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허 아래 암흑의 진실을 보는 ‘동시대인’

한겨레21 2024. 4. 14. 0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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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기호의 이야기 사회학]세월호 참사 희생자 가족의 질문에 어떻게 답하는지가 우리 사회·정치 공동체의 크기와 형태가 된다
2024년 3월14일 세월호 참사 10주기를 앞두고 전국시민행진을 19일째 진행 중인 세월호 유가족과 시민들이 인천시청에서 세월호 추모관이 있는 인천가족공원을 향해 걷고 있다. 류우종 기자

이번 학기 재난피해자권리센터와 함께 기획·진행하는 ‘참사, 애도와 서사’ 수업에 참여한 학생들에게 숙제처럼 남겨진 말이 있다. 또래인 한 희생자 동생의 이야기였다. 세월호 참사로 언니를 잃은 동생은 어느 날 사랑하는 딸을 잃은 어머니에게 문득 “엄마, 뭐 하러 열심히 살아요? 어차피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데”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 말을 들은 어머니는 너무나 당황해서 “그래도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되지”라고 대답했지만 자기도 그 말에 아무런 힘이 느껴지지 않았다며 학생들에게 “어떻게 대답해야 했을까요?”라고 되물었다. 학생들 역시 쉽게 답하지 못했다.

맞는 말이라서 두려운 말

뭐라고 대답할 수 있을까? 대부분의 사람은 어머니처럼 답했을 것이다. 그래도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되고 열심히 살아야 한다고 말이다. 그러나 대답은 그렇게 하면서도 동시에 할 말이 없다고 느낄 것이다. 동생의 말이 틀린 게 아니라 환영 속에 가려진 현재의 어떤 진실을 드러내는 말임을, 사건을 경험한 사람은 누구나 알기 때문이다. 맞는 말이기에 저 말은 두려운 말이다.

동생의 말을 통해 드러나는 것은 한 층위에서의 인간은 ‘어차피’ 누구나 다 죽는다는 숙명에 대한 진실이지만, 다른 한 층위에서는 연속되는 사건으로 드러나는 ‘언제 죽을지 모르는’ 동시대 삶의 운명에 대한 진실이다. 언니의 죽음이라는 개인적 사건을 통해, 외면하고 있던 죽음이라는 인간의 운명에 대한 진실(메멘토 모리)과 함께 감추어져 있던 동시대의 무능(재난에 대처하고 책임지고 희생자를 위로하는 시스템의 부재)이 드러났다.

진실이 드러날 때 인간은 말문이 막힌다. 의미를 전달하는 많은 말은 진실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의미 없음’이라는 진실을 감추는 역할을 한다. 의미를 통해 진실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그 의미를 떠받치는 지반이 매우 허약하다는 세계의 실재를 감추는 역할을 하는 것이 말이기 때문이다. 사실 말이라는 잘 짜인 상징 질서에 머물 때는 모든 것이 의미가 있다. 그러나 의미를 무화하는 사건의 발생은 이 의미를 발생시키는 질서를 한순간에 무너뜨린다. 감춰진 현실의 참혹하고 허약한 진실을 드러내는 말, 그 말을 그리스도교적으로 본다면 ‘묵시문학’이라 할 수 있다.

한국에서 개신교는 계시록으로, 천주교에서는 묵시록으로 번역하는 그리스도교 성경의 마지막 책 이름으로 알려진 아포칼립스는 ‘덮개를 걷다’는 뜻의 그리스어에 기원을 둔다. 신이 덮개를 열고 감춰진 미래의 비밀을 보여준다는 뜻이다. 대중적으로 이 감춰진 미래의 비밀은 큰 전쟁과 재앙으로 인한 세계의 종말, 그리고 그 재난 이후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지칭한다. 넷플릭스 드라마 <지옥>이나 <스위트홈>도 아포칼립스물이라고 할 수 있다.

계시록이라고 하면 문자 그대로 미래에 벌어질 일을 기록한 내용이라고 생각하지만 묵시문학이라는 말의 의미는 조금 다르다. 유대교와 그리스도교의 역사에서 묵시문학은 묵시의 주체가 정치적 공동체인 나라를 잃고 고통받던 시대에 출현했다. 자신의 운명이 남의 손에 맡겨진 정치적으로 철저히 수동적인 존재로 전락한 존재들의 눈에 보이는 세계의 모습이며 그 세계 너머에 있는 새로운 세계에 대한 ‘비전’이다.

이미 도래한 파국

묵시문학의 눈에 비친 현재 세계의 모습은 악이 지배하는 파국이다. 이 파국은 임박했으며 돌이킬 수 없다. 대충 수리해서 사용하거나 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철저히 단절해야 하는 파국이다. 오로지 단절을 통해서만 새로운 세계로 나아갈 수 있다고 본다. 1990년대에 나온 한 구호로 정리한다면 “단절의 꿈이 미래를 만든다”는 것이 파국론에 기초한 묵시문학적 세계관이라고 할 수 있다.

묵시문학은 파국으로서의 현재와 미래에 대한 새로운 비전을 회화적인 환영으로 보여주는 것이 특징이다. 의미를 전달하는 개념이 아니라 감각적으로는 강력하고 뚜렷한 이미지(대부분은 매우 섬뜩하다)이지만, 의미론적으로는 숫자나 동물 등과 같이 수수께끼 같은 환영의 이미지로 보여준다. 따라서 미래의 비밀이 풀이를 필요로 하는 이미지 안에 감춰져 있는 것이다.

그러나 파국론의 입장에서 본다면 묵시문학은 미래의 모습을 환영으로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들은 현재가 환영이니 환영에서 깨어날 것을 촉구한다. 즉 파국은 그것이 임박했든 아니면 먼 미래에 도래하든 ‘아직 오지 않은’ 시간에 벌어지는 일이 아니라 지금 이미 도래한 사건이다. 파국은 이미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계에서 펼쳐지고 있는데 현실이라는 환영에 가려서 우리가 못 보는 것이다. 우리가 현실이라고 감각하는 것, 그것이 환영이며 그 환영에서 깨어나야 실재를 볼 수 있다. 묵시문학은 미래의 비밀이 아니라 현재의 덮개를 열어 현실이라는 환영에 가려진 현재의 실재를 드러낸다. “왜 열심히 살아요? 어차피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데”라는 동생의 말처럼 말이다.

‘참사, 애도와 서사’ 수업에 참여한 애니메이션 전공 양세은 학생이 그린 그림. 양세은 제공

그럼 누구의 눈에 환영의 커튼이 걷힌 진실이 보일까? 재난과 참사를 당한 사람들이다. 히브리인이 나라를 잃고 노예가 되거나 이산민이 되어 철저히 고통받을 때 묵시문학이 나타난 것처럼 허약한 현실 밑에 가려진 동시대의 진실은 고난받는 사람의 눈에 나타난다. 현실의 화려한 빛에 눈이 가려진 사람은 현실을 견고한 것으로 감각한다. 그는 이 견고한 모든 것을 잘 보지만 동시대는 볼 수 없다. 동시대는 암흑 속에 감춰져 있기 때문이다. 재난과 참사를 통해 무너진 사람들의 눈에만 그 폐허 아래에 있는 암흑이 보인다. 이 지면에서 몇 차례 얘기했지만 철학자 아감벤은 이 암흑을 보는 사람을 동시대인이라고 했다.

그렇기에 재난과 참사의 생존자는 이미 도래한 파국이 전체의 파국이 되기 전에 미리 본 사람이라는 점에서 묵시문학적인 ‘선지자’다. 파국은 재난과 참사의 당사자인 그들에게는 이미 일어났다. 다만 아직 다른 사람들에게 일어나지 않았거나 일어났더라도 감각하지 못할 뿐이다. 그렇기에 그들은 미래에 일어날 일을 미리 맞히는 점쟁이가 아니라 아직 감각하지 못하는 나에게 일어난(날) 일을 미리 경고하며 이것이 너의 현실이라고 일깨워준다는 점에서 선지자인 것이다.

묵시를 무화하는 두 가지 방식

이 선지자들의 말을 무화하는 두 가지 방식이 있다. 하나는 철저하게 개인적 사건으로 고립시키는 것이다. 김용균의 죽음부터 구의역 사건까지, 세월호에서 이태원까지, 가습기살균제 피해에서 코로나19 백신 부작용 피해까지, 채 상병의 죽음 등 이 모든 죽음을, 희생당한 사람들의 개별적인 불운의 문제로 여기는 것이다. 이들은 동시대적 사건을 철저하게 운과 불운의 문제인 사고로 치부하려 한다. 이것이 사고인 한에서 책임은 개인이 져야 한다고 한다.(나는 ‘일부’ 진보가 책임을 개인의 무능 문제로 치부하려는 가장 추악하고 수치스러운 사례가 천안함에 대한 음모론과 최원일 함장에 대한 공격과 폄훼라고 생각한다.)

책임을 개인화하는 것과 바로 맞물려 현실이 환영이라는 재난과 참사 생존자들의 경고를 외면하는 다른 방식이 인간의 보편적 숙명의 문제로 돌려버리는 것이다. 재난과 참사에 대한 ‘메멘토 모리’류의 담론은 동생의 말에서 ‘어차피’라는 말에만 주목해 모든 인간은 죽는다고 말하는 것으로 “언제 죽을지 모르는데”라는 말이 드러내고 질문하고자 한 동시대의 실체에 대한 간파를 외면하고 무력화한다. 그럼으로써 이 질문에 답해야 하는 자들은 다시 동시대의 암흑 속으로 숨어버린다. 이것이 감추어진 것을 드러내는 묵시를 무화하는 방식이다.

(이런 점에서 동시대의 진실을 경유하지 않은 개인의 진실에 대한 이야기와 보편적 운명에 대한 이야기는 경계해야 한다. 틀리거나 잘못된 이야기이기 때문이 아니라 드러나야 하는 진실을 감추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현재 한국에서 유행하는 죽음과 늙음에 대한 담론이 위험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개인과 보편적 운명 사이에서 그 늙음과 죽음의 양식과 양식의 차이가 실천되는 ‘정치 공동체’에 대한 이야기가 쑥 빠져 있다. 인간의 정의 자체가 정치공동체 안에서 살아가는 존재임을 생각해보면 동시대적 삶의 양식을 규정하는 정치 공동체를 빼놓고 인간의 운명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정말 기괴한 일이다.)

따라서 이야기는 동생의 질문과 함께 끝나는 것이 아니다. 저 질문에 어떻게 대답하는지가 바로 우리의 운명을 담는 그릇으로서의 사회 혹은 정치 공동체의 크기와 형태가 된다. 묵시문학으로서의 이야기는 우리 정치 공동체의 모습이 베일을 벗고 드러나도록 하는 것이다. 그저 사고로 취급하거나 어쩔 수 없는 인간의 보편적 운명이라고 답한다면 뻔뻔한 철면피로서의 우리 사회·정치 공동체의 모습이 드러난다. 만일 아직 대답하지 못하고 있다면 그 또한 바로 무능하고 초라한 사회·정치 공동체의 모습이며 그 공동체 안의 구성원이자 행위자인 시민으로서의 우리 모습인 것이다.

초라함과 무능을 함께 고백하는 공동체

학생들에게 솔직하게 고백했다. 어떻게 대답하면 좋겠냐는 어머니의 질문에 나는 대답할 말이 없다고 했다. 나는 모르겠다고. 학생들에게 물으니 또 솔직하게 말한다. 자기들도 모르겠다고 말이다. 적어도 참사와 애도를 이야기하는 교실에서는 우리가 아직 대답할 말이 없다는 것, 그 무능과 초라함이 우리 모습이라는 것을 고백했다. 그리고 기적은 발생한다. 자신의 초라함과 무능에 대해 공동 고백하는 정치 공동체, 사회는 이 공동 고백과 함께 시작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폐허 위에서 공동의 답을 함께 찾으려는 공동체, 그 답을 찾는 과정의 이야기를 만드는 공동체, 그 이야기를 만드는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공동체, 교실이 시작됐다. 저 질문 다음의 한 컷을 만들기 위한.

엄기호 사회학자·청강문화산업대학 교수

*엄기호의 이야기 사회학: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생겨나는 시대와 사회에 대한 고민을 같이 나눕니다. 격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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