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플리’ 이번엔 흑백 누아르로… 원작에 더 가까워졌다

백수진 기자 2024. 4. 15.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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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 ‘리플리: 더 시리즈’

누구의 마음속에나 ‘리플리’가 있다. 더 나은 삶을 갈망하고, 타인의 것을 탐내고, 그럴듯하게 자신을 포장한다. 살면서 한 번쯤은 그런 마음을 갖는다. ‘리플리’는 인간 내면의 가장 어두운 귀퉁이를 떼어다 증폭시킨 캐릭터다. 혐오스럽지만, 누구나 이해할 수 있다. 원작 소설이 출간된 지 약 70년이 됐지만 여전히 리플리가 사랑받는 이유다.

패트리샤 하이스미스의 1955년 소설 ‘재능 있는 리플리’가 넷플릭스 드라마 ‘리플리: 더 시리즈’로 또 한 번 영상화됐다. 알랭 들롱 주연의 ‘태양은 가득히’(1960), 맷 데이먼의 ‘리플리’(1999)를 비롯해 수차례 영화·드라마로 만들어졌다. 더 새로울 게 있을까 싶었으나, 히치콕 스타일의 음산한 누아르(어두운 분위기의 범죄물)로 리플리를 재해석하면서 벌써부터 내년 에미상의 유력 후보로 거론되고 있다.

'리플리: 더 시리즈'에서 톰 리플리(오른쪽)는 디키(가운데)와 가까워지려 하고, 그의 여자친구 마지(왼쪽)는 톰을 의심한다. /넷플릭스

줄거리는 익숙하다. 가난하지만 영리한 톰 리플리(앤드루 스콧)가 “아들을 미국으로 데려오면 거액을 주겠다”는 재벌의 제안을 받고 이탈리아로 향한다. 톰은 부모의 돈으로 방탕하게 사는 금수저 디키를 만나 상류층의 삶을 동경하게 되고, 원하는 삶을 얻기 위해 디키 행세를 하며 거짓말과 사기, 살인까지 서슴지 않는다.

리플리를 다룬 기존 영화들은 작열하는 태양, 짙푸른 바다 등 이탈리아의 화려한 풍광이 두드러졌다. 반면 넷플릭스 드라마 ‘리플리: 더 시리즈’는 모든 장면이 흑백 화면으로 과감하게 색을 빼고 빛과 어둠만을 남겼다. 1950~1960년대 누아르 영화들처럼 극단적인 명암 대비로 팽팽한 긴장감을 자아내며 “히치콕이 찍은 리플리 같다”는 평이 나온다.

그래픽=정인성

‘쉰들러 리스트’ ’아이리시맨’ 등을 쓴 각본가 겸 감독인 스티븐 자일리안과 ‘데어 윌 비 블러드’로 오스카 촬영상을 받은 촬영감독 로버트 엘스위트가 만나 한 장면 한 장면이 우아하고 정교한 구도로 찍은 사진 작품 같다. 자일리안 감독은 “작가가 작품을 쓸 당시에 영화를 떠올렸다면 아마 흑백 영화였을 것”이라며 “게다가 이 이야기는 꽤 사악하고 어두워서 이탈리아의 아름다운 풍경에서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상상할 수 없었다”고 했다.

눈부신 젊음을 뽐내는 전작들에 비해 20년쯤은 늙은 듯한 배우들을 보고 당황할 수 있다. 다만 리플리의 캐릭터는 좀 더 원작에 가까워졌다. 세기의 미남 알랭 들롱은 관능적으로, 맷 데이먼은 순수함이 남아있는 청년으로 리플리를 해석했다면 앤드루 스콧의 리플리는 연민의 여지가 없는 악랄한 냉혈한에 가깝다. 살인을 저지르고도 후회나 공포가 느껴지지 않고 차분하게 다음 계획을 실행할 뿐이다.

드라마에 등장하는 미술 작품들은 리플리의 캐릭터를 풍성하게 만든다. 톰은 천재 예술가이지만 살인을 저지르고 도망치며 살았던 화가, 빛과 어둠의 대가로 불리는 카라바조와 자신을 동일시한다. 사악하면서도 아름다운 드라마 속 세계는 탐미주의자 톰 리플리의 눈으로 본 세계인지도 모른다.

'리플리: 더 시리즈' /넷플릭스

악의 원형에 더 가깝기 때문에, 기존 영화들처럼 리플리에 이입해 그를 응원하긴 쉽지 않다. 요즘 드라마의 빠른 전개, 화려한 CG, 현란한 카메라 워킹에 적응된 시청자들에게 카메라를 거의 움직이지 않고, 아주 느린 호흡으로 인물들을 숨죽여 관찰하는 이 드라마는 익숙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럼에도 구멍을 뚫어놓은 듯 깊고 새카만 스콧의 눈동자는 도대체 저 속에 뭐가 들었는지 궁금하게 만든다.

톰 리플리의 성적 취향을 어떻게 해석하는지에 따라 주인공 셋의 관계도 조금씩 달라진다. 원작자인 하이스미스는 “나는 리플리가 게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했지만, 소설에선 동성애 성향이 암시돼 있어 오랫동안 논쟁의 대상이었다. ‘태양은 가득히’의 리플리는 이성애자로 디키의 여자 친구 마지를 탐내고, 둘 사이를 갈라놓으려 애쓴다. 1999년작의 리플리는 동성애자로 마지가 아닌 디키에 대한 사랑과 숭배, 집착을 드러낸다.

‘리플리: 더 시리즈’에선 “어떤 성생활이든 그걸 즐길 정도로 평범한 사람이 아닌” 상태로 모호하게 남겨뒀다. 커밍아웃한 게이 배우인 앤드루 스콧은 “그의 성적 취향이나 나이, 자라온 환경을 명확하게 정의하고 싶지 않았다. 알 수 없는 공백, 유동적인 정체성이 리플리를 더 매혹적으로 만든다”고 했다.

☞리플리

퍼트리샤 하이스미스의 1955년 소설 ‘재능있는 리플리’의 주인공. 신분 상승을 위해 타인의 행세를 하며 거짓말과 사기, 살인까지 저지르는 인물이다. ‘태양은 가득히’(1960), ‘리플리’(1999) 등으로 수차례 영상화됐으며, 스스로 지어낸 거짓말을 현실이라 믿어버리는 ‘리플리 증후군’도 이 작품에서 유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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