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손대범 칼럼 : 모든 것의 1쿼터 ④ 한국 최초의 NBA 해설위원은?

손대범 2024. 4. 15. 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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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프볼=손대범 편집인] 시원한 속공, 강렬한 슬램덩크, 먼 거리에서도 쏙쏙 꽂히는 3점슛. 그리고 개성 강한 캐릭터와 그들을 신나게 하는 관중들의 열기. 한국시간으로 매일 오전, 미 프로농구(NBA)가 화면을 통해 전달하는 매력들이다. 사실 지금은 ‘SPOTV’와 NBA 리그패스, 유튜브 등 다양한 경로 덕분에 ‘매일 오전’이라는 표현이 어색하지 않지만, NBA 경기가 귀하고 소중하던 시절도 있었다. 일주일에 1번, 그 시간만 기다리던 시절 말이다.

“누가 이길 거 같아?”
“당연히 시카고 불스지.”
“내 생각은 달라. 이번에는 (찰스) 바클리가
잘해서 피닉스(선즈)가 이길거야.”
“너는 꼭 조던 반대 편에 서더라.”
“너무 잘해서 싫더라.”

1996년 2월, 그러니까 내가 고등학생일 때 친구와 독서실 앞에서 나눈 그 대화를 생생히 기억한다. 그날은 수요일이었다. 당시 기준 41승 4패를 기록 중이던 시카고 불스가 피닉스 원정을 가졌다. 한때 NBA 파이널에서 트로피를 두고 겨루었던 두 팀이지만 1995-1996시즌의 피닉스는 다소 주춤했기에 이 경기는 여유있게 시카고가 이길 거라 생각했다. 이미 앞서 홈에서 가진 맞대결도 시카고가 이겼던 터였다. 팀의 리더 찰스 바클리라는 상징성만 아니었다면 그저 그런 대결일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인가. 피닉스가 시카고를 10점 차로 꺾는 이변을 연출했다. 72승 10패를 달성한 시카고가 이 시즌에 기록한 첫 연패였다. 우리는 이 경기를 수요일 밤 ‘SBS’ 지상파에서 방송해주던 NBA 프로그램을 통해 시청했다. 한 시간 분량으로 압축된 방송. 독서실 총무형의 눈총을 피해 볼륨을 최대한 줄인 채 휴게실에서 숨죽여봤던 경기였기에 더 기억에 남는다.

당시 농구 인기가 폭발적이긴 했어도 NBA 농구를 자주 접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기에 눈에 담을 수 있었던 모든 경기가 더 소중히 다가왔던 것 같다. 경기를 녹화해두고 몇 번이나 돌려봤던 경험도 있었으니 말이다. 대부분 한국어 NBA 중계의 시초를 이야기하면 이 무렵을 떠올릴 것이다.

그렇지만, 사실 NBA가 처음 국내에 우리 말로 소개된 건 그보다도 훨씬 전인 197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호주 거주 중인 한준희 씨는 국내 농구 커뮤니티에서 ‘박사님’으로 통한다. 필명도 ‘DR.J’일뿐 아니라, 한 씨가 작성하는 농구 관련 글 하나하나가 인터넷 어디서도 보기 힘든 ‘귀한 정보’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그는 본인이 기억하는 첫 국내 NBA 중계는 1970년대였다고 돌아봤다. “1976년에 워리어스 경기를 김영기 해설위원과 서기원 캐스터가 중계해주었습니다. 1981년까지 NBA 파이널 경기를 일요일 아침마다 한 경기씩 중계해주기도 했습니다.”

이전만 해도 NBA는 접할 방법이 많지 않았다. 지금은 사라진 주한미군방송(AFKN : American Force Network Korea)이 거의 유일했다. 이 역시 전국에 중계되지 않아 접할 수 있는 이들은 한정적이었다. 실제로 예전 편성표와 방송 안내 기사를 뒤져봤다.

국내 온라인에서 찾을 수 있는 가장 옛날 소식은 1970년 10월이다. 1970년 10월 24일 신문에 뉴욕 닉스와 LA 레이커스의 경기가 MBC를 통해 중계된다고 예고되어 있다. 방송 소개란을 보니 오후 5시 20분에 결승전 중계라고 표기되어 있었다. 둘 중 하나일 거라 생각됐다. 1969-1970시즌 NBA 파이널 시리즈가 닉스-레이커스였기에, 이 시리즈를 재방송했거나 아니면 1970년 10월 18일 메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열린 정규시즌 첫 맞대결 경기를 녹화 중계했을 것이다.

이런 편성 소식은 주기적으로 지면에 올랐다. 1977년 2월 28일 ‘경향신문’에는 일요일 낮 12시 40분부터 NBA 올스타게임이 중계된다는 소식이 있었다. 1977년 NBA 올스타게임은 밀워키에서 개최되었다. 개최 날짜가 2월 13일이었으니, 15일 늦게 방송된 셈이다. NBA 중계는 국내 농구인들에게도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송도중, 송도고를 이끌었던 ‘할아버지 코치’ 전규삼 옹은 NBA 중계가 되기도 전부터 미군부대를 통해 자료를 구하고 연구해 선수들에게 창의적인 동작을 가르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을 시청각 자료로 직접 접하면서 더 많은 것을 느끼고 적용하게 됐다.

최초의 NBA 해설위원은 김영기
1970년대까지는 김영기 전 KBL 총재가 주로 중계를 맡아왔다. 1970년대 후반에는 ‘KBS’가 ‘목요스포츠’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전 시즌 NBA 파이널을 정기적으로 방송했는데, 해설위원에 김영기 이름이 빠지지 않았다. “현역에서 은퇴하고 NBA 중계를 맡았습니다. 그때만 해도 NBA 농구를 해설할 사람이 없었어요. 나는 계속 자료를 모으고 있었기 때문에 그래도 할 수 있었습니다.” 김영기 전 총재의 말이다.

그는 자신들의 세대는 오히려 미국 농구 방식을 접하는 것이 어색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농구인이라면 ‘AFKN’으로 NBA를 보는 게 일상이었죠. 안 본 사람이 없었어요. 그리고 그게 이상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미국 사람에게 농구를 배운 세대였으니까요. 6.25 이후에 미국은 각 분야의 권위자들을 한국에 파견했었습니다. 농구뿐 아니라 경제, 문화, 사회 전반에 걸쳐 말이죠. 그때 한국에 왔던 지도자들은 보통 한 달에 4000달러씩을 받았어요. 그때 4000달러면 지금은 월 1억 원 정도라고 보시면 됩니다. 그 분들에게 배운 덕분에 실력적으로 많은 향상을 이루었습니다. 6.25를 거쳤음에도 불구하고, 그 당시 다른 동아시아 국가들보다 기술적으로 앞설 수 있었던 원동력이었습니다.”

김영기 전 총재가 말했던 지도자들은 그야말로 쟁쟁했다. 대표적으로 냇 홀맨, 존 번, 제프 고스풀 등이 있다. 1995년 작고한 냇 홀맨은 1950년 대학농구 우승 감독으로 1964년에 명예의 전당에 오른 저명한 인사였다. 스탠포드, 캔자스 대학교 등에서 지도자 생활을 한 존 번도 같은 해에 명예의 전당에 올랐는데, 김영기 전 총재는 그로부터 ‘농구의 새 경지를 발견했다’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미국 감독 중에서도 ‘전설’로 꼽히는 이들이 한국에 와서 반년 이상 머무르며 농구를 가르쳤으니 발전이 없을 수 없다.

그렇게 받아들인 미국 농구가 NBA 시청과 NBA 해설로 이어진 셈이다. 그러나 그 시기는 자료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와도 같던 시절이었다. “방송국에 가서 영상을 받아 중계하는 시스템이었습니다. 생중계보다는 주로 예전 경기였죠. 그래도 농구 트랜드를 볼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자료 구하는 것이 가장 힘든 일이었지만 말입니다. 하하.”

▲한창도 위원과 체임벌
NBA 대중화에 일조한 한창도 위원
김영기 전 총재 이후 여러 농구인들이 해외농구 중계를 맡았다. 연장전까지 갔던 1993년 NBA 올스타게임은 김동광 전 감독이 중계를 했다. 1996년 애틀랜타올림픽에서는 방열 전 농구협회 회장이 마이크를 잡기도 했다.

그러나 198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NBA 농구’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름은 역시 한창도 위원이었다. 2015년 4월 24일, 74세의 나이로 별세한 한창도 위원은 성균관대와 이화여대에서 감독을 역임했으며, 국내에는 몇 안 되는 국제농구 전문가이기도 했다. KBL 출범 당시 NBA 규정을 한국화하는 작업을 돕기도 했다. 한창도 위원이 NBA를 접한 건 1970년대였다.

“1976년에 LA에 농구 유학을 3년 정도 다녀왔습니다. 그때 NBA 매력에 매료됐고, 한국에도 전파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마침 1980년대에 ‘MBC’에서 NBA가 중계됐습니다. 편당 5000달러로 들여왔는데 카림 압둘-자바, 매직 존슨, 줄리어스 어빙 등의 플레이에 팬들의 반응이 상당했습니다.” 생전(2005년)에 한창도 위원과 나눈 대화 일부다.

김영기 전 총재와 마찬가지로 그 역시 가장 힘든 부분은 ‘자료 업데이트’였다고 회고했다. 인터넷이 없던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매월 NBA 책을 구독해서 받고, 우편과 FAX 등을 통해 얻은 자료로 방송을 준비했습니다. 기록의 경우는 국제전화를 통해 ‘어제 누가 몇 점 넣은 거야?’라고 물어보기도 했습니다. 주어진 여건에서 최선을 다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사실, 오늘날 ‘NBA 마니아’ 같은 커뮤니티 사이트, 혹은 유튜브에 개설된 수많은 분석 사이트를 보면 농구인과 전문기자 뺨칠 만한 내공의 소유자들이 굉장히 많다. 어쩌면 그들 눈높이에 맞춰 본다면 이 시기의 NBA 중계는 다소 비전문적이라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모든 것이 생소했던 시절, ‘NBA 농구’ 그 자체를 전파하기 위해 애썼던 이들의 노력이 없었다면 NBA 대중화 역시 늦춰졌을지도 모른다.

그런가 하면 한창도 위원은 현 서울 SK 나이츠 통역 한성수의 부친이기도 하다. 과연 아들은 부친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제 기억으로는 MBC에서부터 방송을 시작하셨습니다. 미국에 일 때문에 자주 나가시면서 접하게 된 것 같아요. 어렸을 때라 정확히 기억이 안 나지만, 아버님 서재에는 NBA 책과 비디오테이프 등 자료가 많았습니다. 농구쪽에서 영어를 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분이었기에 NBA 선수나 해외 인사가 방한했을 때도 통역을 자주 맡으셨을 정도로 세계 농구에 관심이 많으셨죠. 미국에 다녀오실 때마다 자료를 구해오셨고요. 저도 우연찮게 번역을 도와드리다가 ‘SBS’에서 아르바이트를 한 경험이 있습니다. 하하.”

비선출 해설위원의 등장
스포츠 중계는 주로 ‘선수 출신’들의 영역이었다. 해당 종목의 경험자들이 종목을 가장 잘 알 뿐 아니라, 스타들일수록 시청자들에게 친숙하게 다가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국제대회를 앞두고 방송사마다 메달리스트, 혹은 스타플레이어들을 해설위원으로 영입하는 이유다.

그런데 90년대 이후부터 해외 스포츠는 또 다른 영역으로 여겨지고 있다. 같은 종목이긴 하더라도 규정이나 경기 스타일이 다를 수도 있고, 무엇보다 규모가 워낙 방대해서 선수들에 대한 정보 전달도 난이도가 상상 이상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2004년부터 2시즌 간 NBA 중계를 했던 최인선 전 감독은 농구, 그 자체에 대한 이해도는 ‘최고’ 그 자체였지만, 당시 NBA에 불던 듀얼가드 바람에 대해서는 이해하지 못했다. 토니 파커와 같은 포인트가드들이 볼 배급만큼이나 개인 공격도 주도적으로 했던 부분에 대해 익숙하지 않다 보니 “혼자 한다”라고 멘트를 했다가 지적을 받았던 것이다. 물론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NBA 흐름에 적응되어 누구보다도 해설을 즐기게 되었다. 2년 여의 중계에 대해 최 전 감독은 농구에 대한 시각이 다양해졌다고 돌아봤다.

KBL 중계에서 단신 선수들에게 플로터를 익힐 것을 강조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방송사들은 해외 스포츠에 대해서는 해당 리그에 대한 전문성을 갖춘 이들이 필요하다고 판단, 이른바 비선출 전문가를 영입했다. 그 시작은 메이저리그였다. 메이저리그 이종률과 송재우 등 1세대 해설위원들이 물꼬를 텄다. ‘iTV(경인방송)’에서 독점중계하던 박찬호 중계를 통해 송재우는 야구, 그 이상의 해박함을 뽐내며 화제가 되기도 했다.

NBA는 ‘한국스포츠티비’에서 데뷔한 이호인 해설위원이 국내 1호 비선출 NBA 해설위원이었다. 1968년생인 그의 배경은 굉장히 독특했다. 90년대 후반, ‘루키(rookie)’와 ‘덩크슛(dunkshot)’에 이어 등장한 ‘원-온-원(one-onone)’이란 라이선스 NBA 잡지의 번역가로 일을 시작한 것이 해설로 이어졌다. 그의 해설은 지금 생각해도 상당히 전문적이었다. 우선 규칙과 기술 등이 국내 방송에서 보고 들었던 것과 달랐다. 원어에 더 가깝고, 굉장히 많은 정보가 전달됐다. 그 전문성 덕분에 ‘해설위원 이호인’은 그 시기 여러 지면에 소개되기도 했다.

1996년 5월 18일에는 ‘경향신문’에서 그의 인터뷰를 게재했는데, 흥미롭게도 그 기사를 작성한 인물이 훗날 이호인 위원의 뒤를 이어 NBA 해설위원이 된 유신모 기자였다. ‘경향신문’ 외교전문기자로 활동하고 있는 그는 조곤조곤한 톤으로 소상하게 설명하는 해설이 특징이었다. 내가 ‘점프볼’의 객원기자가 되어 현장에 막 적응해가던 시절, 유신모 기자를 몇 차례 현장에서 마주한 적이 있다. 인터뷰실에서 질문하는 그 모습을 보면서 ‘나도 언젠가는 저런 사람이 되고 싶다’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기자들 앞에 앉은 프로선수들보다도 내게는 유신모 기자가 오히려 더 스타처럼 보였다고 해도 과장이 아니었을 것이다.

같은 시기 해설위원으로 데뷔한 장원구 기자는 국내 마니아들에게 ‘특파원’으로 잘 알려져 있었다. ‘월간 루키’의 LA 특파원으로서 생생한 기사를 전달해오며 이름을 알린 것이다. 스스로도 “5년간 지내면서 오히려 취재를 하지 못한 경기가 손에 꼽을 정도일 것”이라고 LA 레이커스와 LA 클리퍼스 홈경기장을 꾸준히 찾았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도 NBA 취재 절차는 굉장히 번거로웠다. 시즌 프레스 카드가 주어지는 현지 매체와 다르게 타국 매체들은 경기마다 취재를 신청해야 했다. 장원구 기자 역시 “매번 신청하는 불편함이 있었지만 그래도 정말 즐거웠던 순간이었습니다. 취재 기자로서는 존 팩슨의 마지막 슛으로 시카고 불스가 우승을 결정지었던 1993년 파이널 6차전이 가장 기억에 남고, 해설한 경기 중에는 1998년 NBA 파이널 6차전이 가장 잊을 수 없는 경기 같습니다. 마이클 조던이 브라이언 러셀을 앞에 두고 우승을 결정짓는 슛을 넣었던 그 경기요.”

그는 5년간의 취재 경험을 바탕으로 1996-1997시즌에는 국내 최초로 NBA선수 스카우팅 리포트를 발간했다. NBA 전 선수의 장점과 단점, 백그라운드를 소상하게 설명한 책이었는데, 학교 교재보다도 더 자주 읽어서 너덜너덜해졌던 기억이 있다. 워낙 달변가였던 장원구 기자는 1997년부터 2002년까지 ‘한국스포츠티비’와 ‘iTV’에서 활동했다. 농구만큼이나 축구에도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는 그는 지금도 월드컵, 유럽 축구 개막 등을 앞두고 전문기자들과 함께 스카우팅 리포트를 발행하고 있다.

새로운 세대의 팬들이 원했던 것
1970~80년대에 활동한 이들과 달리, 1990년대 후반부터 해설을 시작한 이들은 ‘정보 갈증’ 현상을 그리 심하게 겪진 않았다. 1995년으로 기억하는데 우리동네에는 굉장히 운 좋게도 ‘NHK(일본)’와 ‘STAR TV(홍콩)’, ‘AFKN(미군방송)’이 모두 나왔다.

덕분에 많이 볼 때는 일주일에 4~5경기를 볼 수 있었고, 나는 지각을 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궁리해야 했다. PC 통신과 인터넷을 통한 정보 습득도 활성화됐다(최초로 인터넷으로 정보가 제공된 NBA 행사는 1995년 NBA 드래프트였다. ‘제2의 마이클 조던’이라 불리던 제리 스택하우스가 전체 3순위로 지명되었던 해였다. 하교하자마자 드래프티들의 자료를 출력하느라 학원도 빼먹었던 기억이 난다. 40대 중반이 되어서야 고백합니다. 어머니 죄송합니다).

아마도 학생이었던 내가 그랬던 것처럼, ‘비선출’ 해설위원들도 대부분 20~30대의 젊은 나이였기에 농구뿐 아니라 정보 습득에 대한 내공도 상당했다. 직업이 ‘기자’였다는 점 역시 적응에 용이했을 것이다. 게다가 NBA는 일찌감치 ‘정보 관리’에 심혈을 기울여왔던 단체였다. 풋볼, 야구, 아이스하키 등 ‘4대 프로스포츠’ 단체 중 가장 먼저 NBA 닷컴을 개설해 다양한 정보와 소식을 전달했다. NBA가 경기마다 중계진에 전달하는 ‘게임 노트’는 그 자체만으로도 기사 수십개를 써도 될 정도의 방대함을 자랑했다.

‘MBC-ESPN(현 MBC스포츠플러스)’에서 커리어를 시작한 이광용 현 KBS 아나운서는 “정보의 차원이 달랐습니다. 스포츠 전문 사이트의 통계 자료는 그때도 도움이 엄청나게 많이 됐죠. NBA는 이미 15년 전에 지금의 KBL, KBO보다도 방대한 정보를 제공해왔던 걸로 기억합니다”라고 돌아봤다.

그러나 정보에 대한 접근이 대중화되고 자료 공유가 활성화된다는 것은 그만큼 대중들의 눈높이도 높아진다는 것을 의미했다. PC 통신 하이텔의 농구동호회 같은 경우, 최연길(현 MBC 스포츠플러스 해설위원), 박세운(SPOTV 해설위원), 한기윤(EASL 한국 총괄/전 오리온스 통역) 등 수많은 전문가들을 배출했을 정도로 박학다식한 마니아들이 모여 있었고, 이들은 PC 통신시대가 저물 무렵 등장한 칼럼 전문사이트 ‘후추(Hoochoo)’에서 한 단계 더 진화한 칼럼을 집필하면서 마니아들의 눈높이를 높였다.

이 무렵 등장한 인물이 바로 최연길 위원이었다. 이종률, 송재우, 이호인 등 비선출 전문가들을 보며 꿈을 키웠다는 최연길 위원은 2001년 ‘SBS 스포츠’에서 NBA 해설을 시작해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NBA와 KBL, NCAA는 물론이고 아테네올림픽을 비롯해 굵직굵직한 농구 이벤트를 해설해왔다. 2023-2024시즌에는 여준석이 소속된 곤자가 대학의 한 시즌을 팔로우하고 있다.

20여 년 전, 최 위원은 해설을 꿈꾸던 내게 “NBA만 많이 안다고 NBA 해설을 할 수 없다”라고 조언한 적이 있다. 훗날 나와 가진 인터뷰에서도 후배들을 위해 비슷한 조언을 건넸다. “NBA는 분명 NBA만이 갖고 있는 그 특성이 있어요. 엄청나게 많은 선수와 팀에 관한 정보, 특징들은 NBA를 오래 보고 공부해온 사람들만이 알 수 있는 부분이죠. 그런 부분을 제 장점으로 두고, 농구 자체에 대한 지식을 강화하려고 노력해왔습니다. 아무래도 NBA라 해도 농구 경기이기에 농구의 기본적인 특성은 무시할 수 없으니까요.”

해외 스포츠가 전문성을 더하면서 해설위원들의 파트너 역시 역할이 중요해졌다. 한명재, 이광용, 정우영 등 ‘MBC 스포츠플러스(당시 MBC-ESPN)’가 배출한 캐스터들 역시 농구뿐 아니라 야구팬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다.

‘MBC 스포츠플러스’에서는 한 명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있다. 바로 국내 유일무이한 여성진행자였던 이정민 아나운서다. 최연길 위원은 “가장 기억에 남는 파트너 중 한 명이었습니다. 지금까지도 구기종목 중계 캐스터를 여성이 맡는 경우는 많지 않은데, 굉장히 준비도 열심히 했고 전문성도 잘 갖췄다고 생각합니다. 당시 KBL 중계에서는 사이드라인 리포팅도 맡았는데, 충분히 차별성이 느껴질 정도로 잘했던 걸로 기억합니다”라고 돌아봤다.

한편 그는 ‘풍부해진 정보’에 대해 이런 의견도 내놓았다. “이제는 NBA 리그 패스도 있고 다양한 경로로 언제든 경기를 접할 수 있잖아요. 리그 패스 덕분에 이 경기를 보다가도 재미없으면 다른 경기를 택하기도 하는 등 더 편해진 면도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전에는 1경기가 소중하다 보니 집중해서 봤다면 이제는 약간 그런 간절함이 덜해진 것 같아요. 예를 들면 데스크탑으로 시청하다가 다른 일을 하게 된다거나 그런 거죠. 하하. 그렇지만 준비하는데 이제는 부족함이 덜 해진 것만은 사실입니다.”

제레미 린이 고마운 이유
2006년, NBA 마니아들은 새로운 얼굴을 맞이하게 된다. ‘루키’ 편집장이었던 조현일 위원이 ‘SBS 스포츠’에서 NBA 해설을 맡게 된 것이다. 이민형, 박인규, 정태균 등 농구인들과 호흡을 맞추다 독립(?)한 조 위원은 ‘SBS 스포츠’를 거쳐 ‘SPOTV’에 이르기까지, 계약 이슈로 잠시 중계가 중단되었던 한 시즌 정도를 제외하면 가장 오랜 시간 NBA 해설을 맡고 있다.

해설 도중 실시간으로 코피가 흐른 탓에 ‘조코피’로도 잘 알려지게 된 그는 NBA 팬들이 궁금해 할 만한 경기 전반에 관한 정보는 물론이고, 특유의 위트있는 전달력으로 많은 인정을 받고 있다. 또, 김명정, 박찬웅(퇴사) 등과의 호흡은 늘 팬들로부터 가장 듣기 편한 ‘최고의 조합’으로도 손꼽히고 있다.

하지만 그가 처음 해설을 맡을 무렵만 해도 NBA는 그리 사랑받는(?) 스포츠는 아니었다. NBA는 마이클 조던 은퇴 후 하향세였다. 2004-2005시즌부터 2시즌 간 NBA를 중계했던 ‘슈퍼 액션’ 채널도 저조한 시청률에 고심했다. 하승진이 그 무렵 포틀랜드 블레이저스에 데뷔했지만 워낙 활약이 저조하고, 팀 성적도 안 좋다보니 큰 인기를 끌지 못했다. 같은 시기 NBA를 중계했던 ‘MBC 스포츠 플러스’나 ‘SBS 스포츠’도 사정이 다르지 않았다.

그랬던 NBA가 다시 집중적인 관심을 끈 계기가 있었다. 바로 제레미 린이었다. NBA가 다시 글로벌한 인기를 얻게 된 계기는 스테픈 커리와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 열풍 덕분이었지만, 아시아 시장이 NBA 문을 두드린 배경에는 ‘린새니티’ 열풍을 일으킨 제레미 린이 있었다. 모두가 상상만 했던 일을 실현시켜준 인물이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라. 아시아인이 NBA 팀의 주전 가드가 되어 승부처 1옵션으로 나서서 클러치슛을 넣는 장면은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게다가 외모도 출중하고, 생활도 모범적이었다. 또 하버드대학을 나와 NBA 드래프트에서도 낙방해 친구집에 얹혀사는 신세였던 그가 하루아침에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농구선수가 되었으니 어찌 관심을 안 가질 수 있겠는가.

‘린새니티’ 열풍 덕분에 나 역시 ‘KBS’ 스포츠 뉴스에 출연하는 등 호강(?)할 수 있었다. 때는 2012년 2월이었다. 나와 조현일 위원은 당시 ‘MK스포츠’ 농구 기자였던 서민교 기자와 미국 플로리다주 올랜도에 올스타게임 출장을 다녀온 바 있다. 호텔에 도착해 막 짐을 풀 무렵, 조 위원은 한 통의 전화를 받고 기쁨을 감추지 못했는데, 바로 그때 받은 전화가 바로 NBA 중계가 재개될 것 같다는 전화였다. 제레미 린이 불러온 긍정적인 효과였다.

이후 중계권을 ‘SPOTV’가 계약하면서 NBA는 마니아들의 일상에 자리 잡았다. 덕분에 중계 횟수가 증가했고, 이에 따라 박세운(CBS 노컷뉴스), 이민재(SPOTV), 맹봉주(SPOTV) 등 새로운 얼굴들도 해설위원으로 충원됐다.

그렇다면 조현일 위원이 말하는 초창기와 지금 NBA 중계의 가장 큰 차이점은 무엇일까. 그는 경기 선택권을 이야기했다. “SBS스포츠시절과 가장 큰 차이가 있다면 경기 선택권 같습니다. 예전에는 NBA에서 정해주는 경기만 중계할 수 있었습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죠. 하지만 이제는 방송사나 시청자들 니즈에 맞게 방송사에서 선택할 수 있게 된 것이 가장 큰 차이 같습니다.”

조 위원의 말처럼 2000년대만 해도 방송사가 입맛에 맞는 중계를 택하지 못했다. 당시 인기가 많은 LA 레이커스, 보스턴 셀틱스 등을 택했다면 좋았겠지만, 그렇지 못했던 것이다. 예컨대, 수퍼액션의 경우는 야오밍이 뛰는 휴스턴 로케츠, 하승진이 소속된 포틀랜드 경기만 집중 배정되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야오밍은 2005-2006시즌에 부상으로 겨우 57경기를 뛰는데 그쳤다. 또 포틀랜드는 2004-2005시즌과 2005-2006시즌에 도합 48승만을 거두었다.

새로운 시장, 새로운 문화
플랫폼 시장이 바뀌면서 팬들이 NBA를 접할 기회는 무한히 늘었다. 쇼셜미디어 시장이 개척되면서 NBA는 10대, 20대들을 공략하기 위해 다양한 방식의 컨텐츠를 제공하기 시작했다. 유튜브와 같은 동영상 플랫폼에서도 크리에이터들의 활용에 대해 어느 정도 허용하며 전술 분석, 선수 스토리, 뉴스 전달 등 다양한 장르의 NBA 컨텐츠를 팬들 삶에 침투시켰다. 1경기를 보기 위해 TV 앞에 무작정 앉아 기다리던 시절과는 완전히 달라진 셈이다.

OTT의 등장은 NBA 시청 방식과 구단들의 컨텐츠 제공 방식을 한 차례 더 바꿔놓을 전망이다. 이미 NBA 리그 패스는 매 시즌 판매 기록을 새로 쓰고 있다. 이 가운데, LA 클리퍼스 구단은 아시아 시장 개척을 위해 ‘클리퍼 비전(Clipper Vision)’이라는 새 컨텐츠를 2022-2023시즌부터 제공하고 있다. ‘클리퍼 비전’은 클리퍼스 경기만을 위한 편파 중계다. 미국 현지에서는 폴 피어스와 배런 데이비스 등 클리퍼스를 거친 선수 출신 인플루언서들이 진행하고 있으며, 스페인어로도 진행된다.

국내에서도 정용검, 한장희, 한재웅 등 팬들에게 친숙한 캐스터에 전태풍, 김일두, 박재민, 손대범, 이동환, 원석연 등 다양한 해설진들이 가세해 ‘친 클리퍼스’ 방송을 매 경기 진행 중이다. 클리퍼스 구단은 시즌 중, 국내 ‘클리퍼 비전’ 중계진을 크립토닷컴 아레나에 초청해 현장 중계를 갖기도 했다. 현장 중계는 4월에 한 차례 더 이뤄질 것이라고.

NBA는 아니지만 ‘쿠팡 플레이’는 2023-2024시즌 호주 리그(NBL)에 데뷔한 이현중의 소속팀, 일라와라 호크스의 전 경기를 중계했다. 또 ‘넷플릭스’를 비롯한 여러 OTT에는 NBA가 주제가 된 다양한 다큐멘터리가 제공되고 있다. 코로나19 시절, 세계를 강타한 마이클 조던의 스토리, ‘라스트 댄스(Last Dance)’가 대표적이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일본 프로농구 B.리그(B.League)도 지속적으로 파트너를 찾고 있다. 이대성, 양재민, 이현중 등 국내선수들의 일본 시장 진출이 B.리그의 안방 침투를 도울 것이라는 기대에서다. 아직 농구는 NBA를 제외하면 인지도가 높지 않지만 이런 다양한 시도는 농구팬들에게는 큰 선물이 될 전망이다.

조현일 위원 다음 세대의 해설위원들도 점차 인지도를 얻고 있다. 특히 이민재 위원은 NBA뿐 아니라 KBL 현장 중계에도 종종 투입되어 기존 선수 출신과는 다른 스타일의 중계로 호평을 받아왔다. 2019년 1월, 오클라호마시티 썬더와 포틀랜드의 경기로 데뷔한 이민재 위원은 “어렸을 때 가져온 꿈을 31살의 나이에 이루게 됐습니다”라며 “시청자들이 흥미를 갖고 몰입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 다양한 정보 제공은 물론이고, 멋진 장면에는 같이 흥분하며 본다는 느낌을 전하고 싶습니다”라고 소감을 전했다.

이호인, 장원구, 유신모, 김원 등 초창기 비선출 NBA 해설위원들의 활동은 필자를 비롯해 수많은 전문기자, 해설위원들에게 꿈과 영감을 심어주었다. 또 그 배턴을 넘겨받은 최연길, 조현일 위원 역시 지금의 20~30대 해설위원들의 활동 영역 확장에 영향을 주었다. 훗날, 다시 NBA 중계의 발자취를 돌아보게 되었을 때 새로운 세대의 해설위원들도 그 계보를 이어가며 또다른 지망생들에게 영감을 줄 수 있길 기대한다.

#사진_점프볼DB, KBL PHOT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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