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이 신을 대신하는 시대…‘상실과 돌봄’의 가치

한겨레 2024. 4. 14.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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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S] 손희정의 영화담(談) 키메라
물질주의·문명 탐구했던 감독
80년대 이탈리아 도굴꾼 영화화
잃어버린 것에서 ‘존재’ 깨닫고
먹이고 가꾸는 일에 중요 의미
엠엔엠 인터내셔널 제공

때로 이토록 비정한 시대와 비루한 현실을 초래한 우리에게 과분할 정도로 아름다운 영화를 만나곤 한다. 이야말로 영화가 우리에게 베푸는 마법 같은 순간 아닐까. 알리체 로르바케르의 ‘행복한 라짜로’(2019)가 그런 작품이었다. 선한 인간 라짜로(아드리아노 타르디올로)에 대한 강렬한 기억이 심장에 새겨져 있었던 탓에 로르바케르의 신작 ‘키메라’가 개봉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극장을 찾았다.

신내림과 같은 천재적 도굴 능력

1980년대 이탈리아 토스카나의 작은 마을. 영국인 아르투(조시 오코너)는 오합지졸 유적 도굴꾼 집단인 ‘톰바롤로’와 함께 무덤을 털며 살아간다. 그는 수맥을 읽어 지하세계와 교감하는 특별한 능력 덕분에 톰바롤로의 대장이 되었다. 도굴꾼들은 신내림과도 같은 그 능력을 ‘키메라’라고 부른다.

아르투에게 “키메라가 올” 때마다 카메라는 360도로 회전하고, 화면 위에선 하늘과 땅이 뒤집혀 버린다. 그 역전의 순간은 ‘키메라’의 이탈리아판 포스터와 만난다. 여기서 아르투는 타로 카드 12번 ‘매달린 남자’(The Hanged Man)의 형상을 하고 있다. 다신교에서 유일신앙까지, 중세 유럽의 공기에 녹아 있던 다종다양한 신화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하는 타로에서 ‘매달린 남자’는 순교자의 카드로 통한다. 그는 자신을 손가락질하며 비웃는 우매한 대중을 구원하기 위해 기꺼이 나무 기둥에 매달려 있다. 그런 그를 뒤집으면 21번(수비학적으로 12번을 뒤집은 숫자다) ‘세계’(The World) 카드와 같은 의미가 된다. 21번 카드는 세계를 이루는 물·불·바람·흙을 관장하는 여성의 모습으로 표현된다. 예수처럼 매달린 남자가 스스로 자처한 고행과 끝에 다다른 자리는 여신의 세계였다.

영화에서 두번째 키메라를 맞이한 아르투가 발견하는 건 에트루리아의 키벨레 신전이다. 키벨레는 세계를 낳고 먹이고 거두어 가는 위대한 땅의 신이다. 그는 풍양다산을 관장했고, 산림의 수호신이었으며, 동물들의 여신이었다. 키벨레는 예수의 등장과 함께 남성 유일신에 대한 믿음이 대중화되기 전, 로마에서 가장 숭배받는 존재였다. 그러나 모신 사상은 곧 이교도의 믿음으로 떠밀려 났다. 그렇게 지하세계에서 잠들어 있던 키벨레가 ‘매달린 아르투’와 함께 깨어난다. ‘키메라’는 파괴적인 힘을 자랑하는 여성 괴물의 이름이고, 그가 낳은 것이 스핑크스였다는 사실은 영화의 신화적 상상력이 구축되는 역사 인식의 바탕이다. 키메라와 스핑크스 역시 남성 유일신 사상과 가부장제가 자리 잡기 이전에 인간과 함께했던 모신들의 계보 안에 있었다.

순교자인 아르투가 만난 키벨레의 진리란 “물질주의의 도래”(로르바케르)에 대한 비판이다. 로르바케르는 ‘씨네21’과의 인터뷰에서 이 영화가 “고대 에트루리아 무덤을 훼손할 자격이 스스로에게 있다고 감히 믿는 어느 세대의 이야기”라고 말했다. 그 세대는 돈이 신의 자리를 차지한 시대에 태어나 자랐다.

그러나 아르투는 곧 키벨레를 잃는다. 장물아비이자 기업가인 스파르타코(알바 로르바케르)가 톰바롤로를 속이고 키벨레 상을 갈취해 가는 것이다. 스파르타코는 세계 유수의 박물관들이 참여하는 비밀 경매에 키벨레를 내놓는다. 화려한 언변으로 이 눈부신 유물은 값을 매길 수 없는 물건이라고 강조하던 스파르타코는 이 한마디로 여신상 영업을 마무리한다. “값을 매길 수 없는 것에 값을 매기는 일, 그게 바로 우리가 하는 일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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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보면 좋을 영화 ‘행복한 라짜로’

엠엔엠 인터내셔널 제공

이것이야말로 물질주의 시대에 자본이 하는 일이다. 모든 것을 숫자로 환원해서 값을 매긴 뒤 상품화해버리는 것. 그리고 화려한 전시대 위에 올려놓고 사람들의 관심과 주목을 끌어모아 돈을 버는 것. 땅도, 죽음도, 그로부터 비롯된 유물과 신성도, 그 상품화의 격자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므로 인간이라고 예외가 될 수는 없다. 이에 장단 맞춰 우리들은 그 상품 앞에서 인스타용 사진을 찍어 돈으로 구매한 경험을 자랑하고, 또 그렇게 주목을 끌어 스스로의 상품성을 높이려고 한다. 성공한다면 ‘인플루언서’가 될 터다.

물론 영화는 1980년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으므로 영화 속 인물들은 아직 그 단계까지 도달하지 않았다. 그러나 매스미디어와 물질주의가 이탈리아를 잠식했던 1980년대가 지나고 나면, 위대한 ‘셀레브리티 문화’가 지배하는 1990년대가 열린다. 이것이 물질주의와 문명의 문제를 탐구해온 로르바케르가 1980년대 이탈리아로 돌아간 이유다.

아르투가 배신을 당하고도 톰바롤로를 떠나지 못했던 건 잃어버린 연인을 찾기 위해서였다. 이야기의 끝에 아르투는 연인과 재회한다. 그들은 붉은 실로 연결된 인연, 홍연이다. 때로 소유가 아닌 상실이 우리를 존재하게 한다는 걸 이해하는 건 죽음의 세계를 삶의 세계처럼 껴안고 살아가는 아르투뿐이다.

그래도 상실이 모든 건 아니다. 로르바케르는 돌보고 먹이고 가꾸고 수리하며 ‘살아가는 일’ 역시 우리를 존재하게 한다고 말한다. 그건 ‘행복한 라짜로’에서 도시 아스팔트 사이로 피어나는 치커리를 찾아 도시 빈민을 먹이는 라짜로에서부터 이미 그가 다루어온 주제다. 이 돌봄의 테마는 ‘키메라’에선 아르투와 마음을 나누는 이탈리아(카롤 두아르테)를 통해 그려진다. 그는 버려진 역사(驛舍)를 집으로 재구축하고, 떠도는 아이들을 모아 하나의 공동체를 꾸린다. 아르투가 여기에 합류하려고 할 때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던지는 질문은 하나다. “아이들을 잘 돌보나요?”

로르바케르는 ‘행복한 라짜로’에서 21세기의 예수 라짜로를 그렸다. 라짜로는 자연 속에서 숨을 거두었지만 선선히 부활해 도시로 찾아온다. 그리고 차가운 은행 바닥에서 또다시 죽음을 맞이한다. 5년의 시간이 흐른 뒤, 로르바케르는 신의 아들이자 남성 순교자라는 믿음이 밀쳐냈던 여신의 세계, 키벨레의 세계로 시선을 돌렸다. 결국은 특별한 존재인 라짜로와 아르투가 아니라 일상적인 노동을 지속하며 공동체를 일군 ‘행복한 라짜로’의 안토니아(알바 로르바케르)와 ‘키메라’의 이탈리아가 로르바케르가 그리고자 했던 영성과 구원의 내용이었는지도 모른다. 안토니아와 이탈리아가 여신의 체현이라면, 라짜로와 아르투는 여신의 영매들인 셈이다. 다시 한번, 과분한 영화를 만나고 말았다.

영화평론가

‘손상된 행성에서 더 나은 파국을 상상하기’ 저자. 개봉 영화 비평을 격주로 씁니다. 영화는 엔딩 자막이 올라가고 관객들이 극장 문을 나서는 순간 다시 시작됩니다. 관객들의 마음에서, 대화에서, 그리고 글을 통해서. 영화담은 그 시간들과 함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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