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아현 작가가 순간을 영원으로 담는 법

리빙센스 2024. 4. 15.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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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크 테토의 아트스페이스 55

순간을 영원히

투명한 큐브 안에 담긴 산맥. 산허리를 두른 안개.

그 풍경이 건네는 위로. 그리고 간직하고 싶은 순간에 대하여.

 평면 작업인 'vallen in' 시리즈와 그 앞에 배치된 '심산' 시리즈.
 전아현 작가의 작업실에서 만난 소형 '심산' 시리즈의 일부.

생각의 끝에서 만난 것들

작가는 작품으로 말한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본인이 정작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그 메시지를 적절히 표현하는 방법을 찾는 것이야말로 예술가들이 평생에 걸쳐 구하고자 하는 바. 전아현 작가는 이를 위해 끊임없이 스스로와 대화를 나누는 방법을 택했다. 스스로를 가장 잘 아는 존재가 되었을 때 비로소 누군가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할 수 있다고 믿으며. 작가의 대표 시리즈는 깊은 산골짜기가 투명한 레진 큐브 안에 담긴 '심산' 시리즈다. 깊은 산의 허리에 낀 안개들을 보면서 그윽해지는 마음. 고독과 슬픔이 증폭되는 듯하지만, 고요히 묵묵하게 그 자리에 서 있는 산이 주는 위로. 작가는 이 작품을 만들던 순간과 감정이 영원히 지속되길 바랐다. 이를 위해 실제 산의 등고선 지도를 찾아 렌더링한 후 콘크리트로 산을 만들고, 레진으로 안개와 공간을 만든다. 원하는 형태의 산이 나올 때까지, 또 원하는 광택이 나올 때까지 수없이 깎아내고 광을 내는 수행 중이다.

제작 중인 '심산' 시리즈. 콘크리트 산맥이 만들어지고 있다.
스스로의 내면을 확인하고 되돌아보는 과정을 작품에 담아내는 전아현 작가.

그럴 땐 주로 제 자신에 대해 생각해요. 요즘 나는

어떻지? 잘 살고 있나? 스스로에게 계속 질문을 해요.

그런 생각의 끝에 남은 색들이 작품이 되고,

그걸 다시 바라보면서 또 스스로를 되돌아보게 되죠.

(위) 화폭에 깊은 산을 담은 작품. , (아래) 작업실에서 만난 다양한 크기와 모양의 '심산' 시리즈.
책을 읽거나 드로잉할 수 있는 공간. 작가가 앉아 있는 소파는 직접 제작한 것으로, 잎사귀가 안아주는 형태로 디자인했다. 

미술을 어떻게 시작하셨는지 궁금해요.

어릴 때부터 그림을 좋아하고 화가가 되고 싶었어요. 그래서 초등학교 시절부터 그림만 그리고 싶어서 예술중학교에 진학했고요. 그런데 막상 학교에 다녀보니 기대한 것과는 좀 달랐어요. 많은 걸 배웠지만 일찍부터 입시를 준비하게 되니깐 지치고 답답하더라고요. 앞으로 그림을 그리고 싶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고등학교는 인문계를 선택했어요. 아이러니하게도 작업을 안 하다 보니까 다시 그리고 싶어졌고, 미술대학에 지원하게 되더라고요(웃음).

미술대학에 진학하니깐 좀 다르던가요?

운 좋게도 훌륭한 교수님들 밑에서 배울 수 있었던 것 같아요. 회화도 평론도 모두 즐겁게 공부할 수 있었고, 학교에 다니면서 자유로움을 많이 느꼈어요. 1학년 때는 한국화, 서양화, 조소 이렇게 3가지를 다 배울 수 있었고, 2학년 때 서양화로 전공을 정했어요. 그러던 중 부모님께서 외국 문화를 접하고 시야를 넓혀보는 것을 제안하셔서 밀라노에 다녀온 적이 있거든요. 그곳에서 인상적인 가구들을 많이 접하게 됐어요. 쓸모가 있는 가구 인데 예술적이고 아름다운 거예요. 그때 아트 퍼니처에 처음으로 관심을 가지게 됐고, 이후의 제 삶에 큰 향을 주었죠.

아트 퍼니처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도 재미있네요.

밀라노에서 이런 예술적인 가구라면 너무 배워보고 싶다는 생각이 강력해서, 한국에 돌아와서 바로 복수전공으로 아트 퍼니처 수업을 들었죠.

가구를 직접 만들어보니 어땠어요?

막상 수업을 들어보니 막막하긴 하더라고요. 나만이 만들 수 있는 가구를 완성해야 하는데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이 잘 찾아지지 않았어요. 회화를 전공한 저의 장점을 살릴 수 있는 방법에 대해 계속 실험했고, 작업을 통해 제가 어떤 생각을 하는 사람인지, 어떤 말들을 하고 싶은지 계속 고민했어요. 그 과정에서 가구의 역사나 예술사를 꾸준히 공부하게 되고, 결국에 제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알겠더라고요.

본인이 어떤 걸 추구하던가요?

추상적인 감정을 실체화하는 것이었어요. 어떻게 보면 그게 바로 구상인데, 그 역시 추상을 구상으로 만드는 것이라서 인위적으로 느껴지더라고요. 결국엔 추상을 추상으로 만들어보자. 그저 내 생각을 담는 행위로 넣어보자. 평면에서 작업하는 방식을 가구에 표현하면서, 흘러내리는 가구나 색의 농도를 조절할 수 있는 가구 같은 것들을 만들어봤죠.

'심산' 시리즈의 산맥을 만들고 있는 전아현 작가.
투명한 큐브를 완성하기 위해 광택 작업 중인 작가.

굉장히 실험적이네요!

그때만 해도 표현 방법에 집중한 예술 가구를 많이 만들었어요. 대학원에 진학해서 본격적으로 아트 퍼니처를 배우면서 쓸모와 사용감, 디자인까지 고려한 가구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고요. 특히 가구를 사용할 때 느끼는 감정에 집중하게 되더라고요. 책상 앞에 앉아서 공부하거나 글을 쓸 때 안정감을 느낄 수 있고, 테이블에서 차를 마실 때 편안한 기분 같은 거요. 그런 감정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가구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죠. 내가 얘기하고 싶은 것과 용도를 일체화시키면 하고 싶은 얘기를 작업을 통해 할 수 있게 될 거라고 믿었습니다. 그렇게 만든 소파가 제 작업실에 있어요. 커다란 잎사귀 모양인데 앉으면 누군가 나를 이렇게 안아주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수 있게 제작했어요. 삶의 모습이, 자연이 결국 우리를 보듬어주고 있고, 그 모든 것의 원소가 되는 기본 모양은 잎사귀가 아닌가. 잡초도, 꽃잎도 그 형태에서 시작된다고 생각해서 만들었죠.

작가님을 '심산' 작품으로 알게 됐는데, 가구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니까 하나로 통하는 키워드가 '자연'인 것 같아요.

자연을 의도하고 시작한 건 아니에요. 작품 대부분은 제가 어떤 생각을 골똘히 하는 시간, 제 스스로를 돌아보는 순간의 흔적 등을 이야기하는데요. 그걸 특정하려면 언제 혼자 있는지, 혼자 언제 생각하는지를 알아야 해요. 곰곰이 생각해 보니깐 새벽에 작업실에서 나올 때라든지,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갈 때 인데, 그때의 하늘을 보면서 느낀 색감과 감정들이 주로 작품에 표현돼요. 그리고 '심산'은 마음이 지쳤을 때 찾았던 추억의 장소에서 아이디어를 얻었어요. 사실 추억을 가장 많이 쌓았던 곳이라 가고 싶지 않았는데, 거길 마주해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 같아서 억지로 찾아간 거예요. 도착해 보니까 여기서 달라진 것은 이 공간에 함께 왔던 존재 하나가 사라진 것밖에 없더라고요. 모든 게 그대로여서 많이 허망했죠. 달라진 게 딱 하나밖에 없는데 이렇게 괴로워하는 스스로가 한심하기도 하고. 그런데 눈앞에 펼쳐진 풍경이 너무 아름다웠어요. 산을 두르고 있는 안개가 피어오르면서 멀어지는 그 모습이. 그때 갑자기 눈물이 나고 위안이 되었어요.

그런 경험과 감정들이 '심산'에 표현된 것이군요?

그날의 위안 덕분에 이제 그 풍경을 두 눈으로 보지 않아도, 기억만으로 우울함이나 정체된 순간을 이겨낼 수 있겠더라고요. 그 감정을 작품으로 만들고 싶었고, 그 풍경을 제 곁으로 가져 오기 위해 다양한 시도를 해봤어요. 큐브 형태의 입체로 산수화를 만들어보기로 했죠. 산의 깊이를 나타내기 위해 시점을 아래로 향하게 작품을 만들고, 레진의 반사를 이용해 여백의 미감을 더하고요. 쓸모를 고민했을 때는 편안하게 차를 마실 수 있는 티 테이블을 떠올렸고요. 앉아서 테이블 위의 차를 마시는 행위가 바로 산을 다시 바라보는 것과 같은 일이니까요. 그게 제가 원했 던 바였어요. 그 순간을 영원히 간직하는 것.

평면 작업의 색도 비슷한 고민의 연장인가요?

저에게 인상 깊었던 장면이 색으로 남은 것 같아요. 하늘의 색을 담은 작품도 있고, 안개 낀 도심 속 빌딩숲의 아름다움을 느끼며 얻은 색도 있어요. 그럴 땐 주로 제 자신에 대해 생각해요. 요즘 나는 어떻지? 잘 살고 있나? 스스로에게 계속 질문을 해요. 그런 생각의 끝에 남은 색들이 작품이 되고, 그걸 다시 바라보면서 또 스스로를 되돌아보게 되죠.

자연을 모방하는 대상이 아닌, 본인을 보여주려고 하는 것이 특별하게 느껴져요. 앞으로 자연이라는 테마를 계속 깊이 들어갈 건지, 다른 방법을 찾을 예정인지 궁금합니다.

후자일 듯합니다. 이제까지 제가 생각하는 것들, 그리고 그걸 실제로 표현할 때 어떻게 하고 싶은지, 부족한 건 무엇인지 고민 하면서 작업을 이어왔거든요. 다음 시리즈를 시작한다 해도 우연히 자연을 다룰 순 있겠지만, 꼭 자연을 고집할 것 같진 않아요. 앞으로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은지가 가장 중요하겠죠.

전아현(1995~ )상명대학교에서 서양화와 가구조형을 복수전공 하였으며, 홍익대학교 대학원 목조형가구학과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독특한 시선과 의도로 아트 퍼니처 작업을 시작했으며, 지금까지 레진과 시멘트, 나무 등의 재료로 입체 및 평면 작업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대표작은 레진과 시멘트로 제작한 큐브 속에 깊은 산의 풍경을 표현한 '심산' 시리즈이다.

Mark Tetto JTBC <비정상회담>의 훈남 패널로 이름을 알렸다. 한국 생활 14년 차, 북촌의 한옥 마을에 거주하며 한국 전통의 아름다움을 매일 누리고 있다. 경복궁 명예 수문장을 역임하고, 한국 공예품과 문화재에 관심이 많은 그는 한국을 사랑하는 외국인 중 한 명. 매달 <리빙센스>와 함께 한국을 대표하는 작가들을 만나 그들의 작품 세계를 소개하고 있다.

CREDIT INFO

editor심효진

photographer김연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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