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송된 택배 상자가 감쪽같이 사라졌다… 누군가 돌려주러 오지 않을까[소설, 한국을 말하다]

장상민 기자 2024. 4. 15. 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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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김혜진
노동 - 사람의 일
일러스트 = 토끼도둑 작가

주민센터로 들어서자마자 희수는 그곳의 분위기가 어딘가 이상하다는 것을 알아챘다.

사람들로 붐비는 민원실은 여느 때와 다름없어 보였지만 뭔가가 그곳의 활기를 억누르고 있는 듯했다. 청원 경찰(얼마 전, 공무원과 민원인 간의 다툼 건으로 새로 배치된 사람이었다)이 한 손을 허리춤에 올린 채 경계하듯 그녀를 훑어보았다. 아니, 그의 시선은 그녀가 아니라 그녀를 뒤따라오는 누군가를 향해 있었다.

그녀는 번호표를 뽑고, 민원인들을 위해 마련된 기다란 의자 한쪽에 자리를 잡았다. 각자 다른 조바심을 매만지고 있는 듯한 사람의 눈길은 자신의 용무를 해결해 줄 창구를 향해 있었다. 그녀는 주민등록, 등/초본, 가족관계증명서라고 적힌 창구를 주시하면서 이따금 다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거기 그 사람이 있었다. 자신을 뒤따라 들어온 푸른색 점퍼를 입은 남자. 청원 경찰이 내내 자신을 주시한다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는 뭔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창구 안쪽 직원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여차하면 창구 안으로 곧장 돌진하겠다는 듯, 필경대에 비스듬히 기대어 선 그는 앉을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비어 있던 창구에 직원이 온 건 거의 10여 분 만의 일이었다. 오렌지색 스웨터를 입은 여자는 민원인들의 인내심을 시험하듯 한참 만에야 업무를 시작했다. 창구 위 화면에 32번이라는 빨간 숫자가 떠오르자 그녀 곁에 앉아 있던 중년 여자가 튀어 오르듯 일어섰다. 이어 33번, 34번, 35번이라는 숫자가 차례로 지나갔다.

희수는 속으로 자신이 요청해야 하는 증명서의 종류를 천천히 되뇌었다. 뭐랄까. 다른 창구 직원들에 비해 약간은 굼뜨게 일을 처리하는 듯한 그 여자의 모습이 마음을 조급하게 만든 탓이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37번이라는 숫자를 확인하고 그녀가 창구로 다가갔을 때, 여자가 물었다. 가까이서 보니 아주 앳되어 보였다. 스물예닐곱, 많아야 서른이 되었을까 싶은 여자의 얼굴에선 또래들이 지니고 있을 법한 생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주민등록 초본이랑 가족관계증명서 떼러 왔어요.

그녀가 대답하자 여자가 물었다.

주민등록 초본 한 부, 가족관계증명서 한 부, 맞으세요?

네. 맞아요.

과거 주소지가 다 나오는 것으로 드릴까요? 초본 말이에요.

그녀는 그 증명서들을 2주 뒤부터 일하게 될 회사, 성진기획에 보내야 했다. 거의 8개월 만에 새로 구한 그 직장은 오피스텔 관리사무소였고, 그녀는 자잘한 행정 업무(주차증을 발급하고, 관리비 고지서를 배부하는 등의 일이었다)를 전담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그곳에서 왜 자신의 초본을 확인하려 하는지, 초본에 필수적으로 기재되어야 할 사항이 무엇인지 물어볼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녀가 얼른 대답하지 못한 건 그 때문이었다.

여천은 어떤 곳이에요?

과거 주소지를 포함하는 게 좋을지 말지를 고민하느라 희수는 여자가 하는 말을 제대로 듣지 못했다.

처음 봤어요. 여천이란 지명은.

그래서 여자가 그렇게 한마디를 더 하고 나서야 고개를 들고 여자와 눈을 맞추었다. 어쩐지 긴장한 듯한 여자의 눈빛은 다른 곳을 향해 있었다. 민원실 입구, 필경대 앞에 버티고 선 남자를 보는 것 같았다.

그녀는 슬쩍 남자 쪽을 돌아보곤 대답했다.

그냥 시골이죠, 뭐. 초본에 과거 주소는 포함되지 않게 해주세요.

네. 그런데 많이 바뀌지 않았을까요? 저는 일 년에 딱 두 번 고향에 가는데, 갈 때마다 뭐가 많이 달라졌더라고요. 여천, 여천. 이름이 예쁜 것 같아요.

여자는 마우스를 딸각이면서, 컴퓨터 옆 프린트기를 살펴보면서, 간간이 남자 쪽을 건너다보면서 계속 말을 걸었다. 여자의 바로 그런 점이 다른 창구 직원에 비해 약간은 굼뜨게 일한다는 인상을 주는 것 같았으나 그녀는 잠자코 있었다.

참, 인터넷으로 발급하면 무료예요. 알고 계세요?

네. 아는데 귀찮아서 잘 안 하게 되네요.

생각보다 간단한데, 가르쳐 드릴까요? 알고 계시면 진짜 편리해요.

여자는 그녀에게 건네줘야 할 증명서 뭉치를 꼭 쥔 채 계속 말했다. 그리고 한순간, 뒤쪽에서 소란이 일었다. 일하는 게 느려터졌다느니, 자신의 시간을 잡아먹고 있다느니, 자신이 내는 세금을 허비하고 있다느니 하면서 소리치는 남자를 청원 경찰이 막아서고 있었다. 그 순간, 여자의 몸이 반사적으로 움찔하는 것을 그녀는 보았다. 여자의 눈빛에 경계심과 두려움이 스며들고 있었다.

희수는 자신이 움켜쥐고 있었던 게 번호표라는 것을 방금 깨달은 사람처럼 그것을 내려다보았다. 그러자 다음 순서인 38번(혹은 39번, 40번)이 그 남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할 때마다 프로그램을 설치하라느니 해서 아주 복잡하던데요? 인터넷 발급은 도대체 어떻게 하는 거예요?

그래서였을 것이다. 일부러 큰 목소리로 대답한 것은.

프로그램은 설치하셔야 해요. 근데 한번 설치해 놓으면 편해요. 예전에 비해 요즘은 많이 간편해졌어요. 휴대폰으로도 할 수 있고요.

다들 말로는 쉽다고 하지. 막상 해보면 잘 안 되던데요?

모르는 사람이 보았다면 두 사람 사이에 약간의 언쟁이 벌어졌다고 오해할 수 있을 만큼 두 사람의 목소리가 컸다. 그것이 그 남자를 얼마간 누그러뜨린 것 같았다. 희수는 창구대 위에 휴대폰을 올려두고, 여자가 시키는 대로 손가락을 움직였다. 손바닥만 한 화면 안에서 새로운 창이 열리고, 인증창이 뜨고, 이런저런 과정이 빠르게 진행되는 동안 희수는 여자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제가 상상한 건 이런 게 아니었어요, 시험 준비할 땐 공무원의 좋은 점만 생각했거든요, 나라를 위해 일한다는 생각은 전혀 안 들어요, 그냥 무서워요, 제가 문제인 걸까요, 아무래도 그만둬야 할까요, 같은 말들. 그러니까 자신이 들을 거라고 한 번도 상상하지 못한 그런 말들이 이상한 방식으로 그녀의 발길을 붙들었다. 사십대 후반에 이른 희수의 눈엔 너무나 앳된, 삶에 대한 기대와 설렘을 마땅히 품고 있어야 할 여자의 얼굴은 점점 어두워지더니 거의 울 것처럼 변했다.

희수는 잠깐씩 남자 쪽을 돌아보며 계속 그 자리를 지켰다. 했던 말을 반복하고 이따금 보란 듯이 창구대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리면서.

선생님, 이쪽으로 오세요! 뭐가 필요하세요? 제가 처리해 드릴 테니까, 이쪽으로 오시라고요!

그리고 한참 만에 다른 창구 직원이 그 남자를 불렀다. 희수가 고개를 돌렸을 때, 원망 섞인 남자의 눈빛이 자신을 쏘아보는 것을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집요함이랄지, 사나움이랄지, 아무튼 선뜻 반길 수 없는 감정이 느껴졌으나 희수는 눈을 피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남자가 주민센터를 나간 후에야 비로소 용무가 끝난 사람처럼 증명서 두 부를 받아 느릿느릿 그곳을 나왔다.

희수가 잊고 있던 그날의 일은 며칠 뒤, 집 앞에 배송된 택배 상자가 감쪽같이 사라진 어느 저녁에 다시 떠올랐다. 그녀가 주문한 것은 라텍스 장갑이었고, 배송비를 제외하면 만 원이 채 되지 않는 금액이었으나 자신의 책임이 아니라는 듯 퉁명스럽게 구는 택배 기사와 여러 차례 통화를 하는 동안 기분이 점점 상했다. 경비실과 이웃집에 택배 상자의 행방을 수소문한 뒤, 세 번째로 기사에게 전화를 걸면서 희수는 확실히 책임을 묻겠다고, 보상에 대한 확답을 받겠다고 마음먹었고 정말 그렇게 했다.

고객님 상품은 15시 23분에 제가 분명 배송을 완료했어요. 전산 기록에 남아 있거든요. 늘 문 앞에 배송하는데 왜 이런 일이 생겼는지 모르겠네요. 할 수 없죠. 고객 센터에 분실 접수를 하세요.

고객센터요? 접수하면 어떻게 되는 건데요?

뭐, 제가 물어드리는 거죠.

기사님이 물어준다고요? 왜요, 분실 보험 같은 게 없어요?

있긴 한데 청구하긴 힘들어요. 제가 일하는 중이라, 아무튼 고객 센터에 접수하시면 돼요.

희수는 저녁 식사 내내 남편에게 이 문제, 사라진 택배의 행방과 고객 센터에 분실 접수해야 하는 번거로운 상황, 결국은 본인이 물어줄 수밖에 없다는 식으로 자신에게 교묘하게 죄책감을 심어주던 기사의 말투에 대해 불만을 털어놓았다. 일단 기다려보라거나 조금 더 찾아보라거나 식의 하나 마나 한 대답을 늘어놓던 남편은 한참 만에야 그녀가 원하던 대답, 고객 센터에 정식으로 접수를 할 수밖에 없어 보인다고 답했다. 그러나 희수는 그러지 못했다. 그건 자신이 배송 요청 사항에 직접 남긴 ‘문 앞에 두세요’라는 문구 때문은 아니었다. 뭐랄까. 주민센터에서 만났던 앳된 그 여자의 겁에 질린 얼굴이 떠올랐고, 불안과 염려 속에서 일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출근을 앞둔 저녁이라는 데에까지 생각이 미치자 도저히 그럴 용기가 생겨나지 않았다.

그녀는 저녁 내내 조용한 발걸음으로 거실을 오가며 잠깐씩 현관문 쪽을 바라보았다. 누군가 잘못 가져간 택배를 돌려주러 오지 않을까 하고. 아니, 새로운 직장에서 자신이 곤경에 처한다면 누군가가 한 번쯤 작은 호의를 베풀어주기를 기대하는 마음으로. 희수는 밤 11시가 되기 전 홀가분한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었다.

“우리가 하는 일은 어떤 식으로든 모두 연결돼 있어”

■ 작가의 말

“자기 일에서 보람과 긍지를 느끼는 건 점점 어려워지는 듯해요. 작은 호의와 친절이 우리의 노동을 얼마간은 지켜줄 수 있지 않을까요?” 김혜진 작가의 ‘사람의 일’은 한 주민센터에서 벌어지는 소동을 중심으로 일상 속에서 마주치는 사람과 노동에 대해 그린다.

김 작가는 “주민 센터는 나와 가까이 사는 이웃들이 방문하는 곳이고 동네에 거주하는 동안 여러 번 방문할 가능성이 큰, 대체 불가능한 장소”라며 소설의 배경에 대해 설명했다. “가끔 주민 센터를 방문할 때면 직원들이 국가의 최전선에서 국민들의 불만을 모두 받아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는 김 작가는 “누군가의 생계와 직결된 문제를 다루기에 어쩔 수 없는 부분도 있겠지만 복잡한 마음”이라고 말했다. “우리가 하는 일은 어떤 식으로든 모두 연결되어 있어요. 타인의 노동도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는 아닐 테죠. 서로를 조금 더 기다려줘도 좋지 않을까요.”

■ 김혜진 작가는

1983년생. 2012년 등단 후 ‘딸에 대하여’ ‘9번의 일’ 등을 썼다. 신동엽문학상, 김유정문학상 등 수상.

장상민 기자 joseph0321@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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