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민주화운동 원로 배다지 민족광장 상임의장 별세

김영동 기자 2024. 4. 14. 1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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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에서 민주화·통일 운동에 앞장서온 배다지(사진) 겨레의길 민족광장 상임의장이 13일 세상을 떠났다.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 부산연합 상임의장이었던 1989년에는 국가보안법 등 위반 혐의로 구속돼 징역형을 선고받아 6개월 동안 복역했다.

1997년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 상임의장, 2000년 민주개혁국민연합 공동대표 겸 부산대표 등을 역임했다.

2010년 민족광장을 설립해 상임의장에 취임했고, 같은 해부터 지난해까지 김대중 부산기념사업회 이사장을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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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에서 민주화·통일 운동에 앞장서온 배다지(사진) 겨레의길 민족광장 상임의장이 13일 세상을 떠났다. 향년 90.

배 의장은 동래중학교에 입학한 1948년 남한 단독정부 설립을 반대하는 동맹휴학 투쟁에 나선 데 이어 1949년 중학교 2학년 때 남한 단독정부 설립을 반대하는 유인물을 뿌리려고 준비하다 경찰에 붙잡혀 물고문 등 고초를 치렀다. 배 의장은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당시 인생의 큰 시련이었지만 아무도 밀고하지 않고 스스로 이겨냈다. 정말 잘한 일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부산대에 진학한 뒤 1955년 민족문화협회에 참가했고, 1958년 ‘국제신문’에 입사해 기자로 일했다.

배 의장은 1960년 민주민족청년동맹 경남도맹 간사장을 맡았고, 1961년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 결성에 참여했다. 2·8한미경제협정반대 경남공동투쟁위와 민족자주통일경남협의회 결성에도 힘을 보탰다. 1961년 5·16 군사쿠데타로 민주민족청년동맹과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가 강제해산된 뒤에는 경찰의 지명수배를 받아 1년 남짓 도피생활을 했다. 이후 1964년 옛 ‘마산일보’에서 기자 생활을 다시 시작했다.

1968년에는 통일혁명당(통혁당) 사건에 연루됐다. 1968년 ‘경남매일신문’ 기자로 일할 때 통혁당 핵심인물이자 회사 간부였던 인사와 회합·통신을 했다는 이유였다. 이 때문에 1969년 법원으로부터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아 옥살이했다. 이후 배 의장은 2022년 11월 “통혁당 사건과 관련이 없는데 불법연행돼 진술 강요로 실형을 받았다”며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에 진실규명 신청을 했다.

배 의장은 1987년 자주평화통일부산회의 창립에 참여해 의장 대행을 맡았다.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 부산연합 상임의장이었던 1989년에는 국가보안법 등 위반 혐의로 구속돼 징역형을 선고받아 6개월 동안 복역했다. 1995년에는 ‘부산땅 하야리아 되찾기 시민대책위’ 상임대표를 맡아 부산 도심인 부산진구에 자리한 미군기지(캠프 하야리아) 반환 운동에 앞장섰다. 1997년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 상임의장, 2000년 민주개혁국민연합 공동대표 겸 부산대표 등을 역임했다. 2010년 민족광장을 설립해 상임의장에 취임했고, 같은 해부터 지난해까지 김대중 부산기념사업회 이사장을 맡았다.

빈소는 부산 동래구 아시아드장례식장. 발인은 15일 아침 8시다. 영결식은 15일 오전 9시30분 부산민주공원에서 엄수된다.

김영동 기자 yd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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