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방랑자의 실체 없는 기다림”…연극 ‘고도를 기다리며’ [공연리뷰]

이나경 기자 2024. 4. 14. 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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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노인이 ‘고도’ 기다리며 겪는 에피소드
10여분간 독백… ‘짐꾼 럭키’ 연기 압권
신구 등 베테랑 출연… 50회 전석 매진
지난 9~10일 양일간 화성시 반송동 반석아트홀에서 진행된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의 무대 모습. 작품은 앙상한 나무 아래 하염없이 누군가를 기다리는 두 방랑자의 이야기를 담았다. 이나경기자

 

“이젠 뭘 할까?”. “기다려야지”. “누구를?”. “고도!”.

블라디미르(디디, 박근형)는 무덤에 걸터앉아 무덤으로 끌어내려지는 반복되는 인생에 의문을 제기한다. 디디의 오랜 동반자 에스트라공(고고, 신구)은 더 이상 고도를 기다리는 일을 못 하겠다고 말한다. 또다시 고도를 기다리며 무엇을 할까라는 질문에 디디는 “나무에 목이나 맬까?”라고 말한다. “그러다 고도가 오면?” “우리는 사는 거지”. 대화를 마친 두 방랑자는 “가자”를 외치고 다시 길을 떠난다.

지난 9~10일 화성시 동탄복합문화센터 반석아트홀에서 막을 내린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는 아일랜드 출신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사무엘 베케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희비극이다. “에스트라공(고고)과 블라디미르(디디)라는 두 방랑자가 실체가 없는 인물 ‘고도(Godot)’를 하염없이 기다린다”라는 한 줄 남짓한 줄거리에 담긴 내용은 꽤나 심오하고 이를 풀어내는 방식은 코믹하다. 유쾌하면서도 씁쓸함이 담긴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는 인간의 삶을 ‘기다림’으로 정의하고, 그 끝없는 기다림 속에 인간이란 존재의 특성을 보여준다.

■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사무엘 베케트의 역작, 국내외 최고령 ‘디디’와 ‘고고’가 펼친 두 배우의 열연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의 출연배우 신구(에스트라공 역), 박근형(블라디미포조 역), 김학철(포조 역), 박정자(럭키 역) 배우의 모습(왼쪽부터). 파크컴퍼니 제공

‘고도를 기다리며’는 1953년 파리 첫 공연을 시작으로 전세계에서 다양한 해석의 무대가 펼쳐지고 있다. 국내서는 1969년 초연 이후 50년 동안 1천500회 이상 무대로 사랑 받아온 작품이다. 이번 무대는 지난해 12월 파크컴퍼니가 제작하고 오경택 연출로 막을 올렸다. 대표 배우인 신구(88), 박근형(84)이 처음으로 연기합을 맞춘 작품이자 박정자(82), 김학철(64) 등 출연 배우 네 명의 연기 경력만 총 220년이 넘는 캐스팅으로 화제가 됐다. 서울 국립극장에서 첫 공연을 올린 데 이어 울산, 춘천, 세종, 강릉, 대구, 대전 등 전국 지역 순회 공연을 펼치고 있는 작품은 지난 5~6일 경기도 고양, 9~10일 화성까지 50회차 전석 매진이라는 기록을 세우며 다음 달 열리는 제60회 백상예술대상의 연극 부문 후보에도 올랐다.

■ “고도란 과연 무엇인가, 존재하기는 한 걸까?”

이름만으로도 기대를 모으는 배우들의 합을 눈 앞에서 볼 수 있다는 설렘 때문일까, 지난 10일 오후 3시께, 무대가 시작되기 직전 객석은 들뜬 표정의 관객들로 가득찼다. 부모님의 손을 잡고 온 어린 자녀부터 백발의 70~80대의 노인까지 연령도 성별도 다양했다.

암전 속 두 배우는 등장만으로 몰입을 자아냈다. 무대에는 앙상하게 비튼 나무 한 그루와 두 노인뿐이다. 만담처럼 끝없이 주고 받는 고고(신구)와 디디(박근형)의 대화는 객석에 웃음을 유발했다. 두 사내는 ‘고도’를 기다린다고 말하지만 정작 두 사람 모두 명확히 고도가 누구인지, 왜 기다리는지는 본인들조차 알지 못한다. 고고는 “우리는 고도, 그 자에게 묶여있어!”라고 외친다.

각각 '고고'와 '디디' 역을 맡은 신구, 박근형 배우의 모습. 80세가 넘는 두 배우는 원캐스트로 전국을 돌며 순회 공연을 펼치고 있다. 파크컴퍼니 제공

고도를 기다리는 고고와 디디의 쉼 없는 대화에 몰입하고 있을 때, 목에 끈이 묶인 남루한 노새와 같은 짐꾼 럭키(박정자)와 이를 이끄는 사내 포조(김학철)가 등장한다. 짐을 들고 채찍에 휘둘림 당하며 땅만 바라보는 럭키의 존재는 과연 인간인지 아닌지 헷갈리게 만들고, 포조는 자신과 같은 신이 만든 존재인 동족(인간)을 찾고 있다고 말한다.

■ 다양한 인간 군상…‘포조’가 될 것인가

“수치스럽다!” “어떻게 한 인간을 이렇게 취급해!”라고 디디가 외친다. ‘고도를 기다리며’ 속 캐릭터는 다양한 인간 군상을 보여준다. 디디는 낙관적이면서도 선하고, 그러면서도 지적이고 철학적인 사유를 하는 존재이다. 반면 고고는 다소 소극적이고 비관적이며 때로는 염세주의적이다. 적당히 못된, 미워할 수 없는 우리 주변의 캐릭터다. 닮은 듯 다른 영혼의 동반자 두 사내는 어쩌면 한 인간의 양면적인 모습일 수도 있다.

반면 포조와 럭키는 우리 내면 깊숙한 곳에 자리한 심연의 모습과 같다. 포조는 자신과 같은 모든 인간이란 존재에게서 얻을 게 있다고 말하며 디디와 고고에게 신사처럼 굴다가도 럭키를 마치 가축처럼 부린다. 럭키가 시장에 내다버릴 것을 무서워해 불쌍한 척 하며 자신을 괴롭히고 있다고 말하는 포조는 탐욕적이면서도 권위적인 인간의 이중성, 아이러니함을 드러낸다.

■ 주인의 밧줄에 저항하는 럭키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 중 일부 모습. 에스트라공과 브라디미르뿐만 아니라 포조(김학철)과 럭키(박정자)의 연기 또한 인상 깊다. 파크컴퍼니 제공

“생각해”라고 다그치는 포조의 채찍질에 럭키는 마침내 입을 연다. 그때부터 10여분간 이어지는 럭키, 박정자의 독백은 가히 압권이었다. 내내 땅바닥만 보던 럭키는 머리에 모자를 쓰게 되자 허리를 꼿꼿이 세운다. 작았다가 커졌다가, 높았다가 낮았다가 마치 방언처럼 알 수 없는 내용의 대사를 쏟아낸다. 흥미로움과 재미로 지켜보던 객석의 표정은 이내 심각해졌다가 슬퍼지는 듯 했다. 포조가 모자를 벗겨내자 다시 럭키는 침묵하고 둘은 사라진다.

국내 무대서 유일하게 여성으로 ‘럭키’ 역을 맡은 박정자 배우는 작품 소식을 듣고 “럭키 역할을 하고 싶다”며 제작사에 적극적인 의사를 내비친 것으로 알려졌다. 럭키를 완벽하게 소화하며 열연을 펼치는 박정자 배우의 모습을 보면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한바탕 떠들썩함이 지나간 자리 이번엔 소년(김리안)이 찾아온다. ‘고도’가 과연 실체하는 존재인가 의문을 가질 때쯤 고도의 부탁을 받고 찾아왔다는 소년과 그가 들려주는 고도에 관한 묘사는 다시금 고도라는 존재가 실재함을 믿게 만든다.

■ 달라진 아침, 희망은 시작된 걸까

밤을 지나 찾아온 아침. 여전히 두 노인은 고도를 기다리며 서로에게 기대어 있다. 이때 디디는 무언가 변화가 생겼음을 눈치챈다. 말라 비틀어졌던 나무에 오늘은 잎이 달려 있는 것이다. 고도를 기다리며 고고와 디디는 포조와 럭키를 따라하는 놀이도 해보고 우스꽝스런 춤을 추거나 운동을 하며 시간을 보낸다. 그런 두 사람 앞에 알 수 없는 풍파를 겪은 포조 일행이 재등장하고, 다시 소년이 찾아왔다가 소년도 떠난다.

더 이상은 못하겠다는 고고에게 디디는 ‘나무에 목이나 맬까?’라고 말하고, “그러다 고도가 오면 우리는 사는 거지.” 라고 말하며 두 존재는 다시 서로에게 기대 각자를 이끌며 길을 떠난다.

■ 기다림의 끝은 희망일까, 절망일까

지난 10일 화성시에서 종료한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의 포스터. 작품은 오는 26일 일부 캐스팅 변화와 함께 서울서 앵콜 공연에 나선다. 파크컴퍼니 제공

2시간30분 가량 이어진 무대는 시간의 흐름을 느낄 새 없이 휘몰아치는 연기로 관객을 이끌었다. 누군가 연극은 관객과의 호흡이 생명이라 한다. 무대가 끝난 후 관객에게 깊이 머리 숙여 인사하는 팔순이 넘는 노배우들의 감사 인사에 객석은 진심 어린 박수를 보냈다. 실체 없는 고도와 같은 극을 이끌어간 것은 배우의 열연이 없으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래서 과연 고고와 디디는 고도를 만났을까. 전세계 숱한 이들이 ‘고도’라는 존재에 대해 신, 희망, 구원 또는 죽음, 자유 등 다양한 해석을 내놓지만 원작자 베케트조차 ‘고도’가 정확히 무엇인지 모른다고 말했다. 고도는 두 방랑자를 하염 없이 기다리게 만들면서도 동시에 밤을 지나 또다시 다음날을 살아내게 만들고, 그러면서도 떠날 수 없게 얽매는 존재이다.

결말에 대한 해석 역시 다양하다. 누군가는 또다시 반복되는 하루의 모습에 허무함과 절망을 느낄 수도, 누군가는 조금씩 변화한 모습에서 고도는 결국 만나게 될 것이라는 희망의 메시지를 발견할 수도 있다.

작품은, 인생 그 자체가 기다림이라 말한다. 어쩌면 우리가 일생 내내 그토록 갈망하는 무언가는 실체 없는 허상을 좇는 것일 수도 있다. 알 수 없는 기다림의 과정에서 우리는 부조리함과 역설을 저지르기도 그러면서도 때로 그 안에는 유쾌함과 즐거움, 행복함도 있다. 작품은 당신이 기다리는 ‘고도’는 무엇이냐고 질문한다.

단일 캐스팅(원 캐스트)으로 지난해부터 쉼 없이 달려온 작품은 이달 26일부터 ‘럭키’와 ‘소년’ 역의 변화와 함께 관객의 호응에 힘입어 열흘간 서울서 9회의 앵콜 공연을 펼칠 예정이다.

이나경 기자 greennforest21@kyeong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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