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급 1000원 벌이 ‘폐지 쟁탈전’…개미지옥에 빠진 노인들

권용휘 기자 2024. 4. 15. 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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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노후 안녕할까요…올드 푸어 다이어리 <3> 폐지 수거 노인의 꿈


- 폐지수집 부산만 최소 1641명
- 하루10시간 일해도 월 60만원
- 생존을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

- 100㎏ 리어카 끄는 탓에 ‘골병’
- 22%가 교통사고 등 부상 경험

- “이른 아침 나가면 주울 게 없어
- 출근 시간을 밤 11시로 옮겼어
- 손자와 단칸방 벗어나는게 꿈”
- 제도권 흡수 등 지원대책 절실

개미지옥은 명주잠자리의 애벌레인 개미귀신이 먹이인 개미를 잡고자 만든 함정이다. 깔때기 모양의 모래 구덩이에 굴러떨어진 개미는 탈출하려고 발버둥 쳐도 끝내 빨려 들어간다. 폐지를 수거하는 노인의 삶도 그와 비슷하다. 시급 1000원짜리 육체 노동을 감내하지만 돌아오는 건 멸시와 급격히 노쇠해 가는 몸 뿐이다. 몸으로 먹고 사는 이가 자신이 쇠약해져 간다는 걸 느끼는 것. 시한부 판정을 받은 삶과 진배없다.

14일 한 노인이 폐지가 가득 실린 수레를 끌고 부산 부산진구 한 고물상으로 들어간다. 오전 내내 폐지를 모았다는 그가 받은 돈은 3000원에 불과했다. 김진철PD


▮시급 1000원 안 되는 노동…“벗어날 수 없다”

지난 12일 오전 9시 부산진구 개금동 한 거리에서 만난 78세 김영숙 씨는 허리가 굽어 지치는 날까지 일하다가 단칸방에서 벗어나 손자와 함께 사는 게 꿈이라고 말했다. 그녀의 일은 폐지 수거. 이날도 길가에 버려진 박스를 정리하고 있었다. 옆에 놓인 수레에는 폐지가 집채만큼 쌓여 있었다. 언뜻 봐도 몸무게의 서너 배는 넘을 양이었다. 김 씨는 “지나던 어린아이가 나를 보고는 꼭 개미 같다고 하더라. ‘일을 열심히 해서 그런가’ 싶었다. 그런데 어느 날 상가를 지나다 유리창에 구부정하게 리어카를 끌고 가는 내 모습이 보였는데 꼭 개미 같았다”며 웃었다.

김 씨의 출근 시각은 밤 11시. 식당이나 주점·편의점에서 음식물 쓰레기와 함께 폐지가 나오기 시작하는 때다. 리어카를 끌고 개금동에서부터 부암동을 거쳐 전포동 일대를 누빈다. 편도로 5.5㎞로 그의 나이를 고려하면 맨몸으로 걷는 데만 약 2시간 걸리는 거리다. 그러나 폐지를 모으려면 시장이나 상가 일대를 돌아야 한다. 고물상으로 가는 거리까지 합하면 왕복으로 15㎞는 훌쩍 넘는 거리를 오갈 것으로 보인다.

4, 5년 전만 해도 김 씨의 출근 시각은 동이 트기 전인 오전 6시 즈음이었다. 그러다 어느 날인가부터 수레를 채울 폐지가 점점 줄어들고, 비슷한 행색의 추레한 노인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일거리를 뺏기지 않으려 출근 시각을 앞당기다 보니 낮과 밤이 완전히 바뀌었다. 아들쯤 되는 취객에게 봉변당하는 경우는 다반사. 차에 치일 뻔한 적도 여러 번이다.

▮부산에 1641명…“목숨 걸고 일해”

한국노인인력개발원의 ‘2023년 폐지 수집 노인 실태조사’를 살펴보면 우리나라 폐지 수집 노인은 약 4만1876명이다. 부산에는 1641명이 있을 것으로 추산된다. 폐지 수집 중 부상을 경험한 노인은 22%, 교통사고 경험률은 6.3%나 된다. 이는 전체 노인 보행자의 교통사고 경험률 0.7%(2020년 기준)의 9배에 이르는 수치지만, 폐지 수집 노인의 절반 이상이 생계 목적으로 폐지를 줍고 있어 일을 그만둘 수도 없는 상황이다.

부산 지역 폐지 수집 노인이 처한 상황은 더 열악할 것으로 보인다. 도로가 굽은 데다 비탈길도 많은 탓이다. 이때문에 목숨을 걸고 폐지를 운반하는 경우도 흔하다.

돈을 모아서 폐지 수거 일을 그만두는 게 꿈인 정인호 씨(75·연제구 연산동 )는 며칠 전 일을 떠올리면 지금도 온몸에 전기가 ‘찌릿’하고 흐른다고 한다. 그는 매일 오전 리어카에 100㎏이 넘는 폐지를 나른다. 리어카 무게까지 합하면 150㎏이 넘는다. 내리막길을 지나야 고물상에 도착하는데 도로에서 신호라도 걸리면 온몸으로 그 무게를 견뎌내야 한다. 버팀목은 걸어 다닐 때도 후들거릴 정도로 부실한 두 다리뿐. 보도로 다닐 수는 없다.

도로교통법상 너비 1m가 넘는 손수레는 ‘차’로 분류돼 인도 통행이 불법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울퉁불퉁하고 10㎝가 넘는 턱이 있는 보도에 서는 바퀴가 굴러가지 않는다.

그날도 내리막길에서 신호가 걸리고, 리어카를 멈춰보려 했으나 슬금슬금 미끄러져 내려오기 시작했다. 주저앉을 수도 없는 상황. ‘도와달라’는 목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정 씨는 “다행히 지나가는 사람이 잡아주지 않았다면 그대로 미끄러져 차에 치여 황천길로 갈 뻔했다”며 “벌이로 치면 구걸하는 게 훨씬 나아서 차라리 동냥을 할까도 생각해 봤다. 염치 밖에 안 남았다. 쭈글시러워(‘창피하다’는 부산 경남지역 말) 도저히 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대부분 수급자나 수급자가 되지 못한 노인

14일 부산시에 따르면 각 기초지자체는 보건복지부 지침에 따라 폐지 수거 노인을 대상으로 전수조사를 벌이고 있다. 그러나 상당수가 응대를 꺼려 현재 1200명 가량만 조사를 끝낸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 노인 대부분 기초생활수급자이거나, 서류상 부양가족의 재산이 있거나 자신 명의로 처분할 수도 없는 재산이 있다는 등의 이유로 수급자에서 탈락한 이들이다.

수급자는 정부에서 주는 생계비로는 생활이 어렵다. 현금으로 임금을 받아 기록이 남지 않는 폐지 수거 일을 할 수밖에 없다. 수급자가 되지 못한 이들의 사정은 더 열악하다. 이들은 기초노령연금(월 33만4810원)과 폐지수집으로 모은 돈으로만 생활하고 있었다. 하루에 10시간 넘게 폐지를 모아도 1만 원 벌기가 힘들다는 점을 참고하면 60만 원 안팎으로 추정된다. 전체 노인 월평균 개인소득(129만8000원·2020년 노인실태조사)의 절반 수준이다.

지난해 한국노인인력개발원 실태조사 결과도 비슷하다. 폐지 수거 노인은 일평균 5.4시간 주 6일 폐지를 수집해 월 평균 15만9000원을 버는 것으로 나타났다. 시급으로 따지면 1226원으로 지난해 최저임금(9620원)의 13%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들의 노동시간에는 폐지를 분류하는 데 쓴 시간 등은 빠져 있다. 그럼에도 조사자의 88.8%는 ‘향후에도 폐지수집 활동을 지속할 의향이 있다’고 답했다. 폐지를 수집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건강 관리를 위해(9.1%)’라는 답변도 있었지만 절반 이상인 54.8%가 ‘생계비 마련’ 29.3%가 ‘용돈이 필요해서’라고 답해 경제적인 이유가 절대적으로 높았다. 애로사항으로는 ‘폐지 단가 하락(81.6%)’, 어떤 지원이 필요한지를 묻는 질문에는 ‘경제적 지원이 필요하다(85.3%)’는 응답이 가장 많았다.

▮이루지 못할 노인들의 꿈…개미지옥서 구하려면

김 씨와 정 씨는 꿈을 이루기 힘들 것처럼 보인다. 현재 폐지 단가는 1㎏에 40~50원. 1t을 채워야 겨우 4만~5만 원을 받을 수 있다. 김 씨와 정 씨가 새벽 내내 앉을 틈도 없이 부지런히 돌아다녀 모으는 폐지 무게는 고작 150~160㎏에 그친다. 손에 쥔 돈은 많아야 1000원짜리 지폐 8장. 시급으로 환산 해보니 1000원도 안 됐다.

올해 최저 임금은 시간당 9860원이다. 아무리 몸부림을 쳐도 극한의 가난에서 빠져나올 수 없는 흡사 개미지옥과도 같은 상황에 놓인 셈이다.

그러나 이들 덕에 우리 사회가 얻는 혜택은 적지않다. 거리가 깨끗해지고, 후진국형이지만 나름의 자원 재활용 체계도 자생적으로 갖춰졌다. 마을 환경정비를 하면서 이들 노인을 돕게 된 이복순(여·53·해운대구 반송동) 씨는 “모두 평생을 열심히 살아오신 분들이었다. 육체노동이 몸에 배야 폐지 수집을 할 수 있다”며 “그러나 제대로 된 대우를 못 받고 있다. 이분들의 삶을 개선해 줄 만한 현실적인 대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폐지 수거 노인을 개미지옥에서 벗어나게 하는 방법이 있을까. 전문가들은 이들을 제도권으로 흡수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한국노인인력개발원 배재윤 부연구위원은 “폐지 수거가 쉽게 할 수 있는 일이라고 볼 수 있지만 진입장벽이 매우 높다. 일이 고된 반면 벌이는 적은 데다, 자신의 모습이 다수에게 노출되기 때문”이라며 “그럼에도 일자리가 워낙 없다 보니 폐지 수거에 어르신이 몰린다. 지원금 등을 통해 일단 구제하고, 도움이 될 수 있게 관련 제도 등을 손볼 필요가 있다”고 했다.

영상=김채호·김태훈·김진철 PD

※제작지원 : BNK 부산은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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