이 실렸다.

의사 지바고를 떠올리며 이런저런 생각을 해본다. 한 드라마 대사에서 “가장 중요한 건 절대 환자보다 먼저 포기하지 않는 것”이라 했다. 드라마와 달리 의사의 마음이나 진정성은 자본주의 체제를 움직이는 근간이 아닌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번 돈으로 자선활동을 하는 기업이나 의사가 희망이 되어 이 사회를 지탱하고 있다. 자신의 삶을 통해 더 나은 자본주의를 만드는 그런 인물들은 우리를 늘 숙연하게 만든다. 지바고를 생각하는데 고(故) 이태석 신부의 삶이 떠오른다.

이태석 신부는 1987년 인제대 의대를 졸업하고 의사가 됐다. 이후 사제가 되기로 결심하고 광주 가톨릭대에 편입했다. 천주교 사제가 된 그는 2001년 남수단 시골 마을 톤즈로 향했다.

이태석 신부는 내전이 끝나지 않은 남수단에서 병실 12개짜리 병원과 학교, 기숙사를 짓고 구호, 의료, 선교 활동을 벌였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처음에는 남수단이 워낙 가난하니까 여러 가지 계획을 많이 세웠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갈수록 같이 있어 주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떤 어려움이 닥친다 해도 그들을 저버리지 않고 함께 있어 주고 싶었다.”

닥터 지바고가 소련에서 출판이 거부되자 CIA는 비밀리에 출판하기 위해 개입했다. 프랑스의 몽디알이라는 출판사를 통해 포켓판 러시아어판 닥터지바고가 출판됐다. [CIA 자료]

지바고는 당시에 의사로서 어떤 직업관을 가졌을까? 러시아 혁명은 국가 체제뿐만 아니라 개개인의 삶까지 송두리째 바꿔 놓았다. 그 격동의 혁명 시기를 살아낸 주인공 유리 지바고 역시 의사로서의 소명을 다하고자 했다.

아내가 있는 지바고는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군의관으로 참전한다. 그곳에서 역시 사랑하는 이를 찾아 헤매는 종군간호사가 된 라라와 운명처럼 재회한다. 두 사람은 모스크바에 있을 때부터 인연의 실타래로 연결돼 있었다. 사선을 같이 넘나드는 시간을 보내면서 그들의 끌림은 더 강한 동아줄이 되어 서로를 강하게 엮는다. 지바고는 전쟁터에서 잠까지 줄여가며 한 명의 병사라도 더 살리기 위해 애썼다. 전쟁에서 그가 목격한 건, 황제의 의미 없는 명령에 애꿎은 목숨을 버려가는 러시아 동포들의 절규였다. 간신히 살려낸 병사를 덧없이 다시 잃어야 하는 세상이었다.

전선의 야전병원에서 함께 일하게 된 지바고와 라라는 끌림을 넘는 사랑 자체로 비화한다. 라라는 헌신적으로 다친 병사를 치료하는 유리 지바고에게 존경심을 갖게 된다. 유리 지바고는 기구한 운명의 라라에게 깊은 연민의 정을 갖게 되며 둘은 목숨보다 소중한 사랑의 화신이 된다.

영화 닥터지바고의 한 장면인 눈속궁전

2010년 대장암으로 이태석 신부는 48세 나이로 가난한 나라에서 선종했다. 세월이 흘러 초췌하게 병든 지바고는 전차에 타고 있다. 문득 창밖을 보는데 거리를 걷는 오래전 헤어진 라라를 발견한다. 그는 뛰어내리지만, 라라를 부르지 못하고 심장마비로 쓰러지고 만다. 죽어가는 그를 보며 소설을 관통하는 그의 삶의 목표에 대해 생각해 본다. 지바고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사람들을 위해서는 의사가 되고 싶지만, 나를 위해서는 시를 쓰고 싶어.”

‘닥터 지바고’를 쓴 러시아의 시인이자 소설가인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 ‘겨울밤’을 음미해 본다. 눈보라가 휘몰아쳤다. 세상 끝에서 끝까지 휩쓸었다. 식탁 위엔 촛불이 타고 있었다. ‘겨울밤’의 배경은 암흑 속의 러시아 혁명기이다. ‘눈보라’는 시베리아까지 휘몰아친 혁명의 소용돌이를 상징한다. ‘촛불’은 시대의 광풍 앞에 위태롭게 흔들리는 개인의 삶을 의미한다.

2024년 우리가 마주하는 현실은 남수단도 러시아 혁명도 아니다. 그 속에서 우리는 국가의 역할과 국민으로서의 의사의 임무, 의료산업의 발전 방향을 생각할 수밖에 없다.

생명을 지키는 게 의사나 군인의 역할만은 아니다. 생명을 지키는 경제학자가 있다면 누군가는 의아하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 의사 출신 경제학자로는 프랑스 중농주의 경제학자 케네가 있다. 케네는 의사로서의 경험을 토대로 혈관의 흐름을 본뜬 ‘경제표’를 만들어 경제 전반의 흐름을 보여주고자 했다. 문제는 부가가치의 흐름을 만드는 계급을 농민으로만 국한하고 미래 산업의 동력을 농업으로 봐서 경제 전체의 흐름을 제대로 읽지 못한 게 치명적 오류였다. 이를 흔히 ‘케네의 오류’라고 한다.

그로부터 300여 년이 지난 후 경제학자 중에서 진짜 많은 사람의 생명을 구한 인물이 탄생했다. 수학을 응용한 게임이론으로 신장 이식을 확대해 숱한 생명을 구한 노벨 경제학자 앨빈 로스다. 그는 장기 거래처럼 어떤 사람은 하고 싶은데 사회 전체적으로 부정적인 시각을 가진 ‘혐오 시장’에 더 큰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로스는 누군가에게 절실한 거래를 어떻게 문제없이 성사할지 경제학자들이 연구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인간을 구하고자 하는 따뜻한 인류애의 향기’가 묻어나는 시장을 설계하고자 한 그를 보며 우리 사회가 지향하는 바에 대해 생각해 본다. 그의 이론은 안정적 ‘매칭(Matching) 문제’에 입각하고 있다. 공교롭게도 그는 의대생과 병원에 관한 매칭 이론을 이야기했다.

1940년대 미국에서 의대 졸업생과 의대 입학 예정 학생들이 3~4년이 지나 졸업한 후에나 근무할 병원을 찾는 현상이 나타났다. 제대로 작동하는 인력 자원 배분 기구가 없어 의사결정을 서둘러야 한다면 어떻게 될까? 이는 의대생과 병원 모두에게 손해로 나타난다. 병원은 경기 변동과 전공 변화에 따라 고용 인원을 조정하기 어렵다. 학생은 공부도 해보기 전에 미래 진로를 결정해야 한다. 어떻게 해야 의대생과 병원을 공정하게 매칭하는 제도를 설계할 수 있을까에 대해 앨빈 로스는 고민했다. 만약 이상적으로 작동하는 인력 자원 배분 기구가 있다면 의대생과 병원은 선호를 솔직하게 표출하려고 할 것이다. 솔직한 선호를 바탕으로 의대생과 병원을 매칭하되, 그 결과가 효율적이고 안정적이어야 한다는 게 앨빈 로스 교수의 주장이다. 그는 잠정 수락 알고리즘을 이용해 의대생들이 병원에 선호를 솔직하게 나타내도록 하고 의대생과 병원 사이에 효율적이고 안정적인 매칭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 지금 우리는 그런 선호와 안정적인 매칭을 찾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있나?

의사 정원 확대는 우리 사회의 불안정한 매칭을 해결하기 위해 불가피한 면이 있다. 다만 그 과정에서 서로의 의사를 존중하고 갈등을 최소화할 때 우리 사회는 한층 더 성숙할 수 있다. 러시아 혁명은 사회주의를 몰고 왔지만, 사회주의는 이상과 달랐다. “돈이면 다 된다”라는 천민자본주의가 팽배한다면 그건 기성세대 모두가 공범자일 수 있다. 의사가 돈벌이의 수단으로만 전락하는 것은 너무 슬프지 않나? 그렇다고 국민의 한 일원인 의사에게 무조건적인 희생만 강요해서는 안 된다. 서로가 협상으로 제대로 된 매칭을 만들어 내는 게 무엇보다 중요한 상황이다.

앨빈 로스(왼쪽 노란색 가운)가 2006년 신시내티 대학 의료 센터에서 진행된 신장이식 수술을 참관하고 있다. 로스와 동료들은 수학을 응용한 매칭기술이론으로 신장 이식을 확대해 숱한 생명을 구하는 데 기여했다.[엘빈 로스 : 매칭 마켓 유튜브 캡처]

앨빈 로스는 빈부격차가 있는 사회에서 개인이 더 나은 사회적 지위로 옮겨 갈 수 있는 사다리가 흔들려서는 안 된다는 점을 강조했다. 로스는 상대방이 부자인 점을 쿨하게 인정하되 빈자도 부자가 될 기회를 잡을 수 있도록 시장을 설계하고, 그런 과정에 문제가 없는지 꾸준히 점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시장 설계와 제도 마련을 다 중시한 것이다. 모두에게 공평한 기회가 주어지지 않으면 민주주의의 기반이 흔들릴 수밖에 없다는 그의 말 속에서 의료제도의 포용성을 한 번 더 생각하게 된다. 유리 지바고와 앨빈 로스는 이렇게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소요가 멎는다. 난 무대 위로 나선다. 문설주에 기댄 채 멀리 들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나의 생애에 무엇이 일어나고 있을까. 밤의 어둠이 나를 향하고 있다. 이제 너의 소리를 듣겠다.”

더 나은 사회 건설을 위해서는 서로 간 양보와 합의로 상처를 치유해야 한다. 그래야 우리는 앨빈 로스가 말하는 안정된 의료 시장을 제대로 설계할 수 있다. 닥터 지바고에게 삶은 위와 아래의 혁명 다툼도 아니었다. 우와 좌의 내전도 아니었다. 그저 이 세상을 온전히 살아내고 사랑하는 것뿐이었다. 그것이 우리 사회를 온전히 지탱하는 힘이라 하겠다.

bonsang@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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